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7세 두카스(Michael VII Doukas, AD.c.1050~c.1090) : 동로마 제국 제107대 황제(AD.1071~1078)
혼돈 속의 통치자: 미카엘 7세 두카스, 비운의 비잔티움 황제
- Michael VII Doukas/Ducas
- [Greek : Μιχαήλ Δούκας / romanized : Mikhaḗl Doúkās]
- Parapinakes : minus a quarter
- [Greek : Παραπινάκης / romanized : Parapinákes]
- 출생 : 1050년경
- 사망 : 1090년
- 부친 : Constantine X Doukas
- 모친 : Eudokia Makrembolitissa
- 배우자 : Maria of Alania
- 자녀 : Constantine Doukas
- 재위 : 1071년 10월 1일 ~ 1078년 3월
- 대관식(공동황제) : 1060년
- 공동황제 :
Leo Diogenes (1070)
Nikephoros Diogenes (1070)
Konstantios Doukas
Andronikos Doukas
Constantine Douk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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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의 카쿨리 삼단 제단화(Georgian Khakuli Triptych)에 묘사된, 황제의 완전한 예복을 갖춰 입은 미카엘 7세 두카스의 클루아조네(Cloisonné engraving, 세공 기법) 조각 |
만치케르트의 그림자와 '파라피나케스'의 황제
11세기 후반의 비잔티움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1071년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 황제가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하고 포로로 잡히는 만치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의 재앙은 제국의 동방 방어선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 내부의 권력 균형까지 뒤흔들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제국의 선임 황제 자리에 오른 이가 바로 미카엘 7세 두카스(Michael VII Doukas, c.1050~c.1090)였다. 1071년부터 1078년까지 통치한 그는 무능한 황제로 평가받으며, 그의 재위 기간은 통화 가치 하락으로 인해 '파라피나케스'(Parapinakes), 즉 '4분의 1만큼 부족한'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기억된다. 이 별명은 그의 통치 시기에 벌어진 제국의 전반적인 경제적, 군사적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미카엘 7세의 삶과 재위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이 겪었던 혼란스러운 사건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자세히 다룬다.
어린 시절과 공동 황제로서의 시작
미카엘 7세 두카스는 105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유력 가문인 두카스 가문의 일원으로,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Constantine X Doukas, c.1006~1067)와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Eudokia Makrembolitissa) 황후의 맏아들이었다. 1060년 말경, 그는 갓 태어난 동생 콘스탄티오스 두카스(Konstantios Doukas)와 함께 또는 그 직전에 공동 황제로 지명되었다. 이는 두카스 가문이 황실의 혈통을 굳건히 하고 미래를 보장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067년 5월 23일,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0세가 사망했을 때 미카엘 7세는 이미 17세였다. 그는 충분히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정치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그의 어머니 에우도키아와 숙부 요한니스 두카스(John Doukas)가 실질적인 섭정으로서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후 1068년, 어머니 에우도키아가 군인 출신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Romanos IV Diogenes, c.1030~1072)와 재혼하면서 로마노스 4세가 황제가 되었고, 미카엘 7세는 그의 휘하에서 공동 황제 지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도 미카엘 7세는 여전히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고 학문 연구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치케르트 이후의 혼돈과 황제 즉위
미카엘 7세에게 황제로서의 실질적인 권한이 주어진 것은 비잔티움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사건 중 하나인 1071년의 만치케르트 전투 이후였다.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 황제가 셀주크 튀르크의 포로가 되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그가 죽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다. 두카스 가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로마노스 4세를 축출하고 미카엘 7세를 단독 황제로 옹립했다.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승리한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은 로마노스 4세를 석방했지만,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을 때 미카엘 7세의 지지자들은 이미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로마노스 4세는 실명당하고 유배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1071년 10월 1일부터 미카엘 7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선임 황제로서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는 순탄치 않았다. 그는 행정에 무관심했고, 능력보다는 친분에 따라 인사를 단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그의 재정 장관 니키포리체스(Nikephoritzes)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고 평가된다. 니키포리체스는 세금을 대폭 인상하고 사치스러운 지출을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대한 적절한 재정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군대는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고, 이는 병사들의 사기 저하와 더불어 훗날 발생할 수많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실책으로 인해 당시 비잔티움 화폐의 가치가 심각하게 하락했는데, 여기서 '파라피나케스'라는 그의 별명이 유래했다.
제국의 위기: 동방과 서방의 압력
미카엘 7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국경에서 심각한 위협에 시달렸다.
