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5일 월요일

박순천 [朴順天, 1898~1983] 독립운동가, 교육자, 저술가, 여성운동가, 정치인

박순천 [朴順天, 1898~1983]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며 대한민국의 저술가, 여성운동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본명은 박명련(朴命連)으로 뒤에 순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1960년 박순천으로 정식 개명하였다.


1898
  • 1024(음력 910)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한학자인 박재형의 딸로 태어났다. 한때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07
  • 10세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
  • 12세에 아버지가 기장읍내에 나갔다가 일본인에게 상투가 잘린뒤 모욕당하고 돌아왔는가 하면 기독교 교인이던 어머니가 태극기를 꺼내어 담장아래에 묻으면서 통곡하는 것을 보고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교육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1917
  •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졸업하였고 마산 최초의 여학교였던 의신여학교 교사로 부임, 성경 채플담당 교사와, 생리학 겸 동물학 교사가 되었다. 당시 일인교사는 24원의 월급을 받고 그는 12원의 월급을 받아 일본인 교사와의 차별대우에 항의, 싸우기도 했다.

1919
  • 2월 박명련은 일본에서 귀국, 마산에 체류하고 있던 이갑성과 만나게 된다. 이갑성은 일본 유학생들이 28일 일본 동경에서 28 독립선언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서울에서 3월에 거사 계획이 있을 것임을 알려주고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 31, 31 운동이 각지에서 발생하자, 박순천도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5일 박순천은 많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마산장에 나온 장꾼들에게 나눠 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관헌에게 체포, 신마산에 있는 일본헌병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312일 한석규 목사와 시인 이은상, 이승규 목사(이은상의 아버지) 등의 신원보증을 받고 가석방되었다. 12일 헌병대서는 석방과 동시에 가택수색을 실시했는데 이곳에서 태극기를 비롯 독립선언서와 항거계획, 일기장 등이 발견되자 도주, 다시 쫓기는 몸이 되어 야산으로 산행중 밤중에 30리길을 걸어 칠원에 도착했다.
  • 칠원에서 3개월간 은신했다가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으나 일본 형사들의 눈을 피해 제자인 이수학의 집에 숨어있었다. 그는 마산교회 한석진 목사의 따님인 한소재의 권고로, 경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그를 따라 기생으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출국하는데 성공하였고, 동경 기찌오까 의전에 입학하였다. 그는 평양순의여학교를 나와 동경유학생으로 있던 황신덕(전 중앙여고 재단이사장)을 이때 만나 교분을 쌓았으며, 동경에 가서 그곳 일인하숙집인 상마라는 집에 하숙하던 중, 같은 하숙생이었고 의전에 다니던 변희용을 만나게 되었다.

1920
  • 유학을 위장하여 일본으로 피신했으며 일본 니혼 여자대학교(日本女子大學校) 사회학부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고국인 경상남도 기장에서 하숙 및 학비 등이 송금되어 왔는데 집에서는 본명인 박명련으로 송금한 것이 문제되어 31 운동 참가 경력이 드러나면서 국내로 압송되어 복역했다. 일본 도피 생활 중 사용한 순천댁(順天宅)이라는 별칭에서 박순천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 4월 일본 우씨고매형무소에 수감되자 동경 유학생 총무였던 변희용은 면회 등 성의를 보였으며, 보안사범으로 죄수번호 98번을 부여받고 일본형무소에서 다시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21
  • 14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218월 출감, 고향인 기장의 대변리로 돌아왔다.
  • 출감 후 그는 황신덕과 함께 항공사가 되겠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여성이라는 체력적 약점 때문에 부득이 니혼 여자 전문학교 사회학부 여공보전과에서 유학했다.

1924
  • 1924년 귀국, 1224일 서울 무교동의 태화관에서 변희용과 결혼했다.
  • 이후 시댁인 경북 고령군으로 건너가 농사일을 하면서 마을의 조산부와 대서소를 경영하였다.

1939
  • 1939년 여성 교육에 뜻을 두고 황신덕과 함께 경성가정여숙(현 중앙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경성가정의숙은 이 왕가의 소유 건물이었기 때문에 동경에서 박순천은 이우공을 만나 여학교 설립의 뜻을 밝히고 그의 집을 빌리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그해 1010일 신입생 37명으로 여성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경성가정의숙이 황신덕을 교장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학교가 문을 여는 바로 그때부터 박순천은 해방까지 수년을 교원 또는 부교장 때로는 서무직의 일을 맡아 보며 경성가정의숙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여성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한 경성가정의숙에 참여하면서부터 그 목적과는 반대로 이때부터 박순천의 행적에는 중대한 변호가 생겨났다.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을 위해 여성을 위해 구국 운동에 앞장선 사람이 아니라 이 시절부터 친일 행위에 동조하는 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0
  • 1215, 서울 부민관에서 황도 사상의 실천 보급을 목적으로 결성된 황도 학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이 조직은 발기인으로 각계 인사 46명이 참가한 한인 일인 통합 조직이었다.
    이른바 내선 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였던 이 단체는 첫째 황도 사상의 학습, 둘째 황도 정신의 보급, 셋째 신사참배의 실천과 장려 등을 실천 방책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회원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황도강습회 등을 개최하였다.

