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8일 수요일

송죽회(松竹會) - 1913년 평양의 여성기독교인들로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단체

송죽회(松竹會)

 
19139, 평양의 여성기독교인들로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 명칭은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대나무의 합칭이며 송죽결사대라고도 하였다. 간부요원들로 구성된 송형제회(松兄弟會)와 일반회원들로 구성된 죽형제회(竹兄弟會)2원체제로 조직되었으며 이 둘을 합쳐 송죽회라 칭하게 되었다.
 
이같은 비밀결사가 이루어지게 된 동기는 숭의여학교 교사 황에스터가 숭의여학교 1회 졸업생으로 숭현여학교 교사였던 김경희 및 같은 교회교인 안정식과 함께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살리는 길로 여성을 중심으로 한 민족자각운동과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 지원운동을 벌일 단체를 조직한데 있었다.
 
여기에 숭의여학교 교사 이효덕이 가담하게 되어 평양에 있는 여학교 및 교회 부인회를 중심으로 회원을 포섭하게 되었다. 목숨을 내건 위험한 운동이었기에 신임할 수 있는 학생과 교회 부인들을 포섭하여 박현숙ㆍ송복신ㆍ최자혜ㆍ김옥석ㆍ홍마태ㆍ서매몰ㆍ박경애ㆍ황선도ㆍ홍마리아ㆍ정애경ㆍ최순덕ㆍ황신덕ㆍ이마태ㆍ최이경ㆍ채광덕ㆍ박치은 등 20여명의 회원이 가입하였다.
 
이중 황에스더ㆍ이효덕ㆍ김경희ㆍ안정석ㆍ박현숙ㆍ송복신ㆍ최자혜ㆍ박경애ㆍ김옥석ㆍ황성도ㆍ홍마태ㆍ홍마리아ㆍ서매몰 등 창립회원이었던 사람들을 송형제회라 칭하게 되었고, 그 외에 주로 학생들이지만 나이가 어리고 장차 송형제회에 들어가 크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을 죽형제회라 칭하게되었는데, 죽형제회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송형제회의 찬동을 받아야만 했다.
 
외부에 비밀을 감추기 위해 회원들의 이름이 암호로 사용되었는데 황애덕이 원죽’(源竹), 박현숙이 청해’(靑海)로 불린 것이 그 예이다. 그리고 회원들은 매달 15일 정기집회를 갖고 1개월에 30전씩 회비를 납부하였으며 회원들은 회비를 마련키 위해 수ㆍ편물ㆍ떡장수는 물론 머리까지 잘라 팔 정도였다. 이렇게 모아진 자금은 만주ㆍ북경 등지에서 활약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내졌고 밀입국해서 활약하는 독립운동가들의 국내활동비를 보조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송형제회는 특히 각 교회 부인회에 침투하여 여권운동ㆍ여성계몽운동을 벌여 간접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였고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회원들은 지방으로 흩어져 이와 유사한 독립운동 단체를 지방에서도 조직하였다. 박현숙이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공주회(公主會)를 조직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1916년에 이르러 송죽회는 지방조직에 착수할 수 있었다. 당시 각 지방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 전주 박현숙
  • 평양 황신덕
  • 황주 채광덕
  • 목포 최자혜
  • 사리원 박경애
  • 부산 서매몰
  • 강서 이마태
  • 해주 정애경
  • 선천 김옥석
  • 한천 최의경
  • 남포 최매지
  • 제주 서매몰(겸임)
 
창립 초기 회장으로 김경희가 수고하였고 후임으로 황에스더가 담당하다가 그가 은사 홀(R. S. Hall) 부인의 권고로 의학 공부하러 일본에 유학함으로 1917년부터 다시 모교로 돌아온 박현숙이 회장이 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이미 송죽회 회원들은 토오쿄오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고 귀국한 황에스더와 상해의 김순애(김규식의 부인)로부터 만세운동 준비사항을 보고받은 김경희를 통해 31운동 계획을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이 교회 내에 어느정도 알려지게 되면서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인 신홍식 목사는 회장인 박현숙에게 31운동에 적극 참여해 달라는 부탁까지 하게 되었다.
 
31운동 준비를 위해 송죽회 회원들이 할 일은 우선 일본인 교사들의 눈을 피해 태극기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장성심ㆍ권기옥ㆍ김순복ㆍ김옥석ㆍ한선부ㆍ김명덕ㆍ차진희ㆍ박정인ㆍ최순덕 등 10여 명의 회원들이 숭의여학교 미술교사 작업실에서 제작한 태극기는 회원들의 손에 의해 숭덕학교 지하실로 옮겨졌고 이것은 31일 평양 만세시위 군중들에게 나눠져 사용되었다. 그리고 송죽회 회원들은 혈성가를 부르며 만세 시위 선두에 서서 적극 참여하였고 이에 따른 희생도 많아 회장 박현숙을 비롯하여 황에스더ㆍ김옥석ㆍ권기옥 등이 일경에 체포되어 수난을 받았다.
 
31운동으로 송죽회의 활동은 사실상 마감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지도급 인물들의 투옥ㆍ사망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보다 큰 이유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같은 보다 규모가 큰 여성 독립운동 단체로 송죽회 회원들이 흡수된 때문이었다. 19198월 출옥한 황에스더ㆍ박현숙 등은 동지 안정석ㆍ김경희ㆍ김마리아와 함께 기존의 대조선독립 애국부인회의 조직을 정비하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지금보다는 훨씬 노골적이고도 규모가 큰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들은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모두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3 · 1운동 이후 임시정부요원으로 활약하다가 1920년에 죽은 초대회장 김경희에 대한 임시정부의 추도사에 의하면, 이 회에서 독립운동자금으로 저축한 금액이 600여 원에 달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이 회가 얼마나 착실하게 운영, 발전해갔는가를 알 수 있다. 김경희는 1916년 배일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폐병을 얻었다.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31 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넘어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다.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애국부인회를 결성하며 활발히 활동하다가 1920년 병사하였다.
 
비록 7년이라는 짧은 기간의 활동이었지만 송죽회는 한국 근대 여성운동사, 특히 기독교인들이 중심된 항일 결사단체로서 민족운동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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