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9일 금요일

강북구 번동(樊洞)의 유래 - 이씨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리라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 숭신면 번리로 바뀌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되었고 1950년 번리가 번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73년부터는 도봉구, 1995년부터는 강북구에 속해 있다.
 



번동(樊洞)의 동명 유래는 고려 시대에 쓰여진 운관비기(雲觀祕記)라는 책에 이씨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리라는 비기설이 있어, 이에 따라 고려 말기의 역대 왕 및 중신들은 이 설에 신경을 쓰며 경계하였다. 그러던 중 한양 북한산 아래 이곳에 오얏(자두)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씨가 흥할 징조라 여겨 벌리사(伐李使)를 보내서 오얏나무를 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써 이때부터 이 마을을 벌리(伐李)라고 칭하다가 번리(樊里)가 되었다고 한다.
 
193687일 동아일보 7면 사회 기사(가십)에는 벌리(伐李)와 왕심리(枉尋里)라는 제목으로 '惠化門外(혜화문외) 十餘里(십여리)쯤 되는곳인데 그 本名(본명)伐李(벌리)였다. 高麗(고려)書雲觀秘記(서운관비기)"李王都漢陽(이왕도한양)"이란 ()이 있는 ()高麗忠肅王(고려충숙왕)이 크게 걱정하야 漢陽(한양)南京府(남경부)設立(설립)하고 李姓(이성)을 가진사람으로 府尹(부윤)을 삼으며 三角山下(삼각산하)李樹(이수)를 많이 심어서 그것이 茂盛(무성)하면 문득 斫伐(작벌)하야 地氣(지기)를 누르고 地名(지명)伐李(벌리)라 했드니'라는 내용이 나온다. 강북구 번동에 대한 얘기이다.
 
이 동네에는 예부터 오얏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집집마다 울타리로 삼을 정도였고, 봄이 되면 주변의 수려한 풍치 속에서 오얏나무 꽃이 만발하였다. 특히 오패산에서는 수정 등 보석이 많이 나오고 맞은 편 초안산은 명당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고려 중신들도 자주 이곳을 다녀갔다. 그들은 목()씨 성을 오얏나무의 이씨를 연상하여 이 동 남쪽 명덕골에 벌리사를 배치하고 오얏나무를 벌채한데서 벌리라고 마을 이름이 불리어지다가 번리가 된 것이다.
 
번리의 변천 과정을 보면 18세기 중엽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와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벌리(伐里)로 표시되어 있는데, 18세기 중엽에 그린 사신금표도에는 상벌리와 하벌리로 되어 있다. 그 후 갑오개혁 때는 동서 숭신방(崇信坊, 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번리(樊里)로 되었다. 이때에 벌 리가 번리로 바뀐 것 같다. 번동의 자연 촌락은 위치에 따라 윗벌리, 가운데벌리, 아랫벌리로 구분되어 있다.
 
그중 아랫벌리는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아랫벌리(下伐里)는 벌리 아래쪽에 있던 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 때 신경진(辛慶晉)이 별장을 지었기 때문에 정자가 있는데서 정자말, 이것이 와전되어 정주말, 경주말 등으로 불리었다.
 
신경진은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패전한 신립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기상이 걸출하여 동네 아이들과 놀이에서는 늘 대장 노릇을 하였지만 글공부는 싫어했다. 장성한 후 아버지의 전공으로 선전관의 벼슬을 받았는데,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병조 참의, 훈련원 대장 등을 겸하였으며 후금의 군대가 대거 침입하자 공을 세워 병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그 후 별장은 조선 제23대 순조 때 이요헌이 점유하여 삼반정(三磐亭)이라 명명하였으며 현재 신경진 묘와 신도비는 서울시 중랑구 면목1동 면목초등학교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궁말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번동 산28번지에 조선 순조의 딸 복온 공주와 부마 김병주의 묘가 있기 때문이며 속칭 공주릉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공주와 부마의묘와 재실을 만들고 연못을 판 다음 연당을 지어 홍우관이라 하였다. 그런데 궁말이나 궁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묘소 남쪽 93번지에 창령위궁이란 재사(齋舍)가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창령위궁 입구의 안내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기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 93번지에 위치한 창령위궁은 조선왕조 제23대 순조 임금의 둘째 따님이신 복온 공주와 부마 김병주 선생 묘소의 재사이다. 이곳은 약칭 궁동 또는 정자말이라 일컬어지는데 궁동이란 창령위궁에서 유래된 것이다. 창령위와 공주가 살던 창령위궁은 1830(순조 30)까지 종로구 재동 한국병원 자리에 있다가 종로구 송현동 한국일보사 앞 외인 주택 자리에 이전하여 갑오개혁 때까지 있었다. 이곳은 공주릉이라고 인근에 널리 알려져 유명하며 부근 일대가 주민들의 휴식 및 산책로로 사랑을 받고 있다. 창령위궁은 현재 625전쟁 시에 개축되었지만 조선 시대 건물로 독특하며 현재 창문여자중ㆍ고등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은식, 지명이 품은 한국사, 타오름, 2010, 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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