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Romanos IV Diogenes, AD.1030~1072) : 동로마 제국 제106대 황제(AD.1068~1071)
비운의 군인 황제 :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와 만치케르트의 그림자
- Romanos IV Diogenes
- [Greek : Ῥωμανός Διογένης / romanized : Rōmanos Diogenēs]
- 출생 : 1030년경
- 사망 : 1072년
- 부친 : Constantine Diogenes
- 모친 : Argyrosa
- 배우자 : Anne Alusiane of Bulgaria, Eudokia Makrembolitissa
- 자녀 :
Anne : Constantine Diogenes
Eudocia : Nikephoros Diogenes, Leo Diogenes - 재위 : 1068년 1월 1일 ~ 1071년 10월 1일
- 공동황제 :
Michael VII Doukas
Konstantios Doukas
Andronikos Doukas
Leo Diogenes
Nikephoros Dioge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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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의 은화 1/3 밀리아레시온 |
동로마 제국 쇠퇴기의 마지막 불꽃
11세기 중반 비잔티움 제국은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바실리우스 2세(Basil II, 958~1025) 사후 이어진 문관 황제들의 무능한 통치와 군사력 약화는 제국의 국경을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동방에서는 셀주크 튀르크(Seljuk Turks)가 아나톨리아(Anatolia) 깊숙이 침투하며 제국의 심장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비잔티움의 명운을 다시 일으키려 했던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1068년부터 1071년까지 재위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Romanos IV Diogenes, c.1030~1072) 황제였다. 그는 제국의 군사적 영광을 되찾으려는 강력한 열망을 가진 군인 황제였지만,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될 만치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를 지휘하며 제국의 운명을 뒤바꾸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짧은 재위는 비잔티움 제국 쇠퇴의 가속화와 함께,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서곡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로마노스 4세의 생애와 통치, 그리고 만치케르트 전투가 제국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세히 다룬다.
명문가 출신 군인의 성장과 황제의 꿈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명문 군사 귀족 가문인 카파도키아 그리스인(Cappadocian Greeks)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디오게네스(Constantine Diogenes)는 바실리우스 2세 시절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장군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로마노스 4세는 어려서부터 군인의 길을 걸었고, 특히 국경 수비대(Akritai) 사령관으로서 시리아와 다뉴브 전선에서 큰 공을 세우며 명성을 떨쳤다. 그는 용맹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067년, 그는 황위 계승을 노렸다는 혐의로 반역죄로 기소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실권자였던 두카스 가문의 영향력 아래 미카엘 7세 두카스(Michael VII Doukas)의 어머니이자 선제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Constantine X Doukas)의 황후였던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Eudokia Makrembolitissa)는 그를 살려두고 제국에 복무하게 할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에우도키아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혼란에 빠진 제국을 구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로마노스 4세와의 결혼을 선택했다.
1068년 1월 1일, 로마노스 4세는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와 결혼하면서 비잔티움 황제에 즉위했다. 이는 두카스 가문의 반발을 사긴 했지만, 에우도키아가 군사적 경험이 부족한 자신의 아들들을 보호하고 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제국은 문관 황제의 시대가 끝나고 강력한 군인 황제의 등장을 맞이하게 된다.
재위 초기의 개혁과 국내 정치의 불안정
황제에 오른 로마노스 4세의 최우선 목표는 비잔티움 군대의 약화를 막고 셀주크 튀르크의 침략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바실리우스 2세 시절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했다. 로마노스 4세는 즉위 초부터 군사적 재건에 힘썼다. 그는 군인들을 재무장시키고 훈련을 강화했으며,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이러한 개혁 시도는 제국의 군사적 효율성을 높이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로마노스 4세는 재위 초기에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에서 셀주크 튀르크에 대항하여 몇 차례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들은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제국에 대한 셀주크의 압박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그는 동부 국경의 방어를 강화하고 잃었던 요새들을 일부 되찾았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국내적으로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비인기 정책을 여러 차례 단행했는데, 이는 문관 귀족들과 특히 두카스 가문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두카스 가문은 그를 황제 자리에 앉히는 데 동의했지만, 실제 권력을 로마노스 4세가 장악하자 그를 견제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권력 다툼은 로마노스 4세의 통치 기간 내내 지속되었으며, 제국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재정 문제도 심각했다. 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리한 세금을 부과했고, 이는 백성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운명의 만치케르트 전투: 제국의 심장이 찢기다
로마노스 4세의 재위 기간 중 가장 중요하고 비극적인 사건은 1071년에 일어난 만치케르트 전투였다. 이 전투는 셀주크 튀르크의 침략을 영원히 종식시키기 위한 로마노스 4세의 야심 찬 시도였다. 그는 제국의 전력을 총동원하여 약 4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직접 이끌고 아나톨리아 동부로 진격했다. 이 군대에는 비잔티움 본토군뿐만 아니라 바랑인 친위대(Varangian Guard)와 프랑크족 용병, 투르크족 용병 등 다양한 민족의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오랜 기간 방치된 군대는 규율이 흐트러지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으며, 지휘관들 간의 불화도 심각했다. 특히 두카스 가문의 안드로니코스 두카스(Andronikos Doukas)는 로마노스 4세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며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병력을 제때 지원하지 않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1071년 8월 26일, 비잔티움 군은 만치케르트 인근에서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 1029~1072)이 이끄는 튀르크 군과 마주쳤다. 튀르크군은 수가 적었지만 기동성이 뛰어나고 통일된 지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전투는 비잔티움군의 불리한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황제의 잘못된 판단과 후방을 맡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배신이 겹쳐 비잔티움군은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전투 중 로마노스 4세는 용맹하게 싸웠으나, 결국 셀주크군에게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다.
