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2일 화요일

[005] 고대 이집트 역사 - 제2중간기(힉소스 시대) [약 1759~1540년]

[005] 고대 이집트 역사 - 2중간기(힉소스 시대) [1759~1540]
 
공식 목록으로는 약 150년 동안 50명 이상의 군주가 다스리던 제13왕조는 힉소스 시기라고도 불리는 제2중간기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권력을 가진 왕들의 빠른 교체와 내부 혼란으로 전제군주국가는 점점 약해졌으며, 중앙 통치는 그 힘을 상실했다. “통치자()의 성벽은 그 임무를 더는 감당하지 못했기에, 같은 시기에 델타 지역을 넘어 수많은 아시아인이 이집트로 침입해 들어왔다. 남쪽에서도 이집트 국경은 북쪽으로 제1폭포(엘레판틴)까지 줄어들었다. 거의 세습적인 관직을 강력하게 행사했던 재상들이 결과적으로 제국의 버팀목이 되었다. 네페르호텝 1세와 세베크호텝 3세의 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덕분에 제13왕조의 왕들은 수도 엘 리쉬트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들의 힘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제13왕조 말경 독립적인 군주가 세워지고 또 본토로 유입되는 아시아인이 점점 더 영향력을 발휘했던 델타 지역에서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왕국의 힘은 제한을 받았는데, 이 왕조는 기원전 1700년 이후 테베가 그 중심인 남쪽으로 밀려났다.
 
힉소스라는 이름과 결부된 역사는 원래는 여섯 명의 왕이 통치했던 제15왕조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1640년경 이들은 델타 지역과 멤피스에서 권력을 찬탈하여 그곳에서 108년 동안 지배했다(이 숫자는 두 파피루스 조각을 조합해 읽어서 나오는데, 물론 이 조합이 보증된 것은 아니다).

  
학문적 관심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이유로 힉소스에 쏠려 있다. 그것은 비밀에 둘러싸인 그들의 유래 때문이며, 팔레스티나와 관계 때문이고, 또 여러 학자가 요셉의 신분 상승과 야곱의 아들들의 이집트 이주를 힉소스 시대로 보는 상황 때문이다.
 
힉소스라는 이름은 이집트어 헤카우-케수트’(이방 땅의 지배자)를 모방한 것인데, 이것은 이미 제12왕조 때 아시아와 누비아의 군주들과 족장에 대해 사용되었지만 당대에는 동쪽에서 이집트로 와서 멤피스에서 통치권을 강탈한 통치자에게도 사용된 명칭이다. 아마도 힉소스라는 이름은 또한 코이스의 의문의 제14왕조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동일한 이름의 도시(오늘날의 사카)를 가리키는 어떠한 흔적도 없다. 오히려 힉소스는 비()이집트 통치자, 아마도 대부분 독립적인 아시아 군주나 위대한힉소스의 봉신들과 관련 있음을 함축하는 이집트어 케수트에서 유래된 명칭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위대한 힉소스 왕 가운데 몇몇은 그들의 기념물과 딱정벌레석을 통해 알 수 있다. 다른 왕들의 이름은 마네토에 의해 전승되었다. 힉소스 왕 가운데 가장 유명한 왕은 살리티스(샬렉?), 카옌(하옌), 아포피스(아파파), 카무디이다.
 
힉소스가 누구이고 그들이 어떻게 권력을 잡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논쟁 가운데 있다. 학게에서는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한다.
 
1) 헬크가 대표하는 견해로는, 힉소스는 민족이 아니라 지배계층이다. 왜냐하면 지배계층은 뛰어난 신무기(전차와 거기에 결합된 활)로 무장했고 새로운 군사전략을 사용했기에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부족과 도시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힉소스인은 이어서 델타 지역을 점령하고 기원전 1640년경 아바리스에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구성에서는 중왕조 말기 이래 델타 지역에서 활동했던 셈 계통의 이름을 지닌 통치자들과 힉소스와의 연관은 거부된다. 후에 헬크는 힉소스를 키프로스 지역과 남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온 해적으로 볼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변형에서도 힉소스의 셈족 배경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한 힉소스는 제12왕조 말기 이래 델타 지역 동쪽에 정착했던 대량의 아시아인들과도 구별된다.
 
2) 반 세터트(J. van Seters)에 의해 널리 알려진 견해로는 힉소스는 고도로 도시화된 페니키아-팔레스티나 문화에 속하는 아모리족 침입자 집단이다. 델타 지역에 사는 셈계 주민 일부의 지원으로 힉소스는 결국 여기에서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더 많은 사람이 지지할 뿐만 아니라 고대 힉소스의 수도였던 아바리스의 텔 엣 다바에서 비탁의 발굴로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를 확보했다.
 
힉소스가 어떻게 권력을 잡게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마네토의 보도와 결합될 수 있는 헬크의 주장은, 델타 지역의 아시아적 요소와 불만족한 일단의 이집트인의 지원으로 일어났다는 반 세터스의 아모리족의 쿠데타와는 상치된다. 델타 지역에서 중앙권력의 붕괴와 아시아인의 침입으로 야기된 내부 상황은 의심의 여지 없이 힉소스에게 길을 터주고 권력을 쉽게 차지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권력 교체는 그러나 무역행사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 무력 행사에 동쪽 세력들이 개입했을 것이다. 어쨌든 델타 지역 동쪽의 몇몇 도시의 파괴된 층이 이를 암시한다.
 
