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5일 월요일

갈홍기 [葛弘基, 1906~1989] 감리교 목사, 정치인, 외교관

갈홍기 [葛弘基, 1906~1989]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감리교 목사 겸 정치인, 외교관이다. 본관은 남양 갈씨, 호는 상파(想坡). 창씨개명 후의 이름은 가쓰라기 히로키(葛城弘基)이다.


1906
  • 경기도 강화군에 사립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이자 유지인 갈형대(葛亨大)의 아들로 1906414일에 태어났다. [61일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 부친인 갈형대는 애국지사로서, 19258월 인천부 화도예배당에서 위원으로서 하계아동성경학교를 개최하여 아동들에게 동화ㆍ유희ㆍ조선어ㆍ음악ㆍ역사 등을 가르쳤다. 이 때 갈홍기도 교원으로 참여했다. 1928년 중국 동삼성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중국 관헌들로부터 귀화를 강요받는 등 박해를 받는 데에 대한 구제책으로 설립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에 동정금을 기부하는 등 민족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 보인다.
 
1920
  • 1920년대 초 신앙의 아버지 권신일 목사가 화수리에 위치한 화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자, 내리교회를 떠나 화도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그리고 미곡상을 통해 얻은 재산의 일부를 여자 아동을 위한 학교사업에 기부하여 오버먼 선교사가 영화여자보통학교 부속 화도여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 강화 보창학교 재학시절 조봉암과 함께 다녔다고 한다.
  • 갈홍기는 부친을 따라 화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로 하고, 권충일(권신일 목사의 아들)과 함께 청년회 활동을 크게 활성화시켰다.

1925
  • 개신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
  • 연희전문학교 문과대학 문과를 1928년에 졸업하였고, 영화여자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은지 6개월 후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 연희를 졸업한 그해 76일 김관식을 단장으로 한 20여 명의 주일학교 대표단의 일원으로 도미했으나 그의 목적은 유학이었다. 그는 시카고의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개렛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1
  • 6, 개렛신학교를 마친 뒤, 시카고대학 신학과의 박사과정으로 진학하였다.
  • 7, 미국 북감리교는 갈홍기를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파송했고, 19일에 취임식이 있었다. 한승곤 목사에 이어 그는 본 교회 제2대 목사가 되었다. 본 교회 초기 예배자 수가 20여 명이었는데 반대 그 두배가 넘는 평균 50여 명이 매주 예배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목사 사례비는 월 40달러였으나 제대로 지급됐는지는 모른다. 그가 목회하는 동안 김인준과 장세운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박사학위 중에 목사안수를 미국감리교회에서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시카고국제학생협회 중앙집행위원, 시카고 동양인학생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32
  • 아메리카 대한인 유학생총회 회장, 시카고 국제회관 주사를 역임하였다.
  • 731, 시카고한인감리교회 재임
  • 929일자의 신한민보에서 시카고한인감리교회의 갈홍기 목사에 대한 근황을 듣는다.
    시카고한인교회의 목사요 시카고대학에서 사회철학학위를 위하여 연구하며 더욱이 장래 우리 사회의 유망한 혁명청년 중에 하나인 갈홍기씨가 인터네이셔날 하우스에서 사무를 집행하게 되었다. 갈홍기씨의 민첩하고 진정한 활동의 결과 수십인 한인학생들이 국제회관에서 무료로 기숙하게 되었다. 그런 동시에 국제적 회합이 매일이라고 한다. 장래 우리 한인학생에 대하여 특별한 대우가 있으리라고 한다... 특별히 갈홍기씨는 청년목사인 동시에 경제적 불경기로 인하여 물질적 부조를 불고하고 희생적 교역자라고 할 수 있다.”
  • 1023, 박사학위 공부와 국제학생회 업무 등 여러 가지로 분망하여 시카고한인감리교회 목사직을 사면했다. [시카고 한인연합감리교회의 선교수첩에는 19346월까지라고 적혀있어 갈홍기가 담임목사로 사퇴한 후 설교 등으로 교회를 섬겼을 것이다.]

1934
  • 6,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Ph.D)를 받고 귀국하였다.
  • 귀국한 뒤에는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화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1937
  • 1, 인천에서 나온 잡지 월미’(月尾) 창간호엔 ()인천의 인물은 누구?’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여기에선 몇 안되는 인물을 언급하고 있는데(이성원, 김활란, 서은숙), 이중 갈홍기도 나온다.
  • 창영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2년동안 시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창영교회 :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인천 동구 창영동의 영화여자보통학교 부설 영화유치원에서 96명의 신자가 창립 예배를 본 것이 시초이다. 교회 설립의 취지는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겠다였다. 초대 담임목사는 갈홍기가 맡았다. 한국 최초의 여성 목사인 전밀라가 목사 안수를 받고 처음 재직한 곳이기도 하다.
  •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교수직을 상실하였다.

1938
  • 618, 직전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이묘묵(李卯默)을 비롯하여 정영도(鄭英道)ㆍ김여제(金與濟)ㆍ김여식(金麗植)ㆍ전영택(田榮澤)ㆍ류형기(柳瀅基)ㆍ이명혁(李明赫)ㆍ박태화(朴泰華)ㆍ차상달(車相達)ㆍ하경덕(河敬德)ㆍ현제명ㆍ홍난파 등 12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ㆍ김노겸(金魯謙)ㆍ노진설ㆍ이기윤(李基潤)ㆍ최봉칙(崔鳳則) 5인의 동우회원 등 17인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단체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가입하였으며, 818일 위 사람들과 함께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받았다.
  • 1938년 인천 지역에서 조직된 인천기독교연합회 서무를 담당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종교가 연합하여 학병 지원 독려를 위해 조직한 조선전시종교보국회에 감리교 대표로 포함되었고 지방 순회강연을 벌이며 황도기독교의 수립과 전쟁 지원을 역설했다. 대화세계기자를 지냈다.

