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식명 [尹植明, 1870~1957]
장로교 목사
【1870년】
- 11월 17일, 강원도 철원군 고궐리 윤씨 영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894년】
- 4월, 서울에서 노방전도하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 9월, 세례를 받았다.
- 새문안교회 출석하던 중 유진 벨 선교사의 요리사가 되었고, 유진 벨 선교사가 목포와 전남의 기독교를 개척할 때 협력하며 헌신하였다.
【1904년】
- 전라대리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 34세에 김자화(金子化) 씨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1909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제2회).
- 목포 지역에서 선교활동 중이던 해리슨(W. B. Harrison, 河緯廉)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하였다.
【1909년】
- 장로교 독노회의 제3회 노회(평양신학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곧 해리슨 선교사가 담임하고 있던 목포양동교회 동사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다. 당시 양동교회의 신자수는 1천 4백명으로 호남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였고 전국적으로도 네 번째에 해당하는 대교회였다.
- 호남에서 배출한 장로교 목사 3명은 최중진, 김필수, 윤식명이다.
【1910년】
- 양동교회 최초의 위임목사(제7대 담임목사)가 되었고, 1910년에는 현재의 위치(기장측 양동교회)인 양동 127번지 일대를 매입, 864평 대지 위에 건평 121평의 석조예배당을 완공하였다.
- 양동교회 담임목사는 제1대 유진벨 선교사, 제2대 오웬 선교사, 제3대 레이놀즈 선교사, 제4대 유진벨 선교사, 제5대 프레스톤 선교사, 제6대 해리슨 선교사에 이어 첫 한인 목회자가 담임목사가 된 것이다.
【1911년】
- 10월 15일에 윤식명ㆍ김필수ㆍ이기풍 등 한국인 목사가 참가한 가운데 전라대리회를 승격, 전라노회를 창립하였다.
【1913년】
- 제3회 노회를 양동교회에서 개최하였다.
- 이 노회에서 560원에 이르는 제주도선교 헌금이 마련되었고 그동안 총회전도부에서 관장해 오던 제주선교를 전라노회에서 담당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정을 총회는 크게 환영하였고 이에 전라노회는 윤식명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1914년】
- 9월 6일부터 9일까지 황해도 재령읍 남산형교회에서 열린 제3회 장로회 총회에서 “목포양동교회 위임목ᄉᆞ 윤식명 시의 ᄉᆞ면 쳥원을 허락ᄒᆞ고 제쥬로 젼도 보ᄂᆡ기로 경영”한 일과 “쟉년에 보고ᄒᆞᆫ ᄃᆡ로 졔쥬젼도ᄒᆞ는 일은 ᄌᆡ졍을 모집ᄒᆞ엿ᄉᆞ오며 금년브터 본 로회에서 부담ᄒᆞ기로 쟉뎡”하였음을 보고하였다.
- 양동교회를 사임하고 제주도로 출발하였다.
[제주도에 도착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1914년 10월 15일 이전에는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제주 동지방회 회의록에는 1914년 10월 15일 대정지방 목사 윤식명이 전도인 이재순 씨와 함께 성읍리교회예배당에서 추계 세례문답을 실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이미 제주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이기풍 목사는 북부지역을, 그리고 윤 목사는 제주 주민들의 호감을 얻으면서 전도를 확장해 갔으며 그 중에 중문ㆍ용수ㆍ두모ㆍ한림교회 등을 부흥시켰다. 1914년 당시 윤식명의 공식적인 타이틀은 ‘대정지방목사’였다.
- 중문리의 소년 강문호, 강규언을 전북 군산의 영명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가파도 출신 고수선을 기독교에 입교시킨 것도 윤 목사의 영향에서 이룩된 것이다. [제주도 초기 기독교를 개척한 목사로 삼걸을 말할 때 이기풍, 이경필, 윤식명이라고 한다]
【1915년】
- 1915년 모슬포교회 윤식명 목사가 성도 강흥주를 서리집사로 세웠다.
