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8일 수요일

김희준(金熙俊, 1869-1946) - 성공회 한국인 첫 사제

김희준(金熙俊, 1869-1946)

 
성공회 한국인 첫 사제.
 

1869
 
  • 18691222일 강화에서 아버지는 김석구(金錫龜)와 어머니는 주씨(朱氏)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897
 
  • 상업(商業)에 종사하다가 1897117일 인천 성미가엘성당에서 영세와 견진을 받고 성공회 신도가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898
 
  • 통진에 사는 배인옥의 2녀 배안나(裵安羅, 18771130일생)와 결혼하였다.
  • 1115, 장녀 김루시(金縷是)가 강화에서 출생했다.
 
1899
 
  • 강화읍성당 건축시 조마가신부를 도와 공사감독을 맡았다.
 
1901
 
  • 11, 전도사로 강화도 일대를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1906
 
  • 17, 장남 김연성(金淵晟)이 출생하였다.
 
1908
 
  • 2월에는 황해도 백천교회 전도사로 가서 진명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10
 
  • 322, 차남 김연화(金淵和)가 출생하였다.
 
1913
 
  • 113, 차녀인 김유시(金有時)가 출생하였다.
 
1914
 
  • 1월 강화 미가엘수도원에 입학(入學)하여 사제(司祭)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 67일 부제(副祭)서품을 받고 진천교회에서 시무했는데, ()인 배안나(裵安羅)가 소천하였다. 그러자 맏딸인 루시가 서울에서의 학업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성업(聖業)을 돕기 시작했다.
 
1915
 
  • 1221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음성교회에서 시무했다.
 
1918
 
  • 429일에는 진천교회 관할사제가 되었다.
 
1923
 
  • 221일 온수리교회 관할사제로 옮겼다.
  • 10월 충남 천안 부대리교회 관할사제가 되었다.
 
1925
 
  • 5월 강화읍교회 관할사제로 강화에 돌아와서 고향의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1933
 
  • 장녀인 김루시(金縷是)1933222일 세상을 떠났다.
 
1934
 
  • 1934101일 관할사제직을 그만두고 강화북부전도구 보좌사제로 석포리교회를 담당하였다.
 
1938
 
  • 630일 고령(高齡)으로 은퇴(隱退)했다.
 
1946
 
  • 51177세를 일기로 별세(別世)했다.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Auckland韓人監理敎會) - 1914년 6월 5일 설립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Auckland韓人監理敎會)

 
19146월 오클랜드지역 한인들이 설립한 한인감리교회. 기독교 신앙을 증진해 한인들 간의 단결과 우의를 도모하고 공동의 힘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14
 
  • 65일 오클랜드 지방에 거주하던 문원칠과 조성학의 주선으로 문원칠의 상점에서 남감리교 순행 목사 황사용을 청하여 예배를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 문원칠은 당시 웹스터가(Webster Street)7가와 8가 사이에 작은 식료품상을 하고 있었는데, 개인집이 딸린 이 상점에서 첫 예배를 시작하였다. 초대 목사는 황사용 목사이고 출석 교인은 8명이었다.
 
1917
 
  • 1917810일 예배처소를 조성학의 집으로 이전하고, 안젤모신학교에서 공부한 임정구(1887년생, 1911년 포모나대학 입학 후 버클리대로 편입)2대 교역자로 청빙하였다.
 
1922
 
  • 1922년 당시 20여 명의 교인이 있었고, 그 해 28일 임정구의 집으로 예배당을 이전하였다.
  • 2대 담임목사 임정구는 19271930년 퍼시픽신학교(Pacific School of Religion)에서 학사와 석사를 받았는데, 1929년 미 감리교단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임정구는 1939122354세로 별세할 때까지 22년간을 한 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교회의 기반을 닦았다.
  • 그후 오클랜드교회는 남감리교단 소속의 정식 교회로 인정받았다.
 
1938
 
  • 19381220일 처음으로 자체 건물을 마련해 헌당식을 가졌다.
 
1942
 
  • 1942년 해리슨가(Harrison Street) 520번지로 이전하였다.
 
1951
 
  • 도로 확장으로 헐리게 되면서, 1951430일 맥아더거리(McArther Boulevard) 359번지로 다시 이전하였다.
  • 해방 이전까지 교인수는 적게는 12명에서 많게는 70여 명에 달했다. 195060년대에는 한 때 교회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교인수가 크게 줄었다.
 
1973
 
  • 1973년 김광진 목사 부임 이후부터 부흥되었다.
  • 지금은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Oakland Korean United Metho. Church)라는 이름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교역자로 활동한 인물은 해방 이전까지 황사용, 임정구, 노신태, 장기형, 박용학, 이진묵, 김태묵, 임두화 등이고 해방 이후부터 김창수, 김광진, 김종원, 김현일, 김무열, 이강원 등이다.
 
[참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장하 [李章夏, 1886-?] 성결교 최초 목사, 찬송가 번역

이장하(李章夏, 1886-?)

 
성결교 목사. 평북 의주 출생.
 
1886
 
  • 평북 주읍에서 출생하였다.
 
1906
 
  •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1906년 동양선교회가 경영하는 토오쿄오성서학원에 입학하여 신학을 수학하였다.
 
1907
 
  • 일본에 유학하여 홀리네스교단의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이장하는, 재학 중 일본 찬송가구원의 노래(いの, 1894)福音唱歌, 1901를 번역하여 1907년에 복음가란 이름으로 서울에서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성결교의 최초 찬송가다. 21세기 찬송가284,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 이장하 목사가 일본 찬송가에서 번역한 대부분은 중역(重譯)이긴 하나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40),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86), ‘슬픈 마음 있는 사람’(91), ‘갈보리 산 위에’(150), ‘신랑 되신 예수께서’(175),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235), ‘황무지가 장미꽃같이’(242), ‘저 요단강 건너편에’(243),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257),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259), ‘주의 피로 이룬 샘물’(266),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288), ‘하나님은 외아들을’(294), ‘지금까지 지내 온 것’(301), ‘예수 나를 오라 하네’(324), ‘마귀들과 싸울지라’(348),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358),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359), ‘행군 나팔 소리에’(360), ‘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365), ‘나 캄캄한 밤 죄의 길에’(381), ‘주와 같이 길 가는 것’(430),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445), ‘구원으로 인도하는’(52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545),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546), ‘넓은 들에 익은 곡식’(589) 등 우리 찬송가에 무려 42편이나 들어 있다.
 
1908
 
  • 4, 토오쿄오성서학원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였다.
  • 경성복음전도관(현 중앙성결교회) 전도사로 김상준 전도사를 도와 동역하면서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의 통역을 맡았다.
 
1911
 
  • 동양선교회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 사감 및 교수직에 취임하였다.
 
1914
 
  • 김상준ㆍ강태온ㆍ이명직ㆍ이명헌 등과 동양선교회(현 성결교회) 최초 목사로 안수받았다.
  • 531, 토마스 선교사와 이장하 목사가 은산지회(현 은산성결교회)를 설립하다.
 
1918
 
  • 320, 토마스 감독, 이장하 목사, 정달성 전도사가 옥녀봉에서 일경에게 구타당함
 
1920
 
  • 계속 성서학원 교수로 봉직하다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19204월 성서학원 여자부 사감 최홍은과 함께 면직 출교당했다. [이 연애사건은 매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해외로 떠났다는 말이 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강경성결교회 홈페이지, 규암성결교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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