알프 아르슬란은 로마노스 4세를 예우하여 몸값을 받고 석방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로마노스 4세는 평화 조약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없는 사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이미 두카스 가문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황제의 비극적인 몰락과 최후
로마노스 4세가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자, 두카스 가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노스 4세가 황제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선언하고, 미카엘 7세 두카스를 단독 황제로 옹립했다. 비잔티움 내부의 권력 다툼은 셀주크 튀르크와의 전쟁보다 더 큰 재앙을 초래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려던 로마노스 4세는 이미 정권을 장악한 두카스 가문의 군대에 의해 막혔다. 그는 소아시아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두카스 가문과 세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킬리키아(Cilicia)에서 패배하여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두카스 가문은 그에게 목숨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072년 6월 29일, 로마노스 4세는 두카스 가문의 명령에 의해 잔인하게 두 눈을 잃고 실명했다. 중세 비잔티움에서는 황위를 넘보는 자들에게 행해지던 일반적인 처벌이었다. 심한 고문과 학대 끝에 그는 마르마라해(Sea of Marmara)의 프로테(Prote) 섬에 있는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며칠 뒤 부상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로마노스 4세의 가족과 그들의 운명
로마노스 4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불가리아의 알루시안(Alusian of Bulgaria)의 딸 안나(Anne)였다. 그들 사이에는 최소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
- 콘스탄티노스 디오게네스(Constantine Diogenes): 그는 로마노스 4세 사후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Alexios I Komnenos)의 누이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했으나, 1073년 안티오크(Antioch) 공성전 중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황후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였다. 그들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다.
- 레오 디오게네스(Leo Diogenes, 1069~1087): 로마노스 4세 재위 중 공동 황제가 되었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시대에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1087년 페체네그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 니케포로스 디오게네스(Nikephoros Diogenes, 1069~): 태어날 때부터 공동 황제였다.
로마노스 4세의 자녀들은 그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에도 정치적 격동의 한가운데서 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만치케르트 전투와 로마노스 4세의 유산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군인 황제 중 한 명이었으며, 제국의 군사적 영광을 되찾으려 했던 야심 찬 인물이었다. 그의 만치케르트 전투에서의 패배는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첫째, 아나톨리아 상실의 시작: 만치케르트 전투는 아나톨리아에 대한 비잔티움의 지배권을 심각하게 약화시켰고, 이 지역의 점진적인 튀르크화를 가속화시켰다.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영토가 튀르크 부족들에게 개방되었고, 이는 비잔티움 제국의 경제적, 인구학적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다.
- 둘째, 정치적 혼란의 가속화: 로마노스 4세의 패배와 사망은 비잔티움 내부의 권력 다툼을 더욱 심화시켰다. 두카스 가문과 다른 귀족 가문들 간의 권력 투쟁은 제국을 더욱 약화시켰고, 이는 이후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 셋째, 군사 개혁의 좌절: 로마노스 4세가 추진했던 군사 개혁은 그의 비극적인 최후와 함께 사실상 좌절되었다. 제국의 군대는 만치케르트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이를 재건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비록 그는 만치케르트에서 패배했지만, 로마노스 4세는 제국의 쇠퇴를 막고 군사적 명예를 회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의 비극적인 최후는 제국의 혼란스러운 내부 상황과 군사적 무능력이 겹쳐진 결과였으며, 그 책임이 온전히 그에게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대를 읽지 못한 비극적 영웅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위기를 구하려 했던 비극적인 영웅이었다. 그는 군사적 재능과 열망을 가지고 황제에 올랐지만, 이미 깊어진 제국의 병폐와 내부의 반목은 그 혼자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만치케르트 전투에서의 패배는 단순히 군사적 참사를 넘어, 비잔티움 제국이 오랫동안 지배했던 아나톨리아의 상실을 알리는 서곡이자, 제국의 중심이 점차 유럽 쪽으로 옮겨가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통치는 짧았고 그 끝은 비극적이었지만, 로마노스 4세의 시도는 비잔티움 제국이 여전히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던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의 죽음은 콤네노스 왕조의 등장과 제국의 단기적인 부흥을 위한 필수적인 단계였다고도 볼 수 있다.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의 이야기는 비잔티움 제국의 역동적인 변화와 그 속에서 좌절된 영웅들의 비극을 여실히 보여주는 슬프지만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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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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