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학교(崇實大學校)】
【1897년】
- 숭실대학교는 1897년 10월 1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裵緯良, W. M. Baird)이 평안남도 평양 신양리에 있던 자택에서 13명의 학생을 데리고 학당을 개설한 것이 그 시초이다.
【1901년】
- 1901년에 선교사 소안론(蘇安論)의 기금으로 한식 기와로 된 2층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고, 당시 한문 교사였던 박자중(朴子重)에 의해 숭실학당(崇實學堂)으로 명명되었다.
【1906년】
- 그 뒤 교육열의 고조로 고등교육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1906년 10월 대학부를 설치하고 중학부는 숭실중학교, 대학부는 숭실대학이라 명하였다. 한국 대학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1906년 감리교 선교부가 대학 운영에 참가하면서 합성숭실대학(Union Christian College)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08년】
- 12명의 학생이 입학하여 1908년 대학부 제1회 졸업생 2명을 배출하였다.
【1910년】
1910년에는 재학생 수가 54명으로 증가되었다.
【1912년】
- 1912년 숭실대학으로 조선총독부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1925년】
- 1925년 일제의 「전문학교규칙」에 의하여 4년제 문과만으로 편성된 숭실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1930년대】
- 1930년대 중반부터 계속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함에 따라 평양의 숭실전문학교ㆍ숭실중학교ㆍ숭의고등여학교 등 3숭(崇)의 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사회 각계에서 이들 학교의 존속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무산되어, 1938년 3월 마지막 졸업생 443명을 배출하고 숭실중학교 및 숭의고등여학교와 함께 자진 폐교하였다.
【1953년】
- 그 뒤 광복과 함께 졸업생을 중심으로 학교의 재건을 추진, 1953년 12월 숭실대학 재건 기성회가 결성된 데 이어 숭실대학재단 이사회가 조직되었다.
【1954년】
- 1954년 4월 설립인가를 받고 이듬해 5월 10일 영락교회의 부속건물을 임시교사로 해서 폐교된 지 16년 만에 다시 개교하였으며, 초대 학장에 한경직(韓景職) 목사가 취임하였다.
【1957년】
- 1957년 6월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71년】
-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1956년에 설립한 대전대학(大田大學)과 1971년 1월 통합하여 숭전대학(崇田大學)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같은 해 12월 종합대학교인 숭실대학교로 개편하여 초대 총장에 김형남(金瀅楠)이 취임하였다.
【숭실의 의미】
- 교명인 ‘숭실’은 ‘실(實)’을 숭상한다는 뜻으로, 진리의 탐구와 인격수련을 함께 완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기독교정신과 민주교육의 근본이념에 입각하여 심오한 학술적 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가르쳐 인류의 번영과 국가, 사회 및 교회에 봉사할 지도자적 인재 양성을 교육목적으로 하고 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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