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8일 목요일

성동구 왕십리의 유래 : 왕십리에서 해메던 무학대사가 노인의 도움으로 경복궁 터를 발견하다

성동구 왕십리와 무학재의 유래 - 무학대사와 도선대사의 비기

 
왕십리(往十里)라는 동명의 유래는 조선 초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까지 와서 도선대사의 현성(顯聖)인 이름 모를 촌로(村老)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라고 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왕십리 생활권 [출처 : 나무위키]
 

새 도읍터를 물색하던 무학대사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자 그는 곧 안변에 있는 무학대사를 초청하여 왕사를 삼았고, 무학대사에게 곧 새 도읍터를 잡으라고 명하였다. 왕명을 받은 무학대사는 먼저 충청도 공주로 내려가 계룡산을 택한 다음 그곳을 신도(新都)라 이름 짓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태조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계룡산은 그대가 도읍할 자리가 아니니 새로 옮기도록 하라했으므로 태조는 즉시 무학대사에게 공사를 중지하고 다시 다른 곳을 택하라고 분부하였다.
 
1393(태조 2) 12월을 전후해 왕사 무학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한산주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 당시 한산주는 첩첩산중이었고 뒤로는 험한 바위산이요, 앞으로는 푸른 한강이 흐르고 목멱산(남산)은 푸른 숲에 묻혀 험하기 짝이 없었고 북한산과 목멱산 사이에는 가시나무 등 잡목이 우거졌다. 그리고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질퍽질퍽한 늪이었다. 그렇다보니 지형과 방향을 잘 잡을 수가 없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서 일단 무학대사의 발길은 북한산 상봉을 향했는데, 현재 성동구 왕십리 자리가 제일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산 위에서 볼 때와는 달리 그곳을 찾기가 어려웠고, 겨우 부근에 다다랐을 무렵 무학대사는 지치고 말았다.
 

왕십리에서 헤매던 무학대사, 촌로를 만나다

 
힘겨움에 일행과 함께 잠시 동안 갈대밭에서 쉬기로 하고 앉았으나 궁터 자리 찾을 일에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남루한 차림의 촌로가 누런 소를 타고 나타났다. 이상히 여긴 무학이 바라보고 있자 촌로는 조롱 섞인 말을 던졌다.
 
세상에 자초라는 놈이 이렇게 어리석고 무식할 줄은 몰랐다.”
 
이 말은 무학대사의 마음을 여지없이 건드렸다. 그래도 무학이 누구신지 공손하게 물으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이놈 자초야, 네가 그 능력으로 궁터를 얻으려 했느냐. 이곳은 구릉지인 관계로 도읍지 궁궐 자리가 되지 못하니 이곳에서 서북 방향으로 10리만 더 들어가 보아라. 네가 원하는 터가 있을 것이다.”
 
이상히 여긴 무학이 일행과 함께 서북 방향으로 걸음을 가늠하여 갈대숲을 헤치고 가 보았다. 그곳은 과연 자초가 찾던 터였고, 이 이상 더 좋은 터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 길로 개경에 있는 태조에게 돌아가 고하였다. 그 자리가 현재의 경복궁이다.
 
그 후 무학은 남루한 차림의 소를 타고 간 노인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하며 노인이 일러준 자리에서 궁궐터까지는 정확히 10리라 하여 갈왕()’자를 넣어 왕십리라 했고, 무학대사는 스스로가 무지(無知)하고 학식이 없다 하여 무학(無學)이라 지칭했다고 한다.
 

도선대사의 비기를 발견한 무학대사

 
한편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먼저 왕십리에 터를 잡고 또 역사의 시작을 위해 땅을 고르는데 홀연히 왕십리라고 돌에 새긴 도선대사의 비기(祕記)가 나왔다. 도선은 고려 초기의 유명한 도사로서 몇 백년 후에 무학이란 승려가 그곳에 와서 도읍터를 잡을 줄을 알고 이 석비를 새겨 묻은 것이니, 그 뜻은 십리를 더 가라는 뜻이었다. 무학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다시 무학재에 올라서서 도성을 쌓을 터전을 측량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왕십리와 무학재는 그때에 생겨난 이름이라 한다.
 

전설은 전설일뿐...

 
그러나 이곳은 경복궁과의 거리가 10리 지점에 있지 못하고 20여리나 떨어진 곳이며, 도성으로부터 10여리 떨어진 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전설은 사실과 거리가 있는 듯 하다.
 
더구나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동대문 밖 왕심평(往審坪)은 순무(무청, 蕪菁), (나복, 蘿蔔), 배추(백채, 白菜) 등 야채류의 산지라는 기록과 조선조 말에는 왕십리(往十里) 또는 왕심리(枉尋里)라고 불린 것을 보거나, 무학봉이 정말로 무학대사와 연관이 있었다고 한다면 무학봉(舞鶴峯)을 한자로 무학봉(無學峯)이라고 전하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다.
 
199212월에 성동구에서 발간된 성동구지(城東區誌)를 보면 무학봉 산성에는 태고종 청련사가 있는데 이 절은 1395(태조 4)에 무학대사가 중건하였다... (중략)... 일설에는 태조와 무학대사가 무학봉에 올라 경복궁터를 잡았다고 한다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답십리(踏十里)와 같이 왕십리라는 동명이 생겨나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이은식, 지명이 품은 한국사, 타오름, 2010,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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