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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4일 수요일

'눈과 울타리'에서 '서울'이라는 낱말이 생기다

서울은 현재는 한자로 표기하지 못하고 한글과 영문으로만 표기하고 있다.

정도전와 무학대사의 팽팽한 기싸움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 정도전과 무학대사(자초)는 종교적 사고와 유교적 바탕을 앞세워 서로 강한 주장을 내세웠다. 그들은 성의 영역에서도 서로 다른 주장을 했다. 청와대 뒷산 인왕산 북쪽에는 선바위가 있는데 이 선바위를 성 안쪽으로 하자는 무학대사의 주장과 성 밖으로 하자는 정도전의 주장은 태조 이성계가 민망스러울 정도로 팽배하였다. 도성을 모두 다 쌓고 그 부근만 미완성으로 남은 상태에서 태조가 결정을 내려야만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학대사

정도전
 

성 밖에만 문이 쌓이다

 
두 사람의 의견 대립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있던 중 하루는 첫눈이 한양 땅을 모두 덮었고, 이날 아침을 맞은 태조가 동쪽 낙산 쪽을 바라보니 이상하게도 성 안쪽에는 눈이 보이지 않고 바깥쪽에만 눈이 쌓여 있자 별감들을 보내 현장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다녀온 별감들은 성곽 밖으로만 눈이 쌓였고 안쪽에는 눈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태조는 다시 궁궐 뒤편의 인왕산 선바위를 보고 오라고 명하였다. 바삐 다녀온 별감들은 역시 바위를 중심으로 안쪽은 눈이 없고 바위를 포함한 쪽은 눈이 쌓였다고 말하였다.
 

눈의 경계, 즉 설울(雪鬱, 눈과 울타리)이란 말이 생기다

 
그 순간 태조는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해결되었구나 하면서 정도전과 무학대사를 함께 입궐케 하여 이 사실을 말하였다. 이 내용을 듣고 있던 두 사람은 전하의 뜻에 따른다고 복명하였고 그날 성곽을 경계 삼아 안쪽과 바깥이 마치 울타리를 연상케 하여 눈의 경계, 즉 설울(雪鬱, 눈과 울타리)이란 낱말이 생겼다. 그때부터 설울이란 이름을 쓰려 했으나 당시 이 땅은 이미 한성부라는 지명이 정해진 이후라 어찌할 수 없다가 1945년 해방 후로 서울이란 세련된 지명을 갖게 되었다 한다.
 
이은식, 지명이 품은 한국사, 타오름, 2010, 16-17

2023년 10월 18일 수요일

한국 영화 최초의 키스신, 『운명의 손』

한국 영화 최초의 키스신
 
1954년엔 18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최대의 화제작은 한형모가 감독한 운명의 손이었다. 이 영화는 간첩인 카바레 댄서가 신분을 위장한 특무부대 대위와 사랑을 계기로 전향한다는 내용의 1시간 30분짜리 반공물이었지만, 화제가 된 건 이 영화에 한국 최초로 키스신이 소개되었다는 점이었다.
 

키스신이라고 해봤자 입술만 살짝 댄 5~6초짜리로 여주인공은 입술에 셀룰로이드를 붙이고 촬영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반향은 컸다. 김화에 따르면,
 
당시로서는 쇼킹이요, 화제였다. 그 무렵 남녀간의 애정 표현은 손을 잡거나 남녀가 가볍게 포옹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키스를 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국산 영화 애정 신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었다.”
 
남녀 주인공은 이향(1914-1991)과 윤인자(1923-2012)였는데, 영화 밖의 세상에서 실제로 윤인자의 남편이 남자 배우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니기까지 했다니 그 정도의 키스신이나마 당시 관객들에겐 쇼킹하긴 했던 모양이다. 이 장면을 찍기 위해 감독은 1주일간 윤인자를 설득했다고 한다.


 
이향(본명 이근식)이 바로 문희준의 외할아버지이며, 1991년에 알츠하이머를 앓다 숨을 거뒀다. 그는 또 이완용 전문 배우로도 알려져 있다. 1959년 신상옥 감독의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전창근 감독의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1966년 이규웅 감독의 마지막 황후 윤비, 1972년 주동진 감독의 의사 안중근등 총 6편의 영화에서 이완용을 연기했다.
 