1941
  • 114일 이후 매일 2시간씩 주 4일 개강으로 대화숙에서 개최하는 황도 강습회에 참가하는 활동 실적을 남겼다.
  • 1227일부터는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 임전보국단 주최 결전 부인 대회에 연사로 출강하기 시작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1022일 조직된 친일 단체였다. 이 단체는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던 시점에서 전쟁 협력을 목적으로 하였다. 19411227일에 결전 부인대회 등을 개최함으로써 군수자재 헌납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422월부터는 산하단체인 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로 근로 보국 운동을 전개하면서 부녀층을 광범위하게 동원하여 군복수리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박순천은 이러한 임전보국단 사업에 적극 참여 19411227일에는 국방가정이라는 제목으로 1942124일에는 전황뉴스를 듣고라는 제목으로 방송 강연을 했고 급기야 194215일에 조직된 조선 임전보국단 부인대에는 황신덕과 함께 지도위원으로 참가했다.
  •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되었다.

1943
  • 제자를 정신대로 보내다.
  • 19433월경 황신덕 교장이 전교생을 모아놓은 조회에서 우리 학교가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여러분들 중 한 명이라도 정신대에 지원하면 학교가 살수 있을 것이다 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박순천 부교장도 비슷한 말로 호소했지만 지원 학생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되는 교장의 호소에 따라 내 한몸 희생해서 학교를 구하자 라는 생각으로 교장실의 문을 두드린 학생이 있었으니 이분이 바로 김금진 할머니였다. 김 할머니는 199265일자 뉴스메이커 지와의 인터뷰에서 2학년 재학 당시 18세의 나이로 교장, 부교장 말만 믿고 정신대에 나가게 된 동기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를 하고 있다.
    “해방이 되고 내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국어를 가르쳤던 김일순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군요 그때 김 선생님은 경성의숙의 후신이 된 중앙여고를 그만 두고 동아일보 기자로 있었는데 내게 그때 네가 정신대 간다 해도 학교에서 못 가게 했어야 했는데 괜한 아이 병신 만들고 ...... 황신덕과 박순천이 참 몹쓸 짓을 했다. 나라도 몰래 말해 줬어야 했는데 내 책임도 크다. 라며 눈물을 글썽거리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나도 여러모로 알아 봤어요.”
    김 할머니의 이렇게 한맺힌 사연은 5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일제하 정신대 진상 규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겨우 알려지게 되었다.
    경성가정여숙 학생이었다가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지원했던 김금진의 증언을 근거로, 황신덕과 함께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금진이 지원해 근무한 정신대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른 여자 근로 정신대이며, 정신대 지원이 없으면 학교가 폐교된다는 협박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이므로 황신덕과 박순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1945
  • 816,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에 참가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급박하게 맞은 혼란된 해방 정국 속에서도 일제하부터 조직적인 연계를 맺고 싸워왔던 여성 운동가들은 81630여명이 모여 건국부녀동맹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부녀 운동의 막을 열었다. 여기에서 황신덕, 박순천, 유각경, 허하백 ,박승호 등 5명의 전형 위원이 선출되고 17일 발기 총회가 열림으로써 건국부녀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박순천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는데 이것이 그녀를 오늘날의 박순천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 중앙여자중학교 부교장이 되었다.

1946
  • 19451223일 신탁통치안의 발표로 여성 운동계도 들끓게 되었다. 그 첫 움직임은 194611일 우익 여성들의 반탁 결의 대회로 시작되었다. 반탁 운동을 하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운동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결성된 우익 여성 단체가 독립촉성 중앙부인단이었다. 19YWCA에서 창립대회가 있었고 초대 회장에 황기성 부단장에는 박순천이 당선되었다. 이때부터 박순천은 반탁 운동에 앞장섰다.

1947
  • 우익 여성 단체인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1947), 학교법인 추계학원(秋溪學園) 이사를 역임하였다.
  • 52, 부인신문(婦人新聞)을 창간하였다. [625 때문에 창간 3년 만에 중단]

1948
  • 510, 제헌국회의원(종로구갑) 총선에서 낙선하였다. 당시 종로구갑에는 8명의 후보자들이 출마하였는데 조선민주당의 이윤영 후보가 20,497(56.11%)1위를 기록하였고, 박순천은 5,518(15.10%)2위에 머물었다.
  • 815,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감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9
  • 대한부인회 회장, 여성문화연구소 총재,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등을 지냈다.
  • 820,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0
  • 530,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종로구갑)에 당선되었다. 12명 중에 11,251(54.98%)를 득표하여 9,212(45.02%)를 득표한 무소속의 장원영 후보를 물리치고 1위를 기록하였다.
  • 1950년 한국 전쟁 중 피신하지 못했으나 극적으로 납북위기를 모면하였다. 서울이 수복된 후 인민군에 걸려들어 어쩔 수 없이 부역했던 국회의원 3명을 징계하자는 논의가 나왔을 때 박순천은 이렇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국민과 국가의 재산을 하룻밤 사이에 공산도당에게 넘겨주고 도망갔다가 이제 돌아온 사람들이 시민들과 더불어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에게 용서할 사람,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구분하겠다 하니 차라리 (부역) 방송한 3명뿐 아니라 21명을 모두 한꺼번에 징계하라.”

