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9일 금요일

강북구 미아동의 유래 - 의정부로 넘어가는 마지막 고개

미아동(彌阿洞)1865(고종 2)에 편찬한 육전조례한성부 동부 숭신방 미아리계라는 공식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데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고개(돈암현, 敦岩峴)를 일명 미아리 고개라고 부르는 까닭에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미아7동에 있는 불당골(불당곡, 佛堂谷)미아사(彌阿寺)가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이 절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미아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현재까지 7차례의 중수(重修)를 거듭하고 있다. 아미타불(Amitabha, Amitayas)은 서방정토에 계신 분으로 우리 겨레와는 너무 친숙한 부처님이다. 특히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나무아미타불'은 사후(死後)에 극락에 나고자 하는 중생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아미타불을 염하면서 미래에 좋은 세상에 태어날 것을 기원하며 살았다.
 
되너미 고개라는 명칭은 병자호란 때 되놈(호인, 胡人)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 왔으므로 붙여졌다는 설과 또 하나는 의정부로 넘어가는 고개의 끝이므로 마지막 고개라는 뜻으로 되었다는 설 그리고 돈암동 쪽에서 길음동 쪽으로 오를 때 힘이 많이 들어 온 몸의 기운이 모두 빠지므로 밥을 되로 먹은 고개라는 말이 변하여 되너미 고개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릉동 지역을 사을한리(沙乙閑里)라고 했으며 사을한리의 약칭인 사아리(沙阿里)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미아리는 한자 뜻 그대로 언덕에서 쉬어간다는 마을인 만큼 동명과 고개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겠다. 미아동의 현 위치는 한국전쟁 이후 서울의 인구가 팽창하게 되자 이곳의 야산과 공동묘지가 주택지로 되면서 인구의 급증을 가져와 행정 동의 변천이 심했다.
 
미아동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육전조례에 한성부 동수 숭신방 미아리계라고 표기된 이후, 1911년 일제강점기에는 서울의 행정구역을 58면제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곳은 경성부 숭신면 미아리가 되었다. 1914년에는 경성부 숭신면 미아리와 불당동을 경기도 고양군 미아리로 변경하였다가 1949년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미아리는 서울에 편입되었다. 이후 1950년에 서울특별시 동리 명칭 개정 조례에 따라 미아리를 미아동으로 고쳤으며 1973년 도봉구가 신설되면서 도봉구에 소속되고, 1995년 강북구가 신설되면서 이 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여러 개의 자연 마을이 남아 있다.
 
한편 미아리 공동묘지는 1957128일까지 사용하다가 묘를 모두 옮긴 지금은 주택단지를 만들었다.
 
이은식, 지명이 품은 한국사, 타오름, 2010, 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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