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2일 화요일

[004] 고대 이집트 역사 - 중왕국 시대 [약 2120/2080~1795/60년]

[004] 고대 이집트 역사 - 중왕국 시대 [2120/2080~1795/60]
 
기원전 2000년경 이집트는 제11왕조의 파라오인 멘투호텝 2세가 통일했다. 이 사건과 제11, 12왕조의 왕들의 재위연대를 정확히 정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 튜린 왕 파피루스에 있는 일부 숫자는 손상되었고 일부는 아마도 잘못 필사되었을 것이다. 12왕조의 왕명록이 산정하는 총 213년이라는 전체 기간은 너무 길다. 각각의 통치자에게 할당된 재위기간, 특히 세소스트리스 2세와 3세에게 산정된 기간은 수정해야 한다. 일반적인 견해로로는 아메넴헷 1세와 세소스트리스 1세의 10년간의 공동통치를 받아들이느냐 여부에 따라 기간을 조정해서 제12왕조는 170년 또는 180년간 지속하게 되며 여덟 명의 왕을 포함한다. 끊임없이 양자택일적인 연대를 잡지 않기 위해 필자는 수정된 소티스 관측 연대에서 세소스트리스 3세의 재위기간이 7년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이는 기원전 1830년경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제12왕조의 개국은 기원전 1938년이 되고 그 종말은 기원전 1759년이 된다. 그리고 두 나라를 통일한 자인 멘투호텝 2세의 치세 연대는 기원전 2000년경의 시기로 잡을 수 있다. 이로써 필자는 크라우스(R. Krauss)와 프랑케가 제안한 연대기를 따른다. 바르타(W. Barta)와 베커라트(J. von Beckerath)가 추정한 연대는 40년 정도 더 앞선다.
 
멘투호텝 2세는 도합 약 70년간 통치한 세 명의 전임 파라오인 안테프 1~3세가 놓은 토대 위에 통치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멘투호텝 2세는 재위 제14년과 제39년 사이에 상하 이집트를 통일함으로써 중왕국이라고 불리는 길고도 행복한 시기를 이집트 역사에 가져다 주었다.

멘투호텝 2세

12왕조의 첫 왕인 아메넴헷 1(기원전 약 1938~1909)는 정치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멘투헤텝 4세의 왕위를 넘겨받았다. 그 후 곧바로 제12왕조의 고유한 특징들이 나타났다. 전략 도시인 멤피스 남쪽에 제12왕조의 몇몇 왕의 피라미드가 있는 오늘날의 엘 리쉬트 가까이에 새로운 수도가 생겼다. 지방과 영주 체계 또한 새로이 정비되었다. 이 땅의 북쪽에서 그들의 직무는 세습되었고 그 힘은 점차 커졌지만, 결국 그들의 권한은 이 왕조의 가장 특출한 군주인 세소스트리스 3(기원전 약 1872/36~1854/18)에 이르러 축소되었다. 이때부터 구역 또는 지방들은 왕궁행정에 있는 세 개의 부()에서 중앙집권적으로 통치되었다. 왕위계승자의 공동통치 관례는 이미 아메넴헷 1세 때부터 도입되었다. 이를 통해 왕위계승이 더 이상의 문제 없이 이루어졌고, 다음 파라오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경험을 쌓을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가 사회를 지속하고 견고하게 통제하는 것이 보장되었다.
 
1중간기의 위기 동안 이 군주국은 새로운 특징을 내보였다. 그 당시에 왕에 대한 거의 초인적이고 이상화된 상()은 군주는 행정에 책임을 지며 신하들의 안녕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식으로 덮여있었다. 이 두 가지를 위해 군주에게는 강인함과 추진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생각들은 왕의 상()에는 물론 문학에도 반영되었는데, 문학에는 이제 변론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바로 교훈적 의도로 지어진 <아메넴헷 왕의 가르침>(세소스트리스 1세 시대, 기원전 약 1919~1875)에는 살해된 아메넴헷 1세의 시각에서 왕의 의무가 기술되어 있다. 그의 죽음으로 <시누헤의 이야기>도 시작된다. 왕이 살해된 후의 불안정한 상황에 겁을 먹은 시누헤는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황급히 팔레스티나로 도망했다. 그러나 세소스트리스 1세가 국내의 위기 상황을 극복한 후에 시누헤는 결국 세소스트리스 1세에게 다시 은혜를 입는다. 시누헤는 이집트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그의 신분에 어울리는 장례가 치러졌다. 세소스트리스의 지혜와 용서하는 능력을 찬양하는 노래가 <시누헤의 이야기> 마지막 부분을 장식한다. 이 노래를 통해 이 문학 장르의 선전적인 측면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측면은 <네페르티의 예언들><충성스러운 가르침>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군구죽의 가치 규정이 변한 것은 제의가 더 높은 의미를 갖게 된 것과 결부되어 있는데, 이는 예를 들면 왕들이 장대한 신전 건축계획에 표현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신전에 점점 더 많이 세워진 왕과 고관들의 상()에도 나타나 있다. 숭배의 중심에는 거의 국가신인 위대한 삼위일체적 3대 주신이 자리하고 있다. 테베에 그 신전에 있는 아문, 멤피스 신전부터 그 의미가 중대한 프타, 그리고 헬리오폴리스에 신전이 있으며 세소스트리스 1세가 특별한 관심을 쏟은 레가 그들이다. 3대 신들 외에 오시리스는 피안신앙에 대한 상징으로서 아비도스에 있는 신전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해마다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의 비밀이 이루어지는 이곳에 이르는 길을 따라 수많은 이집트인이 세운 기념석은 이를 확인해 준다.
  