작품이 담고 있고 투철한 반공 메시지 덕분에 이 쇼킹한 장면이 검열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ㆍ1950년대편 제2, 231

2023년 9월 29일 금요일

강북구 미아동의 유래 - 의정부로 넘어가는 마지막 고개

미아동(彌阿洞)1865(고종 2)에 편찬한 육전조례한성부 동부 숭신방 미아리계라는 공식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데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고개(돈암현, 敦岩峴)를 일명 미아리 고개라고 부르는 까닭에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미아7동에 있는 불당골(불당곡, 佛堂谷)미아사(彌阿寺)가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이 절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미아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현재까지 7차례의 중수(重修)를 거듭하고 있다. 아미타불(Amitabha, Amitayas)은 서방정토에 계신 분으로 우리 겨레와는 너무 친숙한 부처님이다. 특히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나무아미타불'은 사후(死後)에 극락에 나고자 하는 중생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아미타불을 염하면서 미래에 좋은 세상에 태어날 것을 기원하며 살았다.
 
되너미 고개라는 명칭은 병자호란 때 되놈(호인, 胡人)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 왔으므로 붙여졌다는 설과 또 하나는 의정부로 넘어가는 고개의 끝이므로 마지막 고개라는 뜻으로 되었다는 설 그리고 돈암동 쪽에서 길음동 쪽으로 오를 때 힘이 많이 들어 온 몸의 기운이 모두 빠지므로 밥을 되로 먹은 고개라는 말이 변하여 되너미 고개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릉동 지역을 사을한리(沙乙閑里)라고 했으며 사을한리의 약칭인 사아리(沙阿里)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미아리는 한자 뜻 그대로 언덕에서 쉬어간다는 마을인 만큼 동명과 고개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겠다. 미아동의 현 위치는 한국전쟁 이후 서울의 인구가 팽창하게 되자 이곳의 야산과 공동묘지가 주택지로 되면서 인구의 급증을 가져와 행정 동의 변천이 심했다.
 
미아동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육전조례에 한성부 동수 숭신방 미아리계라고 표기된 이후, 1911년 일제강점기에는 서울의 행정구역을 58면제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곳은 경성부 숭신면 미아리가 되었다. 1914년에는 경성부 숭신면 미아리와 불당동을 경기도 고양군 미아리로 변경하였다가 1949년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미아리는 서울에 편입되었다. 이후 1950년에 서울특별시 동리 명칭 개정 조례에 따라 미아리를 미아동으로 고쳤으며 1973년 도봉구가 신설되면서 도봉구에 소속되고, 1995년 강북구가 신설되면서 이 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여러 개의 자연 마을이 남아 있다.
 
한편 미아리 공동묘지는 1957128일까지 사용하다가 묘를 모두 옮긴 지금은 주택단지를 만들었다.
 
이은식, 지명이 품은 한국사, 타오름, 2010, 37-40

강북구 번동(樊洞)의 유래 - 이씨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리라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 숭신면 번리로 바뀌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되었고 1950년 번리가 번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73년부터는 도봉구, 1995년부터는 강북구에 속해 있다.
 



번동(樊洞)의 동명 유래는 고려 시대에 쓰여진 운관비기(雲觀祕記)라는 책에 이씨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리라는 비기설이 있어, 이에 따라 고려 말기의 역대 왕 및 중신들은 이 설에 신경을 쓰며 경계하였다. 그러던 중 한양 북한산 아래 이곳에 오얏(자두)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씨가 흥할 징조라 여겨 벌리사(伐李使)를 보내서 오얏나무를 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써 이때부터 이 마을을 벌리(伐李)라고 칭하다가 번리(樊里)가 되었다고 한다.
 
193687일 동아일보 7면 사회 기사(가십)에는 벌리(伐李)와 왕심리(枉尋里)라는 제목으로 '惠化門外(혜화문외) 十餘里(십여리)쯤 되는곳인데 그 本名(본명)伐李(벌리)였다. 高麗(고려)書雲觀秘記(서운관비기)"李王都漢陽(이왕도한양)"이란 ()이 있는 ()高麗忠肅王(고려충숙왕)이 크게 걱정하야 漢陽(한양)南京府(남경부)設立(설립)하고 李姓(이성)을 가진사람으로 府尹(부윤)을 삼으며 三角山下(삼각산하)李樹(이수)를 많이 심어서 그것이 茂盛(무성)하면 문득 斫伐(작벌)하야 地氣(지기)를 누르고 地名(지명)伐李(벌리)라 했드니'라는 내용이 나온다. 강북구 번동에 대한 얘기이다.
 
