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요일

김영옥 [金永玉, 1871~1952] 장로교 목사

김영옥 [金永玉, 1871~1952]

장로교 목사
 
1871
  • 421,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하였다.
 
1888
  •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서울 연동교회 원로목사인 김형태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1888년 너무나 빈한하고 힘든 생활에서 벗어나 보고자 할아버님은 평산 누님 댁에 갔다가 리승만(할아버님 보다 2세 연하) 씨를 만나 상의하고 마침 황해도 장연 솔래(松川) 교회에 미국 선교사가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는데, 이것이 그의 일생을 변화시킨 전환기가 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초대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는 1885년 내한하여 육척 키에 얼굴이 준수하고 말하는 것이 분명하여 총명하게 보이는 할아버님을 보고 예수 믿기를 권유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인재를 알아보고 키울 줄을 아는 안목이 있었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할아버님은 그 때 결신하여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 하와이 이민 대신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부가 될 것을 결정했다.”
 
1893
  • 승동교회가 1893년 모삼열 선교사와 16명의 교인으로 시작되었을 때 모삼열 선교사의 조사로 승동교회 설립에 관여하였다. [이만열 교수는 사적인 자리에서 김영옥이 한국 장로교 최초의 조사일 가능성이 있다고 그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님께 밝혔다고 한다]
  • 모삼열(Samuel. F. Mo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종로 5, 4가 등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 몇 명의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들이 1894년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와 그의 조사인 서상륜과 함께 연지동 초가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연동교회가 시작되었다. 당시 연동교회 조사였던 김영옥의 손자인 김형태 목사가 1967년 연동교회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섬기게 되었다.
 
1898
  • 모삼열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고 개척한 고향인 황해도 백천군 운교(雲橋)교회에서 영수와 장로로 섬겼다.
 
1901
  •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추측된다.
 
1903
  • 9월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였다.
  • 오월번(Arthur G. Welbon) 선교사와 동역하였다. 강원도에서 오월번 선교사와 함께 동역한 김영옥은 철원, 춘천 등지에서 전도하고 철원읍교회를 설립하였다.
 
1904
  • 9월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였다.
 
1905
  • 6, 연천에서 장남 은석이 출생하였다.
 
1906
  • 9월 장로교공의회 경성소회 총대 장로로 참석하였다.
 
1907
  • 철원이 미국 남감리교 선교구역으로 편입이 되면서 철원읍교회는 미국 남감리교로 이관되었기 때문에 같은 해 북장로교 구역으로 이관된 원주읍교회로 이임하여 조사로 교회를 섬겼다. 오늘날 원주제일감리교회인 원주읍교회는 1905415일 미국 남감리교회의 무스(J. R. Moose) 선교사님이 세웠는데 장로교로 관할하에 놓이게 되자 장로교 조사인 김영옥이 이 교회를 섬기게 된 것이다.
  • 9월에 선교사공의회에 의해 연천 사장교회 장로가 되었다. (이때 서상륜도 서울 승동교회 장로로 추천되었으나, 복혼(複婚)을 이유로 안타깝게 장로가 되지 못했다)
 
1909
  • 190911월 강원도 원주가 다시 미국 남감리교 선교구역으로 환원됨으로써 원주를 떠나야 했다. 마침 1908년 장로교선교사 총회에서 안동선교부 신설이 결정됨으롞써 동역하던 오월번 선교사와 함께 안동으로 이사하였다. 그후 김영옥은 조사로서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으며, 19098월 둘째 주일 설립된 안동읍 최초의 교회인 안동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1910
  • 안동교회가 1910년에 첫 번째 예배당을 건축할 때 조사였던 자신에게 선교사가 준 노새를 팔아 건축헌금을 드렸다.
 
1911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4) 그해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 안동교회 두 번째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도 선교사가 선물로 준 가옥을 팔아 헌금하였다.
  • 19119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홍승한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은 김영옥은 안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안동교회의 초대목사(19119~ 19211)인 동시에 경북 북부지방 최초의 한인 목사였다.
 
1919
  • 31운동 당시에는 안동성경학교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동하여 옥고를 치렀다. 그는 안동교회 장로인 이중희, 안동군청 서기인 김원진, 세브란스의전 학생인 김재명, 일본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유학생 강대극과 만세운동을 사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312일 예비검속으로 검거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갖은 협박과 모진 고문에도 3·1운동 계획을 누설하지 않음으로써 안동의 만세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1920
  • 안동기독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21
  • 경안노회를 창립하고 초대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 전국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함으로 청년의 신앙교육과 계몽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22
  • 경산 사월교회에 부임하면서 경북 일대의 장로교 지도자들에게 비밀리에 독립공채모집을 독려하는 한편, 점포나 시장에 독립운동 선전물을 살포하게 하고, 국제회의에 조선 독립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1927
  •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를 담임으로 섬길 때는 19274월 교회 중직자들과 상의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인 신간회를 포항에 설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30
  • 18회 경안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35
  • 28회 경안노회장을 역임하였다.
  • 경안노회 산하에 여러 개의 교회를 새로 설립하였다.
 
1945
  • 해방후에는 정계에 진출하여 미군정 당시 입법위원에 선임되어 건국의 기초작업에 참여하였다.
 
1948
  • 경안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952
  • 별세하였다.
 
기타
  • 그의 가문은 목회자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1대인 김영옥 목사, 2대인 김영옥 목사의 장남인 김은석 목사(1905년 출생), 3대인 김은석 목사의 자녀인 김형칠 목사(1923년 출생), 김형일 목사(1926년 출생), 김형태 목사(1929년 출생,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2회 총회장), 김형달 목사(1931년 출생), 김형숙 목사(1934), 4대 김형규 목사, 김대규 목사 후보생 등 4대에 걸쳐 총 9명의 교역자가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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