15왕조의 힉소스 왕가의 수도였던 아바리스는 그동안 칸티르에 있는 텔 엣 다바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비탁이 텔 엣 다바에서 실시한 발굴을 통해 기원전 1800~1500년까지 시기에 이곳에 주민이 지속적으로 살았음이 증명되었다. 비탁은 이 문화를 이집트화되는 중기청동기 II BC”로 분류했다. 이 중기청동기 II기의 문화는 당시의 도시화된 레반트와 매우 가깝다. 비탁은 심지어 기원전 1700년 직전에 아바리스에서 신축된 성소를 가나안 식의 신전이라고 칭했으며, 수많은 가나안식의 저장 항아리에 주목하고 당나귀 매장이 드물지 않다는 것을 비()이집트식 관습의 증거로 제시했다. 비탁에 따르면 현장의 유물은 주민들의 아시아적배경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또한 레반트, 특히 페니키아와 활발한 무역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는 주민들 가운데 페니키아상인이 있었으며, 이 도시는 아마도 페니키아의 시장이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로써 또한 남부 팔레스티나의 문화보다는 오히려 시리아-페니키아 문화와의 연결이 왜 더 또렷한지가 설명된다.
 
13왕조가 델타 지역에 대한 자신의 명목상의 힘을 상실하자 아바리스도 독립했을 것이며 이때 아바리스에 여러 왕과 왕가가 자리잡았을 것이다. 추측건대 이 도시는 이 왕가 중 제14왕조에 속하는 한 왕가의 왕도(王都)였을 것이다. 이곳을 발굴한 비탁은 가나안적 요소가 강력하게 새로이 유입되고 더불어 이미 언급한 가나안식의 신전도 있는 텔에서 전혀 새로운 건축 시기가 나타난 것을 기원전 1700년경으로 본다. 이러한 건축 현상은 기원전 약 1640년부터 시작하여 제15왕조를 이루고 여섯 명의 왕이 있었던 순수힉소스의 도래와 발전에 대한 증거로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왕조는 델타 전역에 자신의 세력을 확립하고 남쪽으로는 멤피스를 넘어 테베의 게벨라인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이집트에서 힉소스의 지배권이 실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알아내기 어렵다. 어쨌든 테바이는 자기 고유의 왕조 아래 적어도 명목상의 독립을 유지했던 것 같다. 마네토는 이 왕조가 제17왕조로 약 100년간 지속된 것으로 추정했다.
 
비록 세부적으로는 여러 물음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해도, 순수 힉소스를 단순히 이집트로 침입한 아시아 유목민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분명해졌다.
 
튜린 왕 파피루스는 제15왕조 혹은 힉소스 왕조의 여섯 제후에 대해 일반적인 왕의 카르투슈를 피하고 이들을 이방인으로 표기했다. 종종 완전한 왕 칭호로 일컬어지는 하부 및 중부 이집트에서 통치했던 군주들은 역사기술에서 제16왕조의 소 힉소스로 표기된다. 이들 중 일부는 셈게 출신이었으며, 아마도 그들은 힉소스의 지방제후나 봉신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코이스의 제14왕조의 군주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또한 테베 토착 왕조인 제17왕조는 명목상 힉소스의 지배권을 인정했을 것이다.
 
힉소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던 후대의 이집트 전통(특히 하트셉수트)이 이 힉소스 왕들을 야만인과 신전 훼손자로 묘사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태양신 레의 이름과 결합된 그들의 왕위 이름이 증명해주듯이 힉소스 왕들은 이집트 관습에 매우 잘 적응했다. 새로운 기술 또한 힉소스와 관계있다. 가령 이들이 전차와 이 전차를 끄는 짐승인 말을 이집트에 도입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능하지만 증명할 수 없다. 요업(窯業)에 중요한, 빠르게 회전하는 원판, 즉 녹로와 거기에 결합된 활 역시 종종 힉소스의 것으로 간주된다.
 
이집트는 힉소스 영주들 틈에서 자신들에게는 새로운 종족인 이 아시아인과 접촉했다. 아시아인은 촌장도 족장도 지방군주도 아니었지만, 레반트에서 중기청동기 말기의 고도로 발달한 도시문화를 대표하는 군사적 잠재력을 대표하는 이들이었다. 힉소스와의 접촉으로 이집트인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서의 문화적 영향에 더 민감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이집트에서는 동쪽의 경계를 방어하고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를 통제하려면 군대를 통한 공격적인 아시아 정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라났다. 이는 후에 신왕국의 군사 정책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테베 토착인 제17왕조의 여러 왕은 기원전 1550년경 힉소스 왕 아포피스를 압박하고자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장했다. 세케렌레 2세의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세케렌레 2세의 미라

미라 조사에서 밝혀졌듯이 세케렌레 2는 아마도 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그의 후계자 카모세는 힉소스와의 전쟁에서 훨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아문 신전의 두 석주비문에는 그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한 보도, 해방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에 따르면 카모세는 힉소스의 지배권에 대항했으며 델타 지역의 남쪽에 있는 요새들, 예를 들면 헤르모폴리스를 점령했지만 아바리스는 점령하지 못했다. 그의 형제 아흐모세가 처음으로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10년 동안이나 지속된 긴 전쟁 후에(기원전 1530년경) 힉소스의 마지막 왕 카무디의 지배권에 종지부를 찍으며 마지막 힉소스를 몰아냈다. 이 때문에 힉소스는 팔레스티나로 달아났다. 팔레스티나의 요새 도시인 샤루헨은 3년에 걸친 공성 이후에야 점령할 수 있었다. 힉소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의 지배권을 명목상 인정했던 누비아까지 굴복하자, 나중에 아흐모세로 시작하는 신왕국시대에서 그러했듯 이집트의 힘을 새로이 확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힉소스인을 공격하는 아흐모세


클라아스 R. 빈호프 지음, 배희숙 옮김, [고대 오리엔트 역사], 97~10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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