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아시리아 (기원전 14~11세기)
현대 역사가들은 아시리아 역사를 대략적으로 고대, 중세, 신-아시리아 시대로 삼분한다. 제2천년기 중엽부터 말까지는 중세 아시리아 시대로 불린다.
[중세 아시리아 군주 목록] 중기 연대기
- Ashur-uballit I (1365 – 1330 BC) : Son of Eriba-Adad I
- Enlil-nirari (1329 – 1320 BC) : Son of Ashur-uballit I
- Arik-den-ili (1319 – 1308 BC) : Son of Enlil-nirari
- Adad-nirari I (1307 – 1275 BC) : Son of Arik-den-ili
- Shalmaneser I (1274 – 1245 BC) : Son of Adad-nirari I
- Tukulti-Ninurta I (1244 – 1208 BC) : Son of Shalmaneser I
- Ashur-nadin-apli (1207 – 1204 BC) : Son of Tukulti-Ninurta I, usurped the throne from his father
- Ashur-nirari III (1203 – 1198 BC) Son or nephew of Ashur-nadin-apli
- Enlil-kudurri-usur (1197 – 1193 BC) : Son of Tukulti-Ninurta I, usurped the throne from Ashur-nirari III
- Ninurta-apal-Ekur (1192 – 1180 BC) : Descendant of Adad-nirari I, usurped the throne from Enlil-kudurri-usur
- Ashur-dan I (1179 – 1134 BC) : Son of Ninurta-apal-Ekur, regnal dates from Ashur-dan I onwards are consistent in all chronologies
- Ninurta-tukulti-Ashur (1133 BC) : Son of Ashur-dan I
- Mutakkil-nusku (1133 BC) : Son of Ashur-dan I, usurped the throne from Ninurta-tukulti-Ashur
- Ashur-resh-ishi I (1132 – 1115 BC) : Son of Mutakkil-nusku
- Tiglath-Pileser I (1114 – 1076 BC) : Son of Ashur-resh-ishi I
- Asharid-apal-Ekur (1075 – 1074 BC) : Son of Tiglath-Pileser I
- Ashur-bel-kala (1073 – 1056 BC) : Son of Tiglath-Pileser I
- Eriba-Adad II (1055 – 1054 BC) : Son of Ashur-bel-kala
- Shamshi-Adad IV (1053 – 1050 BC) : Son of Tiglath-Pileser I, usurped the throne from Eriba-Adad II
- Ashurnasirpal I (1049 – 1031 BC) : Son of Shamshi-Adad IV
- Shalmaneser II (1030 – 1019 BC) : Son of Ashurnasirpal I
- Ashur-nirari IV (1018 – 1013 BC) : Son of Shalmaneser II
- Ashur-rabi II (1012 – 972 BC) : Son of Ashurnasirpal I
- Ashur-resh-ishi II (971 – 967 BC) : Son of Ashur-rabi II
- Tiglath-Pileser II (967 – 935 BC) : Son of Ashur-resh-ishi II
- Ashur-dan II (935 – 912 BC) : Son of Tiglath-Pileser II
[아시리아의 앗수르 우발릿 1세]
14세기에서 11세기까지는 아시리아는 앗수르 시를 중심으로 한 작은 왕국에서 거대한 영토 국가로 발전하여 지역 문제에 지도자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시대 최초의 중요한 왕은 앗수르-우발릿 1세(재위 1363~28)다. 그는 아시리아 본토, 특히 티그리스 계곡과 동쪽의 평야, 앗수르 시에서 북쪽의 타우르스 산맥에 이르는 지역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였다.
15세기에 아시리아는 북시리아의 미타니에게 완전히 정복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아시리아 왕은 미타니의 속국 왕이었을 것이다. 히타이트가 서쪽의 미타니 왕국을 공격했을 때 앗수르-우발릿은 동쪽 영토를 병합함으로써 자신을 국제적 인물로 세워갔다. 이집트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적어도 미타니 왕과 동일한 지위를 주장하려 하였다. 바빌로니아 왕이 앗시리아 공주인 무발리탓-세루아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인 카라-하다스가 바빌론에서 일어난 반란에서 살해되었을 때 앗수르-우발릿은 개입하여 반란으로 카시트 왕위를 주장한 자를 폐위시키고 쿠리갈주 2세를 왕위에 세웠다. (268)
[아닷-니라리 1세, 살마네저 1세, 투쿨티-니누르타 1세]
앗수르-우발릿의 죽음과 함께 아시리아의 힘은 일시적으로 쇠퇴한다. 바빌로니아는 분명히 아시리아에서 독립하여 거의 군사적으로 동등한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세 명의 장수한 아시리아 왕에 의해 역전되었다. 이들의 재위 기간은 13세기 전체를 아우른다. 아닷-니라리 1세는 1305~1274년까지, 살마네저 1세는 1273년부터 1244년까지, 마지막으로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1243년에서 1207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들의 군사 활동의 주요 초점은 서부였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이전에 미타니 왕국의 영토였던 유프라테스 동쪽 지역을 아시리아의 직할 지역으로 만들었다. 아시리아인들이 하니갈밧으로 불렀던 나라의 왕은 이제 속국 왕이 되었다. 그가 봉기했을 때 살마네저 1세는 그의 나라의 남쪽 서쪽 영토를 차지하고 요새와 행정 센타를 세웠다. 후에 영토의 북쪽과 서쪽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유프라테스 서쪽의 북시리아 전체 지역을 병합하였다. 그는 이제 서부 시리아를 통치했던 히타이트와 국경을 두고 대면하게 되었다. 아닷-니라리가 미타니 지역을 사실상 통치한 후 그는 하티의 왕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를 형제라고 불렀다. 히타이트 왕들은 아닷-니라리 1세와 살마네저 1세와 외교적 서신을 교환하였다. 이때 협박과 우호의 수단이 모두 사용되었다.
