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1일 목요일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개혁을 향한 강한 의지를 배우자!

고종의 아버지로서 섭정을 하게 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0년의 섭정기간동안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혹자는 흥선대원군이 왕이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흥선대원군이 단행한 개혁 중에서 서원을 철폐한 것은 그 이전에 어떤 개혁군주도 하지 못하는 개혁이었다. 물론 1741년 영조가 양반과 유생의 힘을 누르고 당쟁을 극복하기 위해서 3000여 개의 서원을 600여 개로 줄였지만 근본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서원은 세금도 내지 않았고 일종의 치외법권과 같은 곳으로 조선 후기에는 그 횡포가 심해서 암적인 존재였다. (오늘날 교회는 먼 훗날 이런 평가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화양동서원이라는 곳의 횡포는 극히 심했다고 한다. 화양동서원 옆에 있는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는 등 존명사대의 상징적 존재가 되어 그 위세가 당당했다고 한다.

 

대원군은 1865년 만동묘의 철폐를 단행한 후에, 1868년 서원에도 납세의 의무를 지우고 1871679개소의 서원 중 47개소만 남겨놓고 모두 철폐시켰다. 성리학적 가치관에 찌들어 있는 유생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충격이 되었다. 결국 유생들은 상소를 올리기 위해 한양으로 모여든다.

 

유생들은 유학이 어떻고 교화가 어떻고 도학이 어떻다는 따위의 문장으로 엮은 상소문을 들고 떼를 지어 광화문으로 몰려와서 거적을 깔고 도끼를 옆에 놓고 엎드려 호곡하였다. 자기네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였다... 민란이 연달아 일어나도 예전 선비들처럼 의병에 나서지 않고 서원에 죽치고 앉아서 입씨름만 벌이던 자들이 이 일만큼은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임진왜란 때 분연히 일어났던 의병들의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던 충과 효는 개나 줘버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에만 열을 올리는 당시의 유생들은 오늘날 수많은 개혁의 요구에는 모르쇠 하다가 자기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당하니까 게거품을 물고 있는 검찰과 수구세력의 모습을 보는 듯 해서 씁쓸하다.

 

대원군의 의지는 확고했다. 대원군은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공자가 다시 살아서 와도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 하물며 서원에서 지난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도둑의 무리로 변하여 공자에게 거듭 죄를 지었으니 어찌 내버려 둘 수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오늘날 대원군처럼 강력한 의지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쇄국정책 등의 부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지만, 조선왕조 500년의 세월동안 단단하게 뭉쳐있던 보수세력의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개혁을 단행한 대원군은 어떠한 어려움과 저항이 있더라도 의지가 확고하다면 개혁을 단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