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Nikephoros III Botaneiates, AD.1002~1081) : 동로마 제국 제108대 황제(AD.1078~1081)
권력의 틈새를 비집고 오른 군인 황제: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
- Nikephoros III Botaneiates
- [Greek : Νικηφόρος Βοτανειάτης / romanized : Nikēphóros Botaneiatēs]
- 출생 : 1002년
- 사망 : 1081년
- 부친 : Michael Botaneiates
- 배우자 : Vevdene, Maria of Alania
- 재위 : 1078년 1월 7일 ~ 1081년 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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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 |
위기에 선 제국, 또 다른 격변의 시작
11세기 후반의 비잔티움 제국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동쪽에서는 셀주크 튀르크(Seljuk Turks)가 아나톨리아(Anatolia)를 잠식하며 제국의 심장부를 위협했고, 서쪽에서는 노르만족(Normans)이 비잔티움의 마지막 이탈리아 영토를 삼키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문관 귀족과 군부 귀족 간의 오랜 갈등이 심화되었고, 무능하거나 단명하는 황제들의 연속으로 제국의 기강은 극도로 해이해졌다. 1071년의 만치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 패배는 비잔티움 제국의 오랜 영토였던 아나톨리아를 사실상 상실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고, 이어진 미카엘 7세 두카스(Michael VII Doukas, c.1050~c.1090) 황제의 무능한 통치는 제국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시기, 비잔티움 제국의 혼란스러운 황위 계승을 단절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려 했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Nikephoros III Botaneiates, 1002~1081)였다. 그는 1078년부터 1081년까지 약 3년간 비잔티움 황제로 재위하며 제국을 안정화하려 시도했지만, 그 역시 시대의 거대한 흐름과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고뇌해야 했다. 군인 출신으로서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문관 중심의 궁정과 군부의 끊임없는 반란 속에서 그의 통치는 순탄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의 생애와 그의 파란만장한 황제 등극 과정,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 역사에 남긴 발자취를 추적한다.
군인 명문가 보타니아테스 가문의 일원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는 1002년에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보타니아테스(Botaneiates) 가문은 아나톨리아 테마(Anatolic Theme) 출신의 유서 깊은 군사 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 미카엘 보타니아테스(Michael Botaneiates)와 조상들 또한 바실리우스 2세(Basil II, 958~1025) 시절 게오르기아인(Georgians)과의 전쟁과 불가리아 정복 전쟁에서 활약한 유능한 장군들이었다고 한다. 이는 그의 가문이 제국 군부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과 명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니케포로스 3세는 또한 자신이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Nicephorus II Phocas)와 같은 포카스(Phocas) 가문과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통성을 주장하고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당시 비잔티움 황제들의 일반적인 수단 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지만, 그는 일찍부터 군인의 길을 걸었다. 1048년부터 1053년까지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Constantine IX Monomachos) 황제(902~1055) 휘하에서 페체네그족 반란(Pecheneg revolt)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며 군사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사아키오스 1세 콤네노스(Isaac I Komnenos, c.1007~1060)의 제위 찬탈(1057년)을 도왔던 전적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미 당시 제국의 군사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지방 사령관으로서의 경력과 문관 귀족의 견제
니케포로스 3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중요한 국경 지대에서 '두크스(doux)' 즉 군사령관을 역임하며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1060년대 중반 키프로스(Cyprus)의 두크스로도 복무했을 수 있다고 바르 헤브라에우스(Bar Hebraeus)는 기록했다. 그리고 1065년경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 황제(c.1006~1067)에 의해 안티오키아(Antioch)의 두크스로 임명되었다. 안티오키아는 동방 국경의 중요한 요충지로, 알레포 에미르국(Emirate of Aleppo)의 침략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곳이었다.
니케포로스는 경험이 부족하고 장비가 미흡한 병사들을 이끌었지만, 그의 뛰어난 군사적 기량과 잘 훈련된 휘하 부대, 그리고 지역 병력을 활용하여 알레포의 수많은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은 비잔티움의 국경을 안정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1067년경, 그는 안티오키아 두크스직에서 해임되었다. 이는 그의 군사적 능력과는 별개로 당시 비잔티움 궁정의 고질적인 문관 귀족과 군부 귀족 간의 갈등 때문이었다. 로마노스 3세(Romanos III, 1028–1034)와 미카엘 6세(Michael VI) 시대부터 행정 관료들, 즉 문관들은 군사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했다.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이사아키오스 1세에 비해 약했기 때문에 문관들의 조작에 휘둘려 군사 엘리트를 훼손시켰다. 니케포로스 또한 이러한 문관 세력의 견제와 정치적 음모에 희생되어 한동안 은퇴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미카엘 7세 두카스 황제는 그를 아나톨리아 테마의 쿠로팔라테스(kouropalates)이자 총독으로 소환하며 다시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악화된 제국의 군사적 상황과 그가 가진 군사적 역량 때문이었다.
