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회의 수난과 발전 (2) 조선대목구 창설과 기해박해ㆍ병오박해
[한국기독교의 역사]
1) 조선대목구 창설과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선교
신유박해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금 신앙공동체가 재건되기 시작했다.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1세대에게서 신앙을 물려받은 2세대가 그 주역이 되었다.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 홍낙민의 아들 홍우송,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주문모 신부 생전에 교인이 된 이여진 등이 그 주역이다.
신유박해 이후 10년이 지난 뒤에 1811년 권기인이 로마 교황에게 신부 파송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으며, 이여진은 직접 북경에 가서 북경에 있는 천주교구에 신부 파송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1805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서 상황이 별로 안좋았고, 교황청도 당시 나폴레옹과 대립 상황에서 그러한 요청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1816년 조선 천주교 공동체의 지도자가 된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은 북경으로 가서 북경 주교를 찾아 세례를 받고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후 거의 매년 정하상은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다. 당시 북경의 천주교 역시 핍박을 받는 상황이라 용이하지 않던 상황이라 직접 로마 교황청에 편지를 쓰라고 제안하였고, 1825년 정하상은 통역관 유진길과 함께 교황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이 편지는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전달되었다. 로마 교황청이나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조선에서 천주교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탄압 속에서도 조선 신자들이 스스로 신앙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교황청은 큰 감동을 받았다. 이에 로마 교황청은 조선을 독립 교구로 설정하고 주교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조선 교구를 프랑스 파리의 ‘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외방전교회는 브뤼기에르 신부를 초대 주교로 임명하여 파송을 결정하였다. 이때 중국인 신부 유방제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고 브뤼기에르 신부의 입국을 돕겠다고 하였고, 1834년 유진길, 조신철 등 조선교인의 안내를 받아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게 된다. 그런데 입국에 성공한 유방제 신부는 브뤼기에르 신부의 입국을 지연시켰는데, 아마도 이것은 조선 선교를 둘러싼 파리 외방전교회와 북경 천주교회 사이의 갈등이 그 이유였을 거라고 본다.
결국 브뤼기에르 신부는 만주에게 입국을 기다리다가 1835년 10월에 사망하였고, 보좌 신부였던 모방 신부가 대리 주교로 조선 교구를 관장하게 되었다. 일단 모방 신부는 유방제 신부의 행적을 확인하고 결국 유방제 신부는 중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1837년 조선 교구 2대 주교 앵배르 신부와 보좌 신부 샤스땅 신부가 입국하였는데, 이들 일행을 도운 사람이 정하상이었다.
모방 신부는 조선인 신부 양성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신부 후보생을 물색하였는데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의 16세 소년들을 발탁하였다. 당시 조선이 건국되면서 해외 유학이 사라졌는데 김대건 등의 마카오 유학은 조선 건국 이후 450년만에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건 등은 1837년부터 1842년까지 5년간 신학교육을 받았는데 그 동안 함께 공부하던 최방제가 1838년 세상을 떠났다. (이 기간 동안 조선에서는 기해박해로 정하상, 유진길, 앵배르, 모방 샤스탕 신부 등이 처형당했고 김대건의 아버지와 최양업의 부모도 처형당했다)
2)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
조선 정부에서는 신유박해 이후에 대규모 박해가 없었다. 정순왕후 김씨가 1805년에 사망하였고,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은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노론 시파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832년 안동김씨의 핵심인물인 김조순이 사망하였고, 1834년 순조가 세상을 떠난 이후 헌종이 즉위하게 된다. 이때 헌종의 외척인 풍양조씨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다시금 천주교가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1801년 한차례 박해를 받고 나름 세력을 회복하던 천주교는 1839년에 다시 박해를 받게 되었다(기해박해). 이때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나머지 네 집도 함께 처벌하는 오가작통법이 천주교 박해에 활용되었다. 김순성이라는 배교자의 밀고로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 교회 재건의 주역들과 함께 앵배르 주교가 체포되었다. 곧바로 모방과 샤스땅 신부도 앵배르 주교의 서한을 받고 자수하였다. 기해박해로 프랑스 신부 세명이 처형되었고 정하상, 유진길 등 100여명이 사형당했다.
기해박해(1839년) 때에는 유학중이었던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2년에 마카오를 떠나 상해, 북경, 산도반도, 요동반도를 거쳐 6년 만에 의주로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교황청에서는 처형된 제2대 주교 앵배르를 대신하여, 제3대 주교로 페레올 신부를 임명했고, 김대건은 페레올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서 상해로 건너갔다. 이때 상해에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로부터 신부에 서품되었다. 그리고 페레올 신부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 김대건 신부는 조선 천주교 공동체를 재건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안전한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1846년 6월 백령도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뒤에 9월 16일 순교하였는데, 당시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가 죽기 전 조선의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아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는 오래지 아니해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으로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서 만나 길이 누리기를 바란다. 잘 있거라.”
김대건 신부가 처형된 박해를 ‘병오박해’라고도 하고 1839년 기해박해의 연장으로 보기도 한다. 김대건 신부는 탄생 200주년 되는 2021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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