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2일 화요일

[002] 고대 이집트 역사 - 고왕국 시대 [약 2680~2200/2130년]

[고대 이집트 역사 002] 고왕국 시대
 
70년간 지속된 제3왕조로 고왕국이 시작된다(2680~2200/2130년경). 고왕국은 가장 유명한 건축물 때문에 피라미드 시대라고도 불린다.
 
3왕조에서 제6왕조까지 이르는 이 시기는 바로 이집트의 문화가 정치종교예술 영역에서 고전 형태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이다. 신적인 왕이 왕국의 계급구조를 지배했으며 질서와 정의와 진리라는 원리에 따라 군주로서, 대사제로서, 태양신 레의 아들로서, 그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죽음으로써 오시리스의 운명을 반복하고 그래서 저 세상의 통치자이기도 한 왕으로서 그 땅을 다스렸다. 이 왕들의 이념은 깎은 돌로 건설한 불후의 피라미드에 기념비적으로 표현되었다. 언덕이나 봉분의 형태 또는 태양으로 가는 다리 형태였던 피라미드는 본래의 종교적 상징은 도외시한 채 왕의 마지막 안식처로 그리고 그의 권력을 나타내는 가시적인 표지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피라미드는 하늘 방향으로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 레를 가리킨다. 태양신 레는 이 시대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제5왕조부터는 오벨리크스가 중심에 서 있는 태양신 사원에서 파라오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기념되었다.
 
가장 오래된, 다소 온전하게 보존된 피라미드 시설이자 동시에 첫 번째 기념비적인 돌무덤은 계단식 피라미드이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제3왕조의 2대 왕인 조세르가 사카라에 건설하게 했다. 이 피라미드는 높이 60m이며 전체 규모는 장제전을 포함하여 약 280mX540m이다. 이 건축물은 나중에 재상과 의술인으로 숭배되고 신격화된 건축가 임호텝이 건축한 것이다.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3왕조와 4왕조의 것으로는 메둠, 다흐슈르,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들이 잘 알려져 있다. 5왕조 파리미드들은 사카라(우세르카프)에 아부시르(사후레, 니우세레)에 건축되었다가 다시 또 사카라(우나스)에 건축되었다. 이곳에는 제6왕조의 피라미드(테티와 피옵스/페피 1세와 2)도 있다.
 
4왕조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에 평평한 벽을 마련하고 피라미드를 140m 이상으로 높임으로써 높이에 있어서만큼은 전임자들을 능가했다. 피라미드 외에, 망자(亡者)이자 신()인 왕을 숭배하려고 제사를 지낸 이중의 장제전은 제4왕조 시대의 표준 시설에 속한다. 또한 신전은 당연히 엄격한 장례의식에도 사용되었다. 울타리를 친 구역은 행렬가도를 통해 더 작은 계곡의 사원과 행렬 선박을 위한 선창과 연결되었다. 케옵스(쿠푸)의 피라미드 옆에서 복합건물의 이 부분까지도 발견되었다. 권력관계를 충실히 반영하듯 고위 관리들의 직사각형 모양의 수평으로 덮인 무덤들(마스타바)이 시설물을 둘러 있다. 케프렌(쿠푸의 아들)의 피라미드 옆에는 적대적인 세력을 막아주는 파수꾼으로서 인간의 머리를 한 사자인 스핑크스가 서 있다.



  
죽은 자를 위한 이러한 건축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왕의 지위를 강조하고, 당시의 건축가와 장인들의 뛰어난 예술적, 기술적 능력을 입증해준다. 5왕조 말(기원전 24세기 후반기)의 것인 파라오 우나스의 피라미드에는 처음으로 벽면의 부조로서 피라미드 텍스트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격언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죽은 왕의 안녕을 보증하고, 신들 가운데서 그에게 부여된 지위를 차지하도록 돕는 종교적 문서이며 주술이다. 이 장르는 부분적으로 그리고 변화한 형태로 후대에, 이제는 신이 아닌 죽은 자에게도 헌사된 관의 텍스트로서 제1중간기 시대에 그 명맥을 이었으며, 훨씬 더 후대인 신왕국 이후에는 사자(死者)의 서() 본문에 살아남았다.

