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4일 화요일

천주교의 한국 전래 (3)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박해

천주교의 한국 전래 (3)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박해


[한국기독교의 역사]

 

1) 명례방사건(을사추조적발사건, 1785년 봄)

 

1785년 을사년 봄에 형조의 포졸들이 우연히 명례방(명동)에서 중인 출신의 김범우 집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처음에 포졸들은 이들이 노름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현장을 덮쳤는데 전혀 낯선 상황이었다. 이때 포졸들은 천주교 서적과 화상이 있는 것을 보고 일단 압수하였다. 이것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고 한다.

 

당시에 형조판서인 김화진은 집주인인 중인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들은 훈방하면서 사건을 마무리지으려고 하였다. 일종의 꼬리자르기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때 중인 신분의 김범우는 고문을 받고 밀양으로 유배 가서 고문 후유증으로 죽게 된다.

 

이때 석방된 사람들이 형조에 들어가서 압수한 성상들을 돌려달라고 물의를 일으켰고 유생들이 그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여론이 천주교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이 명례방 사건으로 많은 양반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배교하고 천주교를 떠나게 되는데, 이승훈과 정약용 등은 아버지들의 노력으로 일단 천주교와 거리를 두게 된다. 양반들은 가문을 위해서 천주교를 버리기도 하였다.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은 경주 이씨 문중회의에 불려가서 문책을 당하였고, 아들을 배교시키지 않으면 족보에서 제명시키겠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이부만이 아들인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별당에 가두었고,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이벽은 갑작스럽게 죽게된다. 이벽의 아버지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자살을 시도했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천주교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이것을 두고 배교했다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이벽의 죽음에 대해서 흑사병으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독살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여하간 이 사건의 장소였던 김범우의 집인 명례방에 그로부터 100년 후인 1898년에 명동성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2) 정미반회사건(1787년 겨울)

 

1787년 겨울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등이 김석태의 집에서 서학을 공부한 사실이 폭로되었다(정미반회사건). 이 사건을 폭로한 인물은 이승훈과 정약용의 친구인 이기경과 홍낙안이었다고 한다. 당시 성균관 주변은 과거 공부를 하는 유생들이 합숙하는 고시촌이었다. 이기경이 이승훈과 정약용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기경이 홍낙안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홍낙안은 과거시험 답안에서 이 문제를 폭로하기로 하고 17881월의 과거시험 답안지에 천주교의 문제점과 더불어 이승훈과 정약용이 여전히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이때 정약용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좌의정 채제공의 무마하면서 넘어갔지만, 소위 말해서 이승훈과 정약용은 요주의 인물로 찍혔고, 정조는 북경으로부터 서학서적 수입을 금지시키게 된다.

 

3) 신부 파견을 요청한 신앙공동체

 

천주교는 전통유학에 사로잡힌 양반계층보다 중인계층에게 더 빨리 전파되었다. 1786년 자생적으로 성장한 공동체는 교리서를 숙독하다가 자신들이 시행하는 교회제도가 불법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무자격자의 성사 집행이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1790년에 이승훈과 권일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윤유일을 통해 북경의 신부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을 받은 북경의 신부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들이 전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어떤 나라에서 신앙적인 내용을 스스로 탐구하다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을 통해 신부의 파견을 약속하였다. 이때 윤유일이 조상제사에 대한 선교사들의 견해를 물었는데, 프란치스코회 소속인 구베아 주교는 조상제사를 금지하는 천주교회의 입장을 단호하게 밝혔다. 이것은 조선 천주교회가 앞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교적 전통에 익숙한 상당수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이승훈도 제사불가라는 교리에 심히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나게 된다.

 

4) 진산사건(179111)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선비 윤지충이 천주교도로서 조상제사 불가라는 종교적 가르침을 지키고자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룬 후 제사를 폐하는 일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이로 인해서 윤지충은 179111월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소위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 조정의 당파싸움에 이용이 된다. 당시에 남인을 공격하려는 서인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남인들을 탄압하게 된다. 1787년에 정미반회사건으로 정약용 등과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토론했다가 한번 고초를 당했던 이승훈은 진산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는데, 바로 직전에 제사문제로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미 배교했다는 변론이 받아들여셔서 석방되었다. 조상의 제사문제에 대해서 정약용과 이승훈은 유학자로서 충효를 포기할 수 없어서 천주교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5) 주문모 신부의 입국

 

이승훈과 정약용 등의 양반들이 빠진 자리는 중인들과 여성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구베아 신부는 약속대로 조선에 신부를 파송하게 된다. 1794년 입국한 중국인 주문보 신부는 여성 신도인 강완숙의 집에 은신하면서 6년간 조선 천주교회를 지도하고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주문모 신부는 교리연구회 성격의 명도회를 조직해서 조선인 스스로 신앙훈련을 쌓도록 훈련시켰는데, 초대 명도회 회장은 정약종이 임명되었다. 1794년 주문모 신부 입국 당시 4,000명이었던 교세가 6년 후에 1만 여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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