제2천년기 후반의 서부 국가들 : 시리아- 팔레스타인
시리아-팔레스인 지역의 정치적 파편화로 인해 그 지역은 주변의 강대국의 영토 확장 야욕의 손쉬운 대상이 되었다. 제2천년기 중반의 암흑 세기들이 끝날 때 북시리아는 미타니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집트 제18왕조의 설립과 함께 이집트는 시리아 지역에 세력을 빠르게 확장하였다. 정복한 지역에 대한 이집트 통치는 미타니의 통치보다 더 직접적이었다. 토종 왕조들은 속국에 대한 통치를 계속할 수 있었으나 이집트 사신들에게 해마다 공물을 바쳐야 했다.
1590년 히타이트 제국(빨간색), 1300년 히타이트 제국(주황), 이집트 영향권(녹색)
하티의 왕이었던 숩필룰리우마는 미타니는 1340년 직후에 정복하였다. 그리고 이집트가 자신의 것으로 간주했던 영토까지 침입하였다. 그때까지 미타니에 의존했던 북시리아 국가들과 우가릿, 카데스, 아무루와 같은 도시들이 히타이트의 속국이 되었다. 히타이트 왕은 자신의 아들들을 카르케미스와 알레포 같은 핵심 도시에 총독으로 세웠다. 속국들 사이의 갈등은 카르케미스에 있던 총독이 중재하였다.
시리아-팔레스타인에 이집트와 하티 사이의 힘의 균형은 이집트 19왕조가 시작될때까지 안정적이었다. 19왕조가 시작되면서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는 이집트의 영향력을 북쪽으로 확대하려 하였다. 이런 시도는 카데스 전투(1274)에서 하티의 왕 무와탈리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 후 15년 후 두 나라는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은 북시리아로 확장해 오는 아시리아의 위협을 염두에 둔 것이었을 것이다.
아무루 왕국은 오늘날 레바논 북쪽 지중해 해안에서 시리아 내륙의 홈스(Homs)평야를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다. 처음에 아무루는 이집트 영향권 아래 있었을뿐 아니라 투트모세 3세에 의해 정복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르나 편지에서 아무루가 자주 등장한다. 아마르나 시대 초반에 아지루(Aziru) 왕이 아무루의 왕이 되려고 노력한 것 같다. 이를 위해 그는 이집트 사신이 살던 시무루라는 도시를 정복하였다. 아지루가 그 도시를 성공적으로 정복하자 이집트 사람들은 아지루에게 그 도시를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아지루가 그 도시를 다시 돌려주자 비로소 그를 아무루의 왕으로 인정해 주었다. 아무루는 이집트의 통치 영역의 북쪽 가장 끝자락에 위치했다. 비블로스의 왕 리브-앗다(Rib-Adda)는 아지루가 자신을 전복시키고 다른 나라들이 친-히타이트 전선에 참여하도록 선동한다고 비난하였다. 아지루는 이런 비난에 대해 이집트를 방문해서 자신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지루가 이웃 나라들을 침략함으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했다는 것이다. 숩필룰리우마가 미타니의 영향력을 북서 시리아에서 완전히 없앴을 때 아지루는 하티와 조약을 맺고 하티를 자신의 종주왕으로 받아들였다.
아지루의 두 번째 계승자인 투피-테숩은 무르실리 2세와 조약을 갱신했다. 무르실리 2세는 시리아 지역에 대한 이집트 제19왕조의 공격적인 확장을 경계하였다. 아무루의 다음 왕인 벤테시나(Benteshina)는 이집트의 군사적 성공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무르실리 2세의 보복 원정의 원인이 되었다. 벤테시나는 패배하여 하티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약 15년 동안 무르실리는 충성스런 속국 왕으로 섬겼던 샤필리(Shapili)가 대신 왕이 되었다. 하티에서 하투실리 3세가 (벤테시나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벤테시나를 아무루의 왕으로 복직시켰다. 하투실리 3세와 벤테시나 사이에 조약이 맺어졌다. 그들의 동맹은 벤테시나가 하투실리의 딸과 결혼하고 그의 딸이 하투실리의 아들과 결혼함으로써 굳건해졌다. 벤테시나는 하투실리에게 충성했고 그를 이어 그의 아들 샤우스가-무와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의 매형이자 삼촌인 툿할리야 4세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샤우스가-무가와는 하티가 아시리아와 전쟁할 때 지원군을 보내야 했다. 아무루에 관한 마지막 정보는 우가릿 사료에서 나온다. 그것은 우가릿의 왕 암미스탐루 2세와 벤테시나의 딸과의 이혼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하티의 왕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하티의 왕이 직접 개입하였다.
1200년 직후 하투사의 멸망은 우가릿과 에마르의 파괴와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에마르의 종말은 1185년 혹은 그 직후로 추정된다. 우가릿의 마지막 순간은 해상 침략가들의 공격을 포함한 외부적인 어려움으로 특징된다. 전체 지역은 곧 수세기 동안 지속될 역사적 암흑기로 접어든다.
우가릿 문학은 제2천년기의 가나안 문화, 서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문학적, 종교적 전통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을 제공한다. 우가릿 인구가 6,000~8,000명 사이이고 그 도시 인구를 지탱하는 시골 인구는 약 2만명에서 2만 5천명 정도가 150여 개의 마을에서 살았다. 노동자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마을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도’ 혹은 ‘도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비어인 하비루(habiru)라는 말로 불렀다. 도시 엘리트들의 노동력에 대한 높은 수요와 제한된 노동력 공급 사이의 불균형이 매우 커서 그로 인해 나타난 긴장은 제2천년기 후반의 시리아-팔레스타인의 특징이었던 왕궁 제도의 몰락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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