이 동네에는 예부터 오얏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집집마다 울타리로 삼을 정도였고, 봄이 되면 주변의 수려한 풍치 속에서 오얏나무 꽃이 만발하였다. 특히 오패산에서는 수정 등 보석이 많이 나오고 맞은 편 초안산은 명당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고려 중신들도 자주 이곳을 다녀갔다. 그들은 목()씨 성을 오얏나무의 이씨를 연상하여 이 동 남쪽 명덕골에 벌리사를 배치하고 오얏나무를 벌채한데서 벌리라고 마을 이름이 불리어지다가 번리가 된 것이다.
 
번리의 변천 과정을 보면 18세기 중엽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와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벌리(伐里)로 표시되어 있는데, 18세기 중엽에 그린 사신금표도에는 상벌리와 하벌리로 되어 있다. 그 후 갑오개혁 때는 동서 숭신방(崇信坊, 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번리(樊里)로 되었다. 이때에 벌 리가 번리로 바뀐 것 같다. 번동의 자연 촌락은 위치에 따라 윗벌리, 가운데벌리, 아랫벌리로 구분되어 있다.
 
그중 아랫벌리는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아랫벌리(下伐里)는 벌리 아래쪽에 있던 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 때 신경진(辛慶晉)이 별장을 지었기 때문에 정자가 있는데서 정자말, 이것이 와전되어 정주말, 경주말 등으로 불리었다.
 
신경진은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패전한 신립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기상이 걸출하여 동네 아이들과 놀이에서는 늘 대장 노릇을 하였지만 글공부는 싫어했다. 장성한 후 아버지의 전공으로 선전관의 벼슬을 받았는데,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병조 참의, 훈련원 대장 등을 겸하였으며 후금의 군대가 대거 침입하자 공을 세워 병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그 후 별장은 조선 제23대 순조 때 이요헌이 점유하여 삼반정(三磐亭)이라 명명하였으며 현재 신경진 묘와 신도비는 서울시 중랑구 면목1동 면목초등학교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궁말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번동 산28번지에 조선 순조의 딸 복온 공주와 부마 김병주의 묘가 있기 때문이며 속칭 공주릉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공주와 부마의묘와 재실을 만들고 연못을 판 다음 연당을 지어 홍우관이라 하였다. 그런데 궁말이나 궁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묘소 남쪽 93번지에 창령위궁이란 재사(齋舍)가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창령위궁 입구의 안내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기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 93번지에 위치한 창령위궁은 조선왕조 제23대 순조 임금의 둘째 따님이신 복온 공주와 부마 김병주 선생 묘소의 재사이다. 이곳은 약칭 궁동 또는 정자말이라 일컬어지는데 궁동이란 창령위궁에서 유래된 것이다. 창령위와 공주가 살던 창령위궁은 1830(순조 30)까지 종로구 재동 한국병원 자리에 있다가 종로구 송현동 한국일보사 앞 외인 주택 자리에 이전하여 갑오개혁 때까지 있었다. 이곳은 공주릉이라고 인근에 널리 알려져 유명하며 부근 일대가 주민들의 휴식 및 산책로로 사랑을 받고 있다. 창령위궁은 현재 625전쟁 시에 개축되었지만 조선 시대 건물로 독특하며 현재 창문여자중ㆍ고등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은식, 지명이 품은 한국사, 타오름, 2010, 37-40

2023년 9월 28일 목요일

성동구 왕십리의 유래 : 왕십리에서 해메던 무학대사가 노인의 도움으로 경복궁 터를 발견하다

성동구 왕십리와 무학재의 유래 - 무학대사와 도선대사의 비기

 
왕십리(往十里)라는 동명의 유래는 조선 초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까지 와서 도선대사의 현성(顯聖)인 이름 모를 촌로(村老)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라고 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왕십리 생활권 [출처 : 나무위키]
 

새 도읍터를 물색하던 무학대사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자 그는 곧 안변에 있는 무학대사를 초청하여 왕사를 삼았고, 무학대사에게 곧 새 도읍터를 잡으라고 명하였다. 왕명을 받은 무학대사는 먼저 충청도 공주로 내려가 계룡산을 택한 다음 그곳을 신도(新都)라 이름 짓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태조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계룡산은 그대가 도읍할 자리가 아니니 새로 옮기도록 하라했으므로 태조는 즉시 무학대사에게 공사를 중지하고 다시 다른 곳을 택하라고 분부하였다.
 
