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2일 금요일

신미양요, 상처뿐인 영광, ‘정신승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병인양요(1866) 이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의 의지를 강하게 보인 흥선대원군... 이전에 상당한 개혁을 통해서 정치적 감각은 검증했지만, 국제정세를 읽는 감각은 너무나 한심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교적 사고방식에 찌들어 있는 대신들에게 둘러싸여서 서양에 대해 우호적일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예로 러시아의 압박을 프랑스를 통해 견제하려고 시도하려고 했었으나 조정 대신들의 완고함 때문에 시행하지도 못했던 사례도 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


병인양요 당시에 양헌수의 저항으로 프랑스군이 적지않은 피해를 보고 되돌아갔고, 1868년에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발생한다. 프랑스 신부 페롱과 독일 무역상인 오페르트, 그리고 미국인 자금 담당 젠킨스가 의기투합(?)하여 대원군과 통상 문제, 그리고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흥정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오페르트 일당은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시체와 부장품을 인질로 대원군과 협상하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오페르트는 이후 1880년에 금단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을 출간해서 조선을 세상에 알리는 데 공헌하지만, ‘도굴꾼으로 역사책에 길이 남게되었다.

 

1871년, 신미양요 일어나다


여하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의 서양에 대한 분노 게이지는 차곡차곡 쌓여만 갔고, 이러한 와중에 뜬금없이 1871년에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트집잡아서 개항을 요구하는 사건이 터진다. 5년 전에 대동강에서 못된 짓을 하다가 백성들의 응징으로 불에 탄 사건이며, 자기네들도 제너럴셔먼호가 해적질을 하다가 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시비를 건 것이다.

 

18715월 미국은 주청공사 로우(Frederich F. Low, 1828-1894)와 해군 제독 로저스(John Rogers II, 1812-1882)가 이끄는 아시아함대를 조선으로 파견했다. 콜로라도호 등 호위함 세 척에 1230명의 병력으로 526일 작약도에 도착하여 주민들과 조선 정부의 문정관들을 접촉하였는데 그 규모는 힘으로 조선을 압도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을 것이다.

 

61일에 강화해협에 접근하여 탐사하다가 조선포대로부터 선제공격(아마도 위협)을 받고, 이것에 대한 보복조치로 미군은 610-12일에 강화도 상륙작전을 벌였다.

 

610(음력 423) 로저스가 내린 공격명령에 따라 450명의 미해군이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한 뒤 덕진진까지 밀고 들어왔다. 미군은 611, 결사항전의 깃발을 올리고 있던 광성보 공략에 나서 2시간 동안 포탄을 퍼부었다. 이때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1823-1871)이 전사하였고, 광성보가 함락되었으며 미국의 성조기가 내걸렸다. 이 전투에 참가한 미군은 이것은 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처음으로 벌인 치열한 전투 끝에 점령한 아시아의 보루에서 미국 국기를 최초로 게양한 의미있는 전투였다고 회고하였다


칼과 창으로 포와 총에 맞서다

 

과연 이것이 전투였을까? 공식적인 집계로 조선군의 전사자는 350명이었고, 미군의 전사자는 3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전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참혹한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유병선은 미국과 조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력충돌한 신미양요는 포와 총 대 칼과 창의 대결이었다고 언급하였다.

 

전투에 참전한 슐레이 대령은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던졌다고 회고했는데, 미국 측 기록에 따르면 미군이 광성보를 점령하자 조선군 병사들은 강화해협에 투신해 죽음을 자청했고 부상을 당해 투신할 수 없는 병사들은 타고 있는 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타 죽었으며 더러는 미군에게 손짓으로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미군 측이 부상 포로 서른 한 명을 데려가라고 통고했을 때 부평부사 이기조는 우리나라 사람이 이미 포로가 된 이상 죽이거나 살리거나 그 권한은 당신네들 손에 달렸느니 다시 묻지 않겠다며 인수를 거절했다.

 

조선군 병사들이 강화해협에 투신에 죽음을 자청하게 된 것이 항복을 모르는 용감한 행동이었을까? 당시 조선군은 총탄을 막기 위해서 대부분 솜 아홉 겹을 놓은 두꺼운 무명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는 한 여름이어서 두꺼운 솜을 입고 있었던 조선군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투 중 자연스럽게 조선군이 입고 있던 솜에 불이 붙게 되었고, 조선군은 불붙은 옷 때문에 엉겁결에 강물에 뛰어내렸을 것이다.

 

당시 서양 사람들을 도깨비로 인식하고 있던 조선 사람들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잡혀간다는 것은 더욱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저항했을지도 모른다. 이 전투 속에서 형편없는 무기로 돌과 흙까지 던지면서 저항하는 조선군을 본 미군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적군은 참패의 와중에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 항전 중이다. 패배가 당연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다. 아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임에도 불구하고 적군은 장군의 수자기(帥字旗) 아래, 일어서고 또 일어선다. 칼과 창이 부러진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려 저항한다. 이토록 처참하고, 무섭도록 구슬픈 전투는 처음이다.”

 

어쩌면 미군은 처절하게 저항하는 조선군에게서 오늘날 좀비의 모습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유혈이 낭자한 상황에서 돌과 흙을 던지면서 저항하는 조선군에게 질려버렸을지도 모른다.


상처뿐인 영광, 정신승리!

 

이후 미국은 조선의 조정이 통상에 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외외로 조선은 병인양요의 경험을 되살려 지구전으로 버티기로 결정하였다. 작약도에서 3주일 간 기다리던 미국은 결국 73일에 철수하고 만다.

 

조선은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이긴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었고, 일종의 정신승리였다.


그런데 제대로 상황을 파악한 조선의 조정대신들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후 말로만 위정척사를 외칠 것이 아니라 그것에 상응한 군사력을 키울 생각을 했어야 한다고 본다. 입만 살아서 외치던 조선은 이후 일본의 식민지로 치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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