[아문]
[프타][레(라)][오시리스]

  
농업, 수공업 및 해외 무역은 가장 중요한 지주(支柱)였는데 이들에게서 안녕과 번영이 비롯되었다. 파윰 일부가 개척되었다는 것은 농업에서 아주 큰 진보를 의미했다. 리비아 사막 저지대의 나일 강 서쪽에 있는 거대한 오아시스가 개간됨으로써 악어의 신 소벡 숭배가 늘어났다. 일반적인 무덤 건설과 왕의 웅대한 건축 계획에는 특히 많은 노동력과 조직력이 확보되고 투자가 이루어져야 했다. 영주들의 비문과 채석장에 있는 원정대 사령관의 비문에서와 똑같이 라이스너 파피루스에는 이에 대한 보도가 있다. 이를 통해 테베 동쪽에 있는 와디 함마맛으로의 원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세소스트리스 1세 시대의 한 문헌은 17000명의 원정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 원정대는 60개의 스핑크스, 150점의 상들을 조달해야 했다. 스핑크스를 선호하는 데서 고왕국의 전통을 이으려는 소망을 엿볼 수 있다.
 
무역과 외국으로의 원정은 경제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누비아는 중요했다. 왜냐하면 거기서 금, 구리, 상아, 보석 및 석재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비아를 합병하려는 시도는 매우 중요했다. 세소스트리스 3세 때 세워진 나일 강 제2폭포에 있는 국경 석주 비문은 하부 누비아가 실제로 이집트와 접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가장 유명한 요새로는 부헨, 미르기사, 셈나/쿰마가 있다. 이집트의 영향은 남쪽으로는 거의 제3폭포가 있는 케르마까지 뻗쳤으며, 이곳에서 쿠시(구약성서에는 구스로 표기)라고 불리는 민족과 접촉했다. 11왕조 때 오늘날의 소말리아 지역을 의미하는 푼트로의 무역원정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1중간기 동안 일어난 사건들과 특히 델타 지역에 있는 많은 아시아인의 존재 때문에 이집트는 동쪽과의 접촉에 더 개방적이었다.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 팔레스티나, 남부 시리아로 시야를 돌렸으며 이미 고왕국 시대에 맺어졌던 무역관계들이 다시금 활기를 띠었다.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은 매혹적인 <시누헤의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이집트에서 도망 나온 시누헤는 유목민 가운데 살았으며 촌장의 지위까지 올랐고 수많은 모험을 겪었다. 이야기에 배어있는 향토색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자전적인 현장체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집트인이 레테누(팔레스티나)와 그 주변들에 대해 가졌던 생각에 대한 문학적 허구이다. 그러나 제1중간기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이집트인은 동쪽에 잠재적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방지책으로 아메넴헷 1세는 시누헤 역시 언급하고 있는 통치자()의 성벽을 세웠다. 이 성벽은 시누헤에 따르면 아시아인을 막고 사막주민을 섬멸할 국경 요새였다. 잠재적 적들은 여기서 세튜’(아시아인들) 사막주민’(베두인)으로 명명되고 있다. 이 두 개념은 종종 사용되는 아무와 함게 동쪽 광야, 즉 시나이 반도와 팔레스티나 주민을 나타내는데, 그 세부적인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동쪽에 대한 관심은 특히 경제적이고 상업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비록 가끔 전쟁 기도(企圖)가 언급되기는 하지만(세소스트리스 3세는 세켐까지 이르는 중부 팔레스티나로의 원정을 감행했다) 군사 정복이나 이집트의 지배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세라비트 엘 카딤에 있는 비문과 부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터키옥과 구리 광산 때문에 시나이 반도에서만 이집트의 지배가 지속적인 성격을 띠었을 뿐이다.
 
아메넴헷 3(기원전 약 1817~1773), 아메넴헷 4(기원전 1772~1763)와 최초의(?) () 파라오(소벡네프루, 기원전 약 1763~1760)가 죽자 제12왕조는 끝이 났다. 이 왕조는 뛰어난 통치자와 경제적 번영 아래 예술, 문학, 과학(예를 들면 수학, 의학)이 그 꽃을 피웠던 시기였다.
 
클라아스 R. 빈호프 지음, 배희숙 옮김, [고대 오리엔트 역사], 91~9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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