1393(태조 2) 12월을 전후해 왕사 무학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한산주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 당시 한산주는 첩첩산중이었고 뒤로는 험한 바위산이요, 앞으로는 푸른 한강이 흐르고 목멱산(남산)은 푸른 숲에 묻혀 험하기 짝이 없었고 북한산과 목멱산 사이에는 가시나무 등 잡목이 우거졌다. 그리고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질퍽질퍽한 늪이었다. 그렇다보니 지형과 방향을 잘 잡을 수가 없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서 일단 무학대사의 발길은 북한산 상봉을 향했는데, 현재 성동구 왕십리 자리가 제일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산 위에서 볼 때와는 달리 그곳을 찾기가 어려웠고, 겨우 부근에 다다랐을 무렵 무학대사는 지치고 말았다.
 

왕십리에서 헤매던 무학대사, 촌로를 만나다

 
힘겨움에 일행과 함께 잠시 동안 갈대밭에서 쉬기로 하고 앉았으나 궁터 자리 찾을 일에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남루한 차림의 촌로가 누런 소를 타고 나타났다. 이상히 여긴 무학이 바라보고 있자 촌로는 조롱 섞인 말을 던졌다.
 
세상에 자초라는 놈이 이렇게 어리석고 무식할 줄은 몰랐다.”
 
이 말은 무학대사의 마음을 여지없이 건드렸다. 그래도 무학이 누구신지 공손하게 물으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이놈 자초야, 네가 그 능력으로 궁터를 얻으려 했느냐. 이곳은 구릉지인 관계로 도읍지 궁궐 자리가 되지 못하니 이곳에서 서북 방향으로 10리만 더 들어가 보아라. 네가 원하는 터가 있을 것이다.”
 
이상히 여긴 무학이 일행과 함께 서북 방향으로 걸음을 가늠하여 갈대숲을 헤치고 가 보았다. 그곳은 과연 자초가 찾던 터였고, 이 이상 더 좋은 터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 길로 개경에 있는 태조에게 돌아가 고하였다. 그 자리가 현재의 경복궁이다.
 
그 후 무학은 남루한 차림의 소를 타고 간 노인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하며 노인이 일러준 자리에서 궁궐터까지는 정확히 10리라 하여 갈왕()’자를 넣어 왕십리라 했고, 무학대사는 스스로가 무지(無知)하고 학식이 없다 하여 무학(無學)이라 지칭했다고 한다.
 

도선대사의 비기를 발견한 무학대사

 
한편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먼저 왕십리에 터를 잡고 또 역사의 시작을 위해 땅을 고르는데 홀연히 왕십리라고 돌에 새긴 도선대사의 비기(祕記)가 나왔다. 도선은 고려 초기의 유명한 도사로서 몇 백년 후에 무학이란 승려가 그곳에 와서 도읍터를 잡을 줄을 알고 이 석비를 새겨 묻은 것이니, 그 뜻은 십리를 더 가라는 뜻이었다. 무학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다시 무학재에 올라서서 도성을 쌓을 터전을 측량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왕십리와 무학재는 그때에 생겨난 이름이라 한다.
 

전설은 전설일뿐...

 
그러나 이곳은 경복궁과의 거리가 10리 지점에 있지 못하고 20여리나 떨어진 곳이며, 도성으로부터 10여리 떨어진 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전설은 사실과 거리가 있는 듯 하다.
 
더구나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동대문 밖 왕심평(往審坪)은 순무(무청, 蕪菁), (나복, 蘿蔔), 배추(백채, 白菜) 등 야채류의 산지라는 기록과 조선조 말에는 왕십리(往十里) 또는 왕심리(枉尋里)라고 불린 것을 보거나, 무학봉이 정말로 무학대사와 연관이 있었다고 한다면 무학봉(舞鶴峯)을 한자로 무학봉(無學峯)이라고 전하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다.
 
199212월에 성동구에서 발간된 성동구지(城東區誌)를 보면 무학봉 산성에는 태고종 청련사가 있는데 이 절은 1395(태조 4)에 무학대사가 중건하였다... (중략)... 일설에는 태조와 무학대사가 무학봉에 올라 경복궁터를 잡았다고 한다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답십리(踏十里)와 같이 왕십리라는 동명이 생겨나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이은식, 지명이 품은 한국사, 타오름, 2010, 25-28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