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4일 화요일

천주교회의 수난과 발전 (1)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사건

천주교회의 수난과 발전 (1)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사건

 

[한국기독교의 역사]

 

1) 신유박해(1801)

 

정조 시대에는 채제공이 국정을 주도했는데, 남인 시파였던 그는 천주교를 묵인하는 입장이었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즉위하였는데, 11세의 어린나이였기 때문에 왕실의 어른 격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정조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노론 벽파와 뜻을 같이 하는 인물이었으며,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와 함게 남인 시파의 제거에 나섰다. 1801년 신유박해는 이런 정치적인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다.

 

신유박해 때 천주교 박해는 빌미일뿐이고 최우선적인 목표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의 제거에 있었다. 이가환이 1791년 진산사건 이후 배교하여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신유박해로 지식인들 중에서 천주교인들은 상당한 피해를 받았다.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권철신과 이가환은 옥사하였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당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교인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3월에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이때 궁궐에도 상당수의 천주교인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강화도에 유배중이었던 은언군과 그의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가 모두 사약을 받았고, 주문보 신부는 효수되었으며, 여성 평신도 지도자인 강완숙 등의 교인들이 처형되었다.

 

철종의 할아버지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은언군의 아내 송씨가 사약형을 받았다. 사도세자는 총 다섯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혜경궁 홍씨를 통해서 두 명을 낳았다. 첫째 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아들 이산이 왕이 되어 정조가 되었다. 이복동생으로는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등이 있었는데 은신군은 17세 때 영조 때 제주도로 유배가서 풍토병으로 죽게 된다. (이때 함께 유배를 갔던 은언군은 풀려난다) 막내인 은전군은 정조를 암살하려는 사람들이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고 하여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신하들은 맘에 들지 않으면 왕족까지도 모함하여 제거하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죽은 듯이 지내야 했다.

 

은언군의 첫째 아들로 상계군이 있었는데, 당시 실력자인 홍국영에 의해 정조의 양아들로 입적이 되었다. 이후에 상계군을 왕으로 세우려는 역모가 있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상계군은 1786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상계군의 자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였다. 상계군이 죽기 2달 전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가 임신 중 사망했는데 이때 은언군이 아들 상계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복중 태아와 의빈 성씨를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것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온 집안에 망할 것을 우려한 은언군이 상계군에게 독을 먹으라고 강요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상계군이 죽은 후에, 상계군의 외할아버지 송낙휴가 상계군의 죽음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병조판서를 역임한 군부의 실세 구선복 일가가 역모사건에 휘말려서 화를 입게 되었다. 이때 호시탐탐 정조의 김을 빼던 정조의 계모인 정순왕후는 상계군과 관련된 일을 엄중하게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고, 결국 정조는 은언군을 강화도에 유배보낸 것이다. 정조가 죽은 뒤에 40세 이상 생존한 혈육으로는 유일한 은언군은 왕실에서는 눈엣가시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은언군은 직접 천주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아내와 며느리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되었다. 조선 왕실을 뒤흔든 사건이기 때문에 이후에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와 헌종 이후에 대가 끊겼을 때 세도가문은 은언군의 손자인 강화도령을 왕으로 세웠고 그가 조선의 25대 임금인 철종이다.

 

2) 황사영 백서사건(18019)

 

정약용의 큰 형이었던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은 1794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피신했던 황사영은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흰 비단이 적은 밀서를 보내려고 하였다.

 

그 내용으로는, 1) 청나라 황제가 직접 조선 국왕에게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고, 2) 청국의 황제와 친한 중국인 천주교 신자를 파견하여 조선의 정치를 감시하고, 청국의 공주를 조선 왕비로 삼아 천주교를 확산시키며, 3) 서양 함대를 동원하여 조선 정부를 위협해서 강제로라도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백서는 천주교인들을 반국가단체로 몰아넣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이 백서는 1894, 의금부 창고에서 1894년 발견되었는데, 이것을 손에 넣은 뮈텔 주교가 보기에도 조선 정부가 화를 낼만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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