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AE, 오만, 바레인의 역사] 2강 :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등장과 번영
세계에 공포와 존경의 존재가 된 것은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아랍 민족을 대표하기 시작할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메카에서 견습 상인이었던 무함마드가 이슬람교의 창시자였는데 당대 새로운 종교운동의 지도자, 정치인, 용감한 군대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가 견습 상인었을 시절에 다마스커스에서 동로마의 기독교를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1315년의 그림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바히라(Bahira)가 무함마드에게 머리를 숙이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상당히 의미있는 그림으로 이슬람교도들은 구약과 신약에 자신들의 경전인 코란을 포함해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슬람은 중동 종교의 최종 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행하던 무함마드에게 지브릴(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서 “읽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무함마드는 ‘알라의 편지, 알라의 편지배달부’로 언급되기도 하며, 신의 메시지를 받아 적게 하기 위해 선택된 인간이라고 본다. “읽어라!”는 단어의 명사형인 “읽음”이 아랍어로 ‘코란’이다. 코란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에 의해서 이슬람은 번역본으로 예배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민족드이 아랍어를 알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무함마드는 ‘신은 하나’라고 강조하였다. 당시에 유목민들은 각 부족들마다 다른 신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하나의 신으로 통합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간 것이다. 그러나 메카의 기득권 세력은 그러한 무함마드를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제거하려고 하였고, 무함마드는 서기 622년에 메카를 탈출한다. 메카에서 탈출해서 간 도시는 원래는 ‘야스립’이라는 도시였는데, 이후 ‘바로 그 도시’라는 의미의 ‘알메디나’로 부르면서 ‘메디나’라고 알려졌다.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망간 것을 이것을 ‘헤지라’라고 하고 이때(622년)을 이슬람 달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당시 유목민들의 사회는 ‘힘이 곧 정의’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이기면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강성해지는 무함마드 밑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이슬람의 모임’을 ‘움마’라고 한다.
무함마드와 함께 행동했던 4대 지도자를 칼리프라고 한다.
칼리프(Caliph)는 이슬람 제국의 주권자 칭호.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이슬람 교리의 순수성과 간결성을 유지하고, 종교를 수호하며, 동시에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모든 일을 관장하는 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가리킨다.
- Abu Bakr(아부 바크르 아스시디크)
- Uar ibn al-Khattab(우마르 이븐 알카타브)
- Uthman ibn Affan(우스만 이븐 아판)
- Ali ibn Abi Talib(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이들 중에 네 번째 통치자는 무함마드의 혈연(무함마드의 사촌동생, 무함마드의 보호자 아부 탈리브의 아들이고,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남편)이었다. 나머지 세명의 칼리프들은 무함마드와 함께 행동했던 사람들로 무함마드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코란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훗날 ‘수니파’가 여기에 속한다.
4대 칼리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와 쿠라이시 부족의 상인 가문인 우마이야 가문의 이븐 아비 수프얀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졌으며, 657년 시핀 전투(Battle of Siffin)가 벌어진다. 이때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4대 칼리프 알리가 승기를 잡았고, 무아위야와 평화협정을 벌이게 된다. 이때 알리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서 평화협정을 반대하는 입장과 찬성하는 입장이 나뉘게 되었고, 협정을 반대하는 급진파들 카와지리파(Kharijite)를 결성한다. 원래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알리파’라고 했는데, ‘파’라는 단어가 아랍어로 ‘시아’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시아-알리’라고 불렀다. 카와지리파는 ‘시아 알리’가 비겁하다며 무아위야를 끝까지 죽이자고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걸어나온 자들’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카와지리파는 결국 알리를 암살하게 된다. 카와지리(하리지)파는 이후 강경 극단적 태도로 거의 소멸하고 현재는 가장 온건파인 이바디파(Ibadism)가 오만에서 존속하고 있다.
4대 칼리프인 알리가 죽은 다음에 알리의 아들 하산 이븐 알리와 무아위야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는다고 약속을 했지만 ‘시아파’(알리파)가 분열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아들 (야지드)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하산 이븐 알리의 동생인 후세인 이븐 알리는 야지드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항의하였다. 후세인은 카르발라 도시를 건너가는 중에 야지드의 군대가 습격을 해서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이것이 수니파와 시아파가 천년이 넘어도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된 계기라 할 수 있다.
시아파들에게는 후세인이 살해된 날이 매우 중요하였다. 후세인이 머리에 칼을 맞고 죽었다고 해서 그날에는 머리에 칼로 상처를 내서 피를 몸에 묻히는 의식을 아직도 거행하기도 한다. 시아파들은 이란에 많이 있다. (그런데 알카에다는 수니파가 중심이 되어 있다)
후세인이 죽은 뒤 아랍의 정치 세력은 무아위야의 후손들에게 넘어갔고, 이 시대를 아랍인들은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이 당시에는 서쪽으로 스페인을 거쳐 프랑스까지 진격하였고 동쪽으로는 당나라까지 진격하였다. 732년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인 카롤루스 마르텔이 프랑스의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군을 무찌른 전투가 ‘투르 푸아티에 전투’이며 이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은 서유럽으로의 확장이 저지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한동안 아이들 교과서에 ‘롤랑의 노래’가 실렸었는데, 이슬람을 격퇴하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편 동쪽으로 뻗어나가던 우마이야 왕조는 당나라와 탈라스 전투를 벌였다(751년). 이후 당나라는 서양과는 달리 이슬람과 교역을 하고 싶어했다. 결국 실크로드의 중심을 이슬람이 장악한 것이다. 이슬람의 종교를 믿는 상인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 [조승연의 비즈니스를 위한 세계사 - UAE, 오만, 바레인 편] 강의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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