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Constantine X Doukas, AD.c.1006~1067) : 동로마 제국 제105대 황제(AD.1059~1067)
혼란의 제국을 이끌었던 문관 황제 :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Constantine X Doukas/Ducas)
- [Greek : Κωνσταντῖνος Δούκας / romanized : Kōnstantīnos Doúkās]
- 출생 : 1006년경
- 사망 : 1067년 5월 23일
- 부친 : Andronikos Doukas
- 배우자 : Delassena / Eudokia Makrembolitissa
- 자녀 : [Eudocia]
Michael VII Doukas
A son
Anne Doukaina
Andronikos Doukas
Theodora Doukaina
Konstantios Doukas
Zoe Doukaina - 재위 : 1059년 11월 23일 ~ 1067년 5월 23일
- 공동황제 : 콘스탄티노스, 미카엘 7세
![]() |
과거에는 알렉시오스 1세로 여겨졌던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동시대 미니어처 그림 |
격변의 시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11세기 중반의 비잔티움 제국은 권력 다툼과 내부 혼란, 그리고 외부의 압력으로 점철된 격변기였다. 바실리우스 2세(Basil II, 958~1025)의 강력한 통치가 막을 내린 후, 제국은 급격히 약화되는 군사력과 재정 불안정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059년부터 1067년까지 약 8년간 비잔티움 황제로 재위했던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Constantine X Doukas, c.1006~1067)는 제국의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두카스 가문(Doukas dynasty)을 창건한 황제로, 문관 귀족 출신답게 학문적 지식과 행정 능력은 뛰어났으나, 점증하는 군사적 위협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의 통치는 제국의 재정적 어려움과 군사적 약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며, 향후 비잔티움 제국의 미래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글에서는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의 배경과 통치, 그리고 그가 제국에 남긴 유산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다.
두카스 가문의 기원과 학구적인 배경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의 정확한 부모는 1차 사료에 언급되지 않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가 바실리우스 2세 시대에 프레슬라프(Preslav)의 스트라테고스(Strategos, 군사령관)로 재직했던 안드로니코스 두카스(Andronikos Doukas)의 아들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1006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60~61세에 사망했다는 기록을 통해 그의 생몰년을 유추할 수 있다.
두카스 가문은 11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이 가문은 군사적 배경과 함께 제국 내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축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는 달리 군사적 재능보다는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대한 끝없는 논쟁을 즐기는 학자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훗날 그의 통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의 경력은 당시 정치적 격변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057년, 그는 이사아키오스 1세 콤니노스(Isaac I Komnenos, c.1007~1060)의 제위 찬탈을 지지하며 군사 쿠데타에 동참했다. 그러나 이사아키오스 1세가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치고 문관 귀족들을 압박하자,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점차 새로운 황제에 반대하는 궁정 세력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이사아키오스 1세의 갑작스러운 병환과 퇴위는 콘스탄티노스 10세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기회를 제공했다.
황제 즉위: 학구적인 지식인의 통치
이사아키오스 1세 콤니노스가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퇴위 압력을 받게 되자, 그의 신뢰를 받던 철학자 미카일 프셀로스(Michael Psellos)의 강력한 추천으로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가 다음 황제로 지명되었다. 1059년 11월 22일 이사아키오스 1세가 퇴위한 직후, 콘스탄티노스 10세는 다음 날인 11월 23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비잔티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두 번째 부인이자 강력한 정치적 감각을 지닌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Eudokia Makrembolitissa)와의 결혼을 통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에우도키아는 총대주교 미카일 케룰라리오스(Michael I Cerularius)의 조카였다. 이는 그가 단순한 군사력보다는 정략결혼을 통한 정치적 연대를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자신이 가진 학자적 기질을 통치에 반영했다. 그는 학자와 문관들을 우대하고, 철학과 신학에 대한 논의를 장려했다. 또한 문관 귀족들을 중용하여 제국의 행정 체계를 문민 위주로 개편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통치 초기에는 이러한 문민 중심의 정책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작용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당시 비잔티움 제국이 직면했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이었다.
군사적 약화와 영토 상실: 위기의 통치
콘스탄티노스 10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동서남북 모든 국경에서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그는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군대에 대한 지원을 줄이며, 용병들을 해고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이는 단기적으로 제국의 금고를 채우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비잔티움 군대의 전투력과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학문에 대한 그의 몰입은 실제 군사적 대응의 부재로 이어졌고, 이는 제국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서방에서는 노르만족(Normans)이 비잔티움의 이탈리아 영토를 계속해서 잠식해 나갔다. 노르만족은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며 비잔티움 제국의 남은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동쪽에서는 튀르크계 셀주크 제국(Seljuk Empire)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아나톨리아(Anatolia) 고원 지대로 진격해 들어왔다.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이 이끄는 군대는 비잔티움 제국의 동부 방어선을 위협했고,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이들에게 여러 차례 패배를 겪었다.