【1916년】
- 김흥수씨가 수원리 549번지 가옥(바깥채 초가 6간)을 예배처소로 헌납하고 순회 전도자 윤식명 목사가 노창수씨를 영수로, 김흥수씨를 서리집사로 임명하고 수원교회(1930년에 한림교회로 명칭 변경)로 발족하였다.
【1917년】
- 전라노회가 전북ㆍ전남노회로 분립될 때 전남노회 초대 부회장이 되었다.
【1918년】
- 9월 2일(음)에 뜻하지 않은 수난을 겪었다.
원용혁ㆍ김진성 등 전도인과 함께 전도여행 중 중문명 하원리에 이르렀을 때 많은 군중이 운집해 있었다. 이때 윤식명 목사 일행은 좋은 전도의 기회로 알고 군중들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이들은 윤 목사 일행을 돌과 몽둥이로 공격하였다. 즉 이들은 보천교(普天敎, 일명 太乙敎) 교도들이었다. 다른 전도인들은 용케 몸을 피했지만 윤 목사와 원용혁은 심한 몰매를 받았다. 중문경찰지서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서귀포 소천(小川)의원에 입원하여 1개월동안 치료를 받았다. 이 와중에서도 윤목사는 경찰에 구속된 폭도들과 마주치자 그들을 용서하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이에 많은 보천교도들이 감화를 받았고 심지어 호송 경찰관도 회개, 신자가 되었다. 윤목사의 수난소식에 접한 육지 교회인들은 선교헌금과 위문금을 모아 보내는 등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윤식명 목사는 폭행당한 후유증이 심해 목포병원으로 옮겨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으나 불행히도 왼쪽팔이 불구가 되고 말았으며 원용혁은 머리의 상처로 인해 탈모, 머리카락이 없게 되었다.
【1919년】
- 제주도 시무 시절 3ㆍ1운동 당시 제주도 유지인 최정식ㆍ김창국ㆍ김정찬 등과 밀의하고 신좌면 조천리를 기점으로 한 운동계획을 세웠다. 그해 3월 24일 조천 장날을 거사일로 시위에 나서서 큰 성과를 거둔 바 있다.
- 5월, 독립군자금 마련 운동을 벌여 일제에 의해 7월에 체포되었다(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20년】
- 9월, 출옥후 조선의 광복을 염원하며 모슬포에 광선의숙을 설립하여 신교육에 매진하였다. [1920년대 초 대정골에서 강문석이 창설한 한남사숙, 가파도에서 김성숙이 설립한 신유의숙과 함께 대정 지방 민족 구국 교육을 실현한 삼대 사숙이라고 통칭하였다]
【1921년】
- 10월 말경, 전북노회로 이명하였다.
- 그는 김제옥산교회(5년), 이리제일교회(8년), 신태인교회(9개월), 김제 대창리교회(3년), 삼례교회(7년) 등에서 시무하였다.
- 김제군 옥산리교회에서도 목회를 하였다.
- 레이놀즈 선교사와 함께 전북의 서북지방에서 활동하였고 김제읍교회에서도 시무하였다.
【1923년】
- 전북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34년】
- 신태인읍교회를 거쳐 군산지방으로 옮겼고 만경교회를 담임하는 한편 동남시찰에 속한 교회의 당회장을 맡아 성례전을 집행, 지교회들을 돌보았다.
【1933년】
- 4월, 모슬포교회 춘기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다.
【1938년】
- 다시 전주지방으로 옮겨 완주군 삼례지방 5개(삼례ㆍ성삼례ㆍ여전ㆍ용연ㆍ덕실)교회를 순회하며 관리하였다.
【1939년】
- 4월 5일, 삼례교회(삼례제일교회)에 부임하였다.
【1941년】
- 5월 5일, 노회로부터 삼례제일교회라고 명칭하였다. 전에는 삼례교회 혹은 삼례서신리교회라고 불렸다.
【1942년】
- 5월, 삼례교회(삼례제일교회)를 사임하였다.
【1943년】
- 73세에 노회에 사임을 표하였다.
【1956년】
- 2월 2일, 86세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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