1939
  • 1, 갈홍기가 전도사라는 직분으로 감리교의 목회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391월에 열린 기독교조선감리회 인천지방회에서였다. 인천지방회 일지는 감리교 성직자의 초기 단계인 연회 준회원 후보자로 천거된 갈홍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5,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년회에 준회원으로 허입되어 인천지방 화도, 영흥구역의 부담임으로 목회하였다.

1941
  • 목사안수를 받고 감리교신학교와 장로교 조선신학원에서 강의하였다.

1943
  • 1943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의 연성국장을 맡아 교단의 지도자급 인물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교단 내에도 황민화 운동 등이 활발히 벌어지던 시기에 이같은 역할을 맡은 갈홍기는 정춘수, 이동욱, 심명섭 등과 함께 감리교단의 대표적인 친일 목회자로 꼽히게 되었다.
  • 116, 전선(全鮮)종교단체협의회가 학병 독려를 위한 조선종교전시보국회를 결성하고 감리교, 구세군, 불교, 장로교, 천도교, 천주교의 대표를 선출할 때 갈홍기는 이동욱 목사와 함께 감리교 대표로 선정됐다.
  • 조선종교전시보국회는 1116~17일 이틀 동안 지방도시를 순회하면서 학병독려 활동을 펼쳤고, 갈홍기는 함흥과 청진에서 강연했다고 한다.

1944
  • 2, 황해지방에서 개최된 감리교 황해교구 주관자 연성회에 정춘수 총리, 이동욱 총무국장 등과 함께 참석하여 황도기독교의 수립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 9월부터는 상동교회가 폐쇄되고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으로 개칭될 때 관장으로 임명되어 교역자들에게 일본 정신과 문화를 가르치는 일에 앞장섰다.

1945
  • 일본기독교 조선교교단의 종교교육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 광복 후 발간된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에서 이같은 행적이 폭로되는 등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난을 받으면서 감리교 일부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1948
  •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잠시 거쳐(숙명여대 문학부장)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공보실장에 임명되었다. 이승만 대통령과는 미국 유학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1951
  • 주일 대표부 참사관, 한일회담 대표를 역임하였다.

1952
  • 2, 4대 외무부차관(19522~ 195210), 중앙선거대책위원, 고등 전형(詮衡)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3
  • 38, 6대 공보처장(195336~ 1955227)에 임명되었다. 이후 공보처장으로 활동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이념적 대변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공보처장 취임사 : “원래는 외무관계 사무에 종사해 온 까닭에 공보행정에 대해서는 지식과 경험이 아울러 불충분하다. 더욱이 조국통일의 궁극목적 달성을 위한 현 성전하에 있어서 공보행정 임무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오직 송구한 생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만 정부의 충실한 대변인이 되는 동시에 국민 제위의 진정한 심부름꾼이 되고자 최대의 노력을 다하고자 하는 바이다”(동아일보, 1953310일자).
  • 당시 이승만은 단독 북진도 불사하는 북진통일론을 내세우고 있었으며 남북 간의 평화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호전적인 입장 때문에 평화회담을 촉구하는 국제사회 일각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갈홍기는 이같은 이승만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했고 사사오입 개헌 때도 사실상 이승만의 종신 대통령직을 보장하는 내용의 개헌을 안보를 핑계삼아 옹호하여 비난을 받았다.

1954
  • 725, 20일간 이승만 대통령을 수행하여 미국을 방문하였다.

1955
  • 6대 공보실장(1955228~ 1956722) 시절인 1955년 저술한 대통령 이승만 박사 약전에서 이승만을 예수나 석가모니와 같은 성인에 비유하며 찬양한 바도 있다.
  • 418일부터 24일까지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열렸을 때 정부대변인 갈홍기는 그 회의가 공산 진영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회의라는 이유에서 한국대표를 보내지 않았다고 하였다.
  • 426, 일본이 친공 정책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 11, 개헌안과 관련하여 갈홍기가 취한 태도[그는 개헌의 불가피성을 안보와 관련시켰다. “정부를 전복하려는 적의 침투계획이 자유 대한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개헌안을 불가피하게 한 것은 즉 이 위협이 있는 까닭이다”]는 야당에게 정치적 공격을 불러 일으켰고, 1213일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 갈홍기 공보처장 파면결의안이 정식 의제로 상정되었다.

1956
  • 월남 이상재 선생 약전집필, 서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고 자신이 이상재 선생을 앙모해서 저술했다고 밝혔다.
  • 4, 국가 공무원이 대통령 선거운동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후보 이승만을 위한 선거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민주당에 의해 선거법 위반으로 제소되었다.
  • 공보실장 직을 물러난 뒤에는 대한농구협회 회장(1956~1957)을 지냈다.

1957
  • 동명학원(東明學園) 이사장을 맡았다.

1967
  • 주 말레이시아 대한민국 대사(1967)

1973
  • 아스팍 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1973) 등을 지냈다.

1981
  • 322, 미국 내쉬빌 한인장로교회가 미국 장로교 트리니티 장로교회로 예배장소를 옮기고 갈홍기 목사의 인도로 첫 예배를 드리다.
  • 726, 미국 장로교 중부 테네시 노회 주관으로 내쉬빌 한인장로교회로 창립예배를 드리고 갈홍기 목사(1대 목사)를 설교 목사로 청빙하다.

1982
  • 33, 내쉬빌 한인장로교회, 갈홍기 목사의 은퇴 및 김철환 목사(2대 목사)의 위임 예배를 드리다.

1989
  •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사망했다.

기타
  • 2005,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인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2005년 선정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에도 들어 있다.
  •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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