발칸 반도에서는 헝가리(Hungarians)족이 벨그라드(Belgrade)를 점령하며 북부 국경을 침범했고, 페체네그족(Pechenegs)과 오구즈 튀르크(Oghuz Turks)와 같은 유목 민족의 침략도 끊이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이러한 위협에 대해 효과적인 군사적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주로 행정적 효율성과 학문적 논의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군사 문제에 대한 그의 소홀함은 제국의 군사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무능력은 비잔티움 국경 지역의 방어력을 붕괴시키고 제국 영토의 손실을 가속화했다.
문민 중심의 통치와 내부적 갈등
콘스탄티노스 10세의 통치는 군인들이 아닌 문관 중심의 정책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미카일 프셀로스를 비롯한 문관 귀족들을 중용하며 이들의 권한을 강화했다. 황제 자신도 학문에 몰두하며 철학과 신학에 대한 토론을 즐겼다 . 이러한 정책은 재정적 효율성과 행정적 안정성을 일부 가져왔을지 모르나, 제국의 국방력 약화라는 치명적인 대가를 치르게 했다.
군인들은 황제의 군사적 무능함과 문관 편향 정책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는 군인 계층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군사 반란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제국이 직면한 실제적인 위협을 외면하고, 오히려 재정 긴축이라는 명목으로 군사력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는 그의 통치 시기를 11세기 후반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만들었다.
가족 관계와 복잡한 계승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는 두 번 결혼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콘스탄티노스 달라세노스(Constantine Dalassenos)의 딸이었지만, 그녀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Eudokia Makrembolitissa, c.1021~1096)였다. 그녀는 콘스탄티노스 10세에게 네 아들과 세 딸을 낳아주었다. 이들 중 일부는 제국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미카일 7세 두카스(Michael VII Doukas, 1050년대 중반~1090년대): 1060년부터 공동 황제로 즉위했으며, 1071년 이후에는 선임 황제로서 제국을 통치했다.
- 유아기에 사망한 아들 한 명.
- 안나 두카이나(Anne Doukaina): 수녀가 되었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Andronikos Doukas, c.1040~1077): 1068년부터 1078년까지 공동 황제로 재직했다.
- 테오도라 두카이나(Theodora Doukaina, c.1050~1080): 베네치아 총독 도메니코 셀보(Domenico Selvo)와 결혼했다.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Konstantios Doukas, 1059~1081): 1060년부터 1078년까지 공동 황제였으며, 1081년 노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 조에 두카이나(Zoe Doukaina):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Alexios I Komnenos)의 형제인 아드리아노스 콤니노스(Adrianos Komnenos)와 결혼했다. 그들 사이에는 아들 알렉시오스와 딸 안나, 알렉시아가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10세는 1067년 5월 23일에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아들들만이 황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부인 에우도키아가 재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그의 사망 이후, 아들들이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에우도키아가 섭정으로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에우도키아는 결국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Romanos IV Diogenes)와 재혼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죽음과 통치의 평가: 군사적 쇠퇴의 시작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는 이미 고령의 나이에 병든 몸으로 황제에 올랐으며, 결국 1067년 5월 23일에 60~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재위는 비잔티움 제국에 있어 치명적인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통치는 군사적 실패와 영토 상실로 얼룩졌다. 노르만족에게 이탈리아의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발칸 반도에서는 헝가리족에게 벨그라드를 내주고, 동쪽에서는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했다. 이러한 군사적 실패는 그의 학구적인 성향과 문관 중심의 정책이 군사적 현실을 외면한 결과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역사가들은 그를 군사적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기록한다.
반면, 그의 문민 우대 정책과 학문 진흥은 비잔티움 문화와 행정 체계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일부 존재한다. 그는 법률, 교육, 철학 등 내정 분야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제국의 붕괴를 막을 수 없었고, 오히려 외부의 위협에 대한 대응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그의 가장 큰 한계로 지적된다.
결론: 균형을 잃은 제국의 비극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의 재위 기간은 비잔티움 제국이 당면했던 복합적인 위기를 명확히 보여주는 시기였다. 그는 지식인이자 유력 가문의 일원으로서 황위에 올랐지만, 제국이 필요로 했던 강력한 군사적 리더십과 냉철한 현실 인식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의 통치 아래 비잔티움 제국은 중요한 영토를 상실했고, 군사력은 더욱 약화되었으며, 이는 훗날 만치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와 같은 비극적인 패배의 씨앗이 되었다.
그는 제국의 재정을 확충하고 행정 시스템을 개선하려 노력했으나, 그 과정에서 군대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군사적 역량을 축소시킨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시대는 문민 통치와 학문적 추구가 제국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군사력 증강보다 우선시될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교훈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그의 짧은 통치는 비잔티움 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지며, 균형 잡힌 통치와 위기 대응 능력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비잔티움 제국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 속에서 그의 이름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