서부 영토에 대한 아시라의 관할은 운하와 도로로 연결된 전략적 요충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살마네저 1세는 지방 사람들을 통제하는 새로운 방법이 도입하였다. 전체 주민을 하니갈밧 영토 안에서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강제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투쿨티-니누르타 1세 아래서 이 관습이 확대되어 북시리아 사람들이 아시리아로 강제 이주당해 그곳에서 공공 사업과 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이시리아의 확장은 서쪽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군사적 원정은 시리아 북쪽, 동아나톨리아 지방까지 확장되었다. 구티아인 혹은 수바르인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아시리아의 동쪽에 위치한 산족들도 군사원정의 목표였다. 투쿨티-니누르타 1세가 카스틸리아슈 4세를 무찔렀을 때 바빌로니아는 다시 한번 아시리아의 통제 아래 들어온다. 투쿨티-니누르타의 바빌론 정복은 긴 서사시의 기록으로 남는다. 그는 ‘아시리아의 왕 그리고 카르두니아스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십파르와 바빌론의 왕, 틸문과 멜루하의 왕, 북해와 남해의 왕, 광대한 산들과 평야의 왕, 수바르인들과 구티아인들의 왕, 나이리의 모든 땅의 왕’이라는 칭호를 취하며 광대한 영토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성기도 투쿨티-니누르타의 암살로 갑작스럽게 끝난다. 그 후 아시리아는 혼란에 빠지고 그 틈을 타 새로운 비-정착민이 동아나톨리아와 북시리아로 침입해 들어왔다. 북시리아는 점점 살마네저 1세에 의해 저지당했던 아람인들에의해 잠식된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쇠퇴는 두 왕, 지역의 내부적 안정을 도모했던 앗수르-레샤-이쉬 1세(재위 1132~15)와 사방으로 군사적 원정을 감행했던 티글라스-필레저 1세(재위 1114~1076)에 의해 잠시 멈춘다. 서쪽으로 티글라스-필레저는 아람인들과 무스쿠인들과 싸웠으나 그들의 반격으로 앗수르 근처의 에칼라툼을 빼앗겼다. 북쪽으로 그는 반(Van) 호수 연안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이 두 왕의 성공은 잠시뿐이었고 1050년까지 아시리아의 핵심 영토만을 남기고 북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을 아람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후 100년간 아시리아는 국제사회에 이름을 내놓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투쿨티-니누르타가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 카르-투쿨티-니누르타로 명명된 이 도시는 티그리스 강 유역의 앗수르 맞은 편에 위치하였다. 투쿨티-니누르타가 암살된 후 그 도시의 중요성은 크게 감소되었다.
[중세 아리시아의 사회]
중세 아시리아 사회는 군국주의 정책에 크가 영향받았다. 아시리아의 본토에서 농지의 상당 부분이 왕의 소유였고 왕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나 가족을 위해 땅 사용권이 분배되었다. 다른 근동 사회에서와 같이 아시리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빚에 시달렸다. 여자들은 전적으로 남편과 아버지의 부양에 의존했고 어떤 일탈행위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처벌받았다. 남편이 적에게 사로잡힌 여인은 재혼하기 위해서는 2년을 기다려야 했다. 범죄에 대한 형벌은 보통 신체 절단이었다. 개인으로부터 물건을 훔치다 잡힌 여인은 남편에 의해 귀가 절단되었고 피해자에 의해 코가 절단되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결혼한 여인이 혼자 외출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머리를 가려야 했다. 결혼하지 않은 여인들, 노예들 그리고 창녀들은 머리를 가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머리를 가린 창녀는 50대의 곤장을 맞고 옷을 벗기 후 뜨거운 액체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궁녀들에 대한 접근이 감시되었고 여인에게 접근하는 외부인은 거세 여부를 검사받아야 했다. 궁녀가 제3자 없이 남자와 접견하면 둘 다 사형에 처했다. 종이 어깨를 드러낸 궁녀와 이야기하면 그는 곤장 100대를 맞았다. 우리가 이 법을 통해 느끼는 점은 아시리아 사회가 엄격한 행동 규율을 신민들에게 부여한 왕궁 중심의 사회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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