- 첫째, 동방의 셀주크 튀르크: 만치케르트 전투 이후 셀주크 튀르크는 아나톨리아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동부에서 셀주크에 맞설 군사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튀르크의 침략으로 아나톨리아는 점진적으로 상실되어 갔다. 미카엘 7세는 이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제국의 핵심 병력 보급원인 아나톨리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1073년 셀주크 튀르크에 맞서 이사아키오스 콤네노스(훗날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형제)가 이끄는 군대를 보냈으나 패배했고, 그의 사령관은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 둘째, 노르만족과 이탈리아 상실: 서방에서는 노르만족이 비잔티움의 마지막 이탈리아 거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미카엘 7세의 재위 기간 동안 이탈리아 남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바리(Bari)가 1071년 노르만족에게 최종적으로 함락되었다. 이로써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에서의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 셋째, 발칸의 반란: 발칸 반도에서는 조지 보이테흐(Georgi Voyteh)가 주도하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미카엘 7세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많은 시간과 자원을 소모해야 했다.
- 넷째, 용병들의 반란: 제국의 불안정한 재정과 군사력 약화는 용병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특히 루셀 드 바이욀(Roussel de Bailleul)이 이끄는 서유럽 용병들은 반란을 일으켜 갈라티아(Galatia)와 리카오니아(Lycaonia) 지역에 독립적인 공국을 세우려 시도했다. 그들은 심지어 미카엘의 숙부인 카이사르(Caesar) 요한니스 두카스까지 사로잡아 황위 찬탈자를 옹립하기도 했다 . 결국 미래의 황제 알렉시오스 콤네노스(Alexios Komnenos)가 셀주크군의 도움을 받아 루셀을 물리치고 요한니스 두카스를 구출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제국의 중앙 통제력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강화되는 내부 반란과 황제의 퇴위
미카엘 7세의 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은 특히 통화 가치 하락과 맞물려 커져갔다. 이는 결국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1078년, 두 명의 장군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Nikephoros Bryennios the Elder)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테스(Nikephoros III Botaneiates)가 각각 발칸과 아나톨리아에서 동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테스는 셀주크 튀르크의 지지를 얻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먼저 도착했다. 미카엘 7세는 거의 저항하지 않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퇴위는 1078년 3월 24일 또는 31일에 이루어졌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미카엘 7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스타우디온 수도원(Monastery of Stoudios)으로 은퇴했다. 이는 이전의 폐위된 황제들이 그랬듯이 수도사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은거하다가 훗날 에페소스(Ephesus)의 수도 대주교가 되기도 했다. 그는 109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미카엘 7세의 가족 관계
미카엘 7세 두카스는 조지아(Georgia)의 바그라트 4세(Bagrat IV) 왕의 딸인 알라니아의 마리아(Maria of Alania)와 결혼했다. 그녀는 아름다움과 지성으로 유명했다. 그들 사이에는 적어도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Constantine Doukas): 그는 약 1075년부터 1078년까지, 그리고 1081년부터 1087/8년까지 공동 황제로 재직했다. 그는 1095년경 사망했다.
미카엘 7세의 퇴위 이후,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와 재혼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통해 콤네노스 가문과 연결되었고, 이후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황제의 중요한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평가와 유산: 쇠퇴의 상징이자 전환점
미카엘 7세 두카스의 통치는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를 상징하는 시기로 평가받는다. 그는 군사적, 경제적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측근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내부 분열로 인해 제국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특히 통화 가치 하락과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영토 상실은 제국의 미래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자들은 그의 통치를 무능하다고 평가하며, 그를 '파라피나케스'라는 별명으로 기억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는 비잔티움 제국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무능은 결국 강력한 군인 황제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켰고, 이는 콤네노스 가문이 제국의 재건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의 통치 후반부에 활약하기 시작한 알렉시오스 콤네노스(Alexios Komnenos)는 미카엘 7세의 실정으로 인한 제국의 붕괴를 막고, 콤네노스 왕조의 중흥기를 열게 된다.
결론: 황제의 무능이 초래한 제국의 비극
미카엘 7세 두카스의 통치는 비잔티움 제국의 11세기 후반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이다. 그는 복잡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도전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할 만한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의 시대에 제국은 바리를 잃었고, 발칸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동방에서는 셀주크 튀르크가 거침없이 진격해 들어왔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재정적 무능과 화폐 가치 하락으로 인해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었다.
미카엘 7세의 통치는 결국 그의 퇴위로 막을 내렸지만,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스스로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리더십 아래 중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역사에서 비판적인 인물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그의 실정은 오히려 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비잔티움의 역사는 혼란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가진 새로운 리더십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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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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