1953
  • 당시 피란 국회에서 박순천이 제안한 간통쌍벌제를 정원 112명 중 찬성 57, 1표 차이로 통과되었다.

1954
  • 520, 3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무소속으로 출마(종로구갑)하여 낙선하였다. 1위는 민주국민당의 윤보선이 9,485(32.35%), 2위는 무소속의 장후영이 4,468(15.23%), 박순천은 4,306(14.68%)를 기록해서 4,271(14.56%)의 주요한을 따돌리고 3위를 기록하였다.
  • 그러나 그해 말에 열린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신당 창당 운동에 동참하였다.

1955
  • 1955년 김성수, 신익희, 윤보선, 장면,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58
  • 52, 4대 국회의원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부산시 동구갑). 박순천은 22,907(59.95%)로 자유당의 김기옥(11,803, 30.89%)을 따돌리고 1위를 기록하였다.

1960
  • 729, 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부산시 동구갑). 당시 박순천은 22,668(57.53%)로 장건상(16,729, 42.46%)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하였다.
  • 812, 4대 대통령 간접선거에서 1표를 얻었다. 315 부정선거에서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이 당선을 포기해 제4대 대통령을 다시 선거해야 했는데, 615일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이 제2공화국 헌법을 공포해 대통령 선거가 간접선거로 바뀌었고 제5대 국회의원 선거로 구성된 국회의 간접 투표로 제4대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 당시 국회의원 재적 의원이 263(민의원의원 220, 참의원의원 43)2/3176표를 득표해야 했다. 이 선거에서 윤보선이 208(79.09%)를 득표하여 1위가 되었고, 2위는 29(11.03%)를 얻은 무소속의 김창숙이었다. 나머지는 1~3표가 나왔는데 1표는 자기가 자기를 찍었을 가능성이 있다.

1961
  • 1961516으로 정치활동정화법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를 당하였다.
  • 516 군사 정변 직후 그는 516이 우발적인 정변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탐욕스러운 군인들의 쿠데타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윤보선 등 민주당 구파 출신이 군사 정변을 방조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러나 군정 측은 군인 세력이 타락한 한민당 계열과 동일한 세력일리 없다며 반박하였다.

1963
  • 2, 정치활동 금지에서 해금되었다. 정치활동 금지에서 풀리면서 그는 1963년 초 민주당 재건위를 조직하여 장면, 오위영, 현석호, 조재천, 김도연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이후 와병중인 장면을 대신하여 구 민주당 신파의 리더가 되어 재건된 민주당의 총재에 추대되었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 322, 윤보선ㆍ변영태ㆍ박순천 등의 재야지도자들은 박정희의 316일 군정연장 선언에 반발하여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열어 군정연장봉쇄를 결의하고 가두데모에 나섰다.
  • 7, 민주당이 창당되자, 총재에 피선되었고, 초기에는 대통령 후보로 나설 의향을 보였으나 야당 후보단일화를 위해 대통령 후보자리는 윤보선에게 양보하였다.
  • 10월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윤보선의 예방을 받았다.
  • 1126,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서울마포구). 박순천은 50,250(67.67%)로 민주공화당 변우창(12,941, 17.42%)을 따돌리고 당선되었다.

1964
  • 1964년 민주당과 민정당이 통합되어 민중당이 설립되자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65
  •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강행하자 윤보선, 함석헌, 장택상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소극적으로 참여하여 윤보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으로 박정희 대통령간 헌정사상 첫 여야 영수회담을 하였다.

1966
  • 91, 직접 베트남 전쟁 때 월남에 가서 파월 장병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함께 동행한 대변인이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 922, 김두한 의원의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당시 김두한 의석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1967
  • 1967년 범야당 통합에 참여하고, 그해 신민당 고문 등 야당의 지도자를 역임했다.
  • 68,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전국구 1번을 받아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지역구 의석이 3, 득표율이 5%를 넘는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에만 득표율에 따라 각각 27석과 17석이 배분되었다.] 여성의원으로 5선까지 한 국회의원은 박근혜, 이미경, 추미애, 김영선 등이다.

1972
  • 1972년 정계를 은퇴하였으며, 근명학교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 나중에 박정희 정권에 호의적으로 변하였는데, 송건호는 그가 박정희에게 붙었다고 비판하였다.

1976
  • 육영수 여사 추모사업회 이사장

1980
  • 2,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1
  • 423,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982
  • 8, 초대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았다가 친일행위 논란이 불거지면서 한달도 못돼서 사퇴하였다. 당시 군부정권은 박순천을 경질하고 후임으로 안중근의 조카인 안춘생을 선임했다.
  • 1229, 고혈압성 신부전증과 뇌졸중으로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입원하였다.

1983
  • 19, 오후 1030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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