황위 찬탈의 과정: 위기를 기회로 삼다
미카엘 7세 두카스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그는 나약하고 정치적 감각이 부족한 황제였으며, 그의 재상 니케포리체스(Nikephoritzes)의 전횡으로 제국의 재정은 파탄나고 군대는 더욱 약화되었다. 셀주크 튀르크는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영토를 계속해서 점령해 나갔고, 각지에서는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미카엘 7세는 셀주크 튀르크에 맞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니케포로스에게 너무 솔직한 태도로 응했다가 오히려 황제의 분노를 샀다. 이는 니케포로스 3세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황위를 찬탈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는 자신의 군사적 명성과 보타니아테스 가문의 오랜 명성, 그리고 혼란에 지친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황위 찬탈을 결심했다. 1078년, 그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동시에 발칸 지역에서는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Nikephoros Bryennios the Elder)도 미카엘 7세에게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보타니아테스가 브리엔니오스보다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수도를 장악했다. 1078년 3월 24일, 미카엘 7세는 황위에서 물러났고, 니케포로스 3세는 비잔티움 원로원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1078년 4월 3일에 정식으로 황제에 등극했다.
니케포로스 3세의 통치: 안정화 노력과 끊이지 않는 도전
황제에 오른 니케포로스 3세는 우선 제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정책들을 펼쳤다. 그는 군대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대규모 기부금(donatives)을 지급하여 환심을 샀고, 모든 연체 채무를 탕감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또한 그는 작은 법률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 반란 진압 : 그는 황제에 오른 후에도 여러 반란에 직면했다.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반란 외에도 니케포로스 바실라케스(Nikephoros Basilakes)의 반란이 일어났고, 미카엘 7세 두카스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Constantine Doukas)의 반란도 있었다. 이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니케포로스 3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지닌 알렉시오스 콤니노스(Alexios Komnenos, 1048~1118)에게 군권을 위임하여 진압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군사적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 암살 시도 : 그는 바랑인 친위대(Varangian Guard)에 의한 암살 시도를 겪기도 했다. 이는 황제의 권위가 여전히 불안정했음을 보여준다.
- 외교적 성과 : 그는 외교적으로는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트레비존드(Trebizond)의 총독 테오도레 가브라스(Theodore Gabras)와 안티오키아(Antioch)의 필라레토스 브라카미오스(Philaretos Brachamios)는 당시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상태였으나, 니케포로스 3세는 이들의 복종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셀주크 튀르크의 침략에 대해서는 미카엘 7세와 마찬가지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미 아나톨리아의 상당 부분이 튀르크의 손아귀에 넘어간 상황에서 제국의 군사력만으로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어려웠다.
가족과 비극적인 퇴위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베브데네(Vevdene)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안나 콤니니(Anna Komnene)의 알렉시아드(Alexiad)에 니케포로스 3세의 손자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베브데네와의 사이에 최소 한 명의 자녀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부인은 알라니아의 마리아(Maria of Alania)였다. 그녀는 조지아의 공주이자, 이전 황제 미카엘 7세 두카스의 아내였다. 니케포로스 3세는 권력 강화를 위해 마리아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자신과 결혼시켰는데, 이는 황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두카스 가문의 지지를 얻으려던 정치적 결혼이었다. 마리아는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Constantine Doukas)를 위해 황후 자리를 유지했지만, 니케포로스 3세와 두카스 가문 간의 관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니케포로스 3세는 노쇠한 황제였고,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에게 반란 진압을 위임했던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이제 제국을 구할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니케포로스 3세에 대항하여 새로운 반란을 일으켰고, 1081년 4월 1일,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자 니케포로스 3세는 황위에서 물러나 수도사로 은퇴했다. 그는 그 해에 79세의 나이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페리블렙투스 수도원(Monastery of Peribleptus)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비잔티움 제국은 또다시 황조 교체를 맞이하며 콤니노스 왕조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평가와 유산: 혼란 속의 과도기적 통치자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의 재위는 약 3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통치는 비잔티움 제국 11세기 후반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유력 가문의 배경을 바탕으로 황위에 올랐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의 재정을 안정화하고 내부 반란을 진압하며 질서를 회복하려 노력했다. 채무 탕감, 대규모 기부금 지급, 법률 개혁 등은 민심을 수습하려는 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동방의 독립적인 총독들을 복속시켜 제국의 명목상 권위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외부의 심각한 위협, 특히 셀주크 튀르크의 침략에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미 상실된 아나톨리아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버거운 과제였다. 게다가 끊이지 않는 내부 반란과 궁정 내의 파벌 싸움은 황제의 권위를 더욱 약화시켰고, 이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와 같은 새로운 강력한 인물의 부상을 부추겼다. 니케포로스 3세는 군인이었지만, 제국의 고질적인 병폐를 완전히 치유할 힘은 없었던 것이다.
그의 통치는 콤니노스 왕조의 등장을 위한 과도기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에게 반란 진압이라는 명목으로 군권을 위임했고, 이 과정에서 알렉시오스는 군사적,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며 황위 계승의 기반을 다졌다. 결국 니케포로스 3세의 퇴위는 콤니노스 가문이 비잔티움 제국의 운명을 다시 움켜쥘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불안정한 시대의 발자취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오랜 군사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려 했던 군인 황제였다. 그의 통치는 불안정한 시대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국의 재건을 위한 시도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 그는 대규모 반란과 암살 시도 속에서도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깊어지는 제국의 병폐와 끊임없이 등장하는 도전자들 앞에서 결국 황위를 지키지 못했다.
니케포로스 3세의 이야기는 비잔티움 제국이 직면했던 난제들과 그 안에서 고군분투했던 통치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퇴위는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닌, 비잔티움 제국의 새로운 중흥기이자 마지막 영광을 알리는 콤니노스 왕조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쇠락하는 제국의 혼돈 속에서 잠시 빛을 발하려 했으나, 결국 역사의 큰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비운의 황제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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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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