우나스 피라미드에 있는 피라미드 텍스트
  
대건축 사업은 중앙집권적 행정과 공식 이데올로기 및 경제적 번영을 전제한다. 행정에서 왕이 중심 역할을 했고 왕 옆에는 고위관리가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왕가의 사람들로 편성되었지만 나중에 관료주의가 발전했을 때는 다른 집단에서도 선발되었다. 3왕조부터는 재상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으며, 게다가 이집트의 수많은 지방총독이나 영주도 확인된다.
 
상이집트에는 엘레판틴에서 멤피스에 이르기까지 이상적일 때는 지방이 22개 있었으며, 하이집트에는 처음에는 그 수를 알 수 없지만 나중에는 지방이 20개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영주의 힘은, 그들의 왕조 형성과 그들의 독자적인 무덤 선택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점점 증가했다. 이는 왕의 절대적 권력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다. 왕은 점점 더 지방영주의 영향을 고려해야 했고, 이를 통해 왕은 인간의 지위에 머물게 되었다. 신하와의 관계는 이를 통해 오히려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특징을 띠었다.

상이집트의 지방


하이집트의 지방


이집트의 복지는 나일 강 계곡의 풍요에 기초해 있었고,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나일 강의 매년 최고 강수량으로서 이는 첫 왕조 시대의 팔레르모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농부들의 삶을 담은 마스터바의 부조들이 생생하게 보여주듯이, 주로 땅의 자연적인 침수로 가동된 농경경제와 짐승사육이 이집트 경제의 근간이었다. 중앙 관료 제도로 조직된 경제에서 막대한 규모의 건축사업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를 위해 채석장에서는 물론 건축 현장에서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력의 투입이 요구되었다. 아마도 백성은 주요 농번기 사이마다 대건축 사업계획을 이행하는 데 동원되었으며 이때 전쟁 포로들도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건축이 끝난 후에도 기념 건축물들은 계속하여 그 땅에서 경제적인 압력을 가했다. 왜냐하면, 많은 인력과 소비적인 제의조직들을 갖춘 대사원의 시설과 피라미드들은 중앙에서 징수하는 분할경제의 틀에서 가동되었으므로 원칙상 국가경제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땅을 하사받거나, 수입을 할당받거나 세금을 면제받는 형태로 희사받았다. 이 모든 것은 평화롭고 경제적으로 번영한 시대에 잘 조직된 행정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고왕국의 전성기가 바로 이러한 여건 아래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왕의 이름이 적힌 비문들과 기물들, 그리고 다른 발굴물들이 외국과의 접촉을 입증하고 있다. 배들이 비블로스에서 목재를 운송했고, 시나이 산(세라빗 엘 카딤)의 광산에서 터키옥과 구리가 채광되었으며, 누비아에서는 금과 암석 광물을 얻었다. 6왕조 시대에 나일 강 제1폭포에서 뱃길을 깊이 파냄으로써 배가 다닐 수 있게 한 이후로는 접촉이 훨씬 더 쉬워졌다. 사후레 왕(기원전 2490/40년경)은 유향의 나라인 푼트(소말리아 해안?)에 도착한 첫 번째 왕이었다고 한다. 그는 무역선을 시리아로 보냈다. 그의 카르투슈가 있는 물건들이 심지어는 트로이(소아시아의 고대도시)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물건들은 아마도 초기 미노아 II 시대에 있었던 크레타와의 무역을 통해 그곳에 오게 되었을 것이다. 파라오 케프렌과 페피 1세의 비명이 있는 토기들이 에블라의 왕궁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그들의 무역로가 비블로스를 경유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클라아스 R. 빈호프 지음, 배희숙 옮김, [고대 오리엔트 역사], 43~4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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