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카스 왕조(Doukas dynasty, AD.1059~1081) 시기의 비잔티움 제국 : 몰락의 서곡
두카스 왕조(Doukas dynasty)는 1059년부터 1081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했다. 이 시기는 제국이 전례 없는 심각한 영토 상실과 내부 혼란을 겪으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격동의 시기였다. 특히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에서의 참패는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를 통치한 황제들은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Constantine X Doukas),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Romanos IV Diogenes), 미카엘 7세 두카스(Michael VII Doukas), 그리고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Nikephoros III Botaneiates) 등이다.
1. 두카스 가문의 부상과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1059년-1067년)
11세기 두카스 가문은 파플라고니아(Paphlagonia) 출신으로 알려졌으며, 아나톨리아(Anatolia)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막대한 부를 가진 가문이었다. 이들이 9세기와 10세기의 두카스 가문과 어떤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동시대 역사가들은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고, 반대로 조나라스(Zonaras)는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가문의 창시자인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Constantine X Doukas, 1000경~1067)는 1059년 황위에 올랐다. 그는 황제가 되기 전 강력한 달라세노이(Dalassenoi) 가문과 결혼했으며, 두 번째 아내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Michael Keroularios)의 조카인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Eudokia Makrembolitissa)를 맞이했다. 또한 팔레올로고스(Palaiologos)와 페고니테스(Pegonites) 가문을 포함한 아나톨리아 군사 귀족 가문들과도 혼인을 통해 동맹을 강화했다.
콘스탄티노스 10세는 행정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나,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는 소홀했다. 그는 병사들의 급여를 삭감하고 군비를 줄였으며, 이는 제국이 외부의 위협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s)가 아나톨리아를 침공하며 국경 지역을 약탈하는 동안에도 그의 군사적 무능력은 비판을 받았다. 그의 재위 기간은 이후 비잔티움 제국이 겪게 될 군사적 재앙의 서곡과도 같았다. 1067년, 콘스탄티노스 10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미카엘 7세 두카스(Michael VII Doukas)가 계승자가 되었지만, 그는 너무 어려 공동 황제가 통치하게 되었다.
2.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의 집권과 만지케르트 전투(1068년-1071년)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죽음 이후, 제국은 급변하는 상황에 놓였다.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이 커지자, 젊은 미카엘 7세의 섭정인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는 강력한 군 지도자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1068년, 군사 귀족 출신이자 유능한 장군이었던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Romanos IV Diogenes, ?~1072)와 재혼하여 그를 황제로 옹립했다. 로마노스 4세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쇠락한 제국의 군사력을 재건하고 투르크족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즉위 후 몇 차례 투르크와의 교전에서 승리하며 제국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아나톨리아를 안정화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 노력은 1071년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에서 비잔티움 군대는 셀주크 투르크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로마노스 4세 황제는 포로로 잡히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비잔티움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
황제가 포로가 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로마노스 4세는 석방되어 귀환을 시도했으나, 두카스 가문 내부의 경쟁자와 정치적 라이벌인 요한네스 두카스(John Doukas, c.1006~1088) 등의 방해로 재집권에 실패했다. 결국 로마노스 4세는 폐위되었고, 그의 눈은 멀어졌으며, 이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는 비잔티움 제국이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이는 제국의 경제력과 군사력 기반을 흔들어 놓는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3. 미카엘 7세 두카스의 재위와 심화되는 위기(1071년-1078년)
로마노스 4세의 몰락 후, 미카엘 7세 두카스(Michael VII Doukas, c. 1050~1078)가 단독 황제로 통치하게 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아들이자 요한네스 두카스 카이사르(John Doukas Caesar)의 조카였다. 미카엘 7세의 재위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만지케르트 전투의 후유증과 계속되는 내부 반란, 그리고 외부의 압력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아나톨리아는 사실상 셀주크 투르크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이로 인해 제국의 세금 수입과 병력 징발 능력은 크게 감소했다. 발칸 반도에서도 세르비아(Serbs)의 성장이 두드러지면서 영토를 상실했다. 서쪽에서는 노르만족(Normans)이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비잔티움의 마지막 거점을 차지하며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
미카엘 7세는 군사적 재능보다는 학문에 더 관심이 많았고, 그의 통치는 능력 있는 신하들과 측근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은 심화되었다. 미카엘 7세는 인플레이션 문제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제국의 경제는 파탄 직전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러 군사령관들이 황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시기 미카엘 7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Constantine Doukas, c.1074~1095)는 나이가 어렸다. 결국 미카엘 7세는 재위 7년 만인 1078년에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의 반란으로 황위에서 물러났다. 그는 수도사로 은퇴하여 에페소스의 수도 대주교가 되었고, 109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4.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의 통치와 콤네노스 가문의 등장(1078년-1081년)
미카엘 7세를 폐위시킨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Nikephoros III Botaneiates, c. 1002~1081)는 1078년 1월 7일 황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이 포카스(Phokas) 가문의 후예라고 주장했으나, 그의 집권 또한 제국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제국은 여전히 내부 반란과 외부 침략으로 시달렸고, 아나톨리아의 상실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어갔다.
니케포로스 3세는 전임 황제와 마찬가지로 통치 기간 내내 여러 반란에 직면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증손녀인 이레네 두카이나(Irene Doukaina, c.1066~1133)와 결혼한 알렉시오스 콤네노스(Alexios Komnenos, 1048~1118) 장군이 두각을 나타냈다. 알렉시오스는 두카스 가문의 재정적, 정치적 지원을 받아 큰 힘을 얻었고, 이는 그가 제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81년 2월 중순, 이사키오스 콤네노스(Isaac Komnenos)와 알렉시오스 콤네노스 형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들은 수도를 지키던 서방 용병들을 매수하여 1081년 4월 1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승리하며 입성했다. 알렉시오스 콤네노스는 즉시 황제로 즉위하며 새로운 콤네노스 왕조(Komnenos dynasty)를 열었다. 이로써 두카스 왕조의 통치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으며, 비잔티움 제국은 새로운 시대, 즉 콤네노스 르네상스(Komnenian Restoration)라 불리는 일시적인 재도약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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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1년, 알렉시오스 1세의 대관식 이전의 비잔티움 제국 |
5. 두카스 왕조 시기의 유산과 제국의 변화
두카스 왕조 통치 20여 년은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시기 중 하나였다. 이 시기에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에게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발칸과 이탈리아에서도 영토를 잃었다. 이는 제국의 경제력과 인구 기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에게 치명적인 상실감을 안겨주었고, 동방에서의 제국의 헤게모니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상징했다.
두카스 가문의 통치는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 황제들의 군사적 무능력 또는 불운, 그리고 셀주크 투르크와 같은 강력한 외부 세력의 부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제국은 계속되는 내전과 반란으로 자원을 낭비했으며, 이는 제국의 방어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두카스 왕조는 비록 직접적인 몰락의 원인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미래에 발생할 재앙의 기초를 다진 시기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콤네노스 왕조의 재건을 위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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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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