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8일 일요일

[한국전쟁] 함평 주민 524명 학살 사건(1950년 12월 초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그리고 북으로 진격해 올라갔을 때,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들이 남한 곳곳, 특히 지리산과 불갑산 등지에서 빨치산 투쟁을 벌임에 따라 애꿎은 민간인들이 이 전쟁에 휘말려들어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전남 함평 지역에서 국군에 의한 대량학살 사건 일어남

 
1117일 공비 토벌 작전을 하던 국군이 전북 남원 강석리 마을을 습격하여 마을 주민 90여 명을 학살한 사건에 이어, 12월 초순에는 전남 함평 지역에서 국군에 의한 대량학살 사건이 저질러졌다.
 
122, 함평 지역에서 빨치산 소탕 작전을 펼치고 있던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소속 사병 두 명이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5중대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을 제물로 삼아 보복을 했다. 군인들은 126일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에서 2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인근 동촌마을에서는 30여 명을 사살했다. 127일에는 월야면 월악리 내동, 송계, 동산 등 7개 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12-13세 가량의 어린 아이들을 시켜 집집마다 불을 지르게 하고 주민 700여 명을 동산 마을의 남산뫼에 집결시켰다.
 

학살극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증언

 
여기서 벌어진 학살극에서 살아남은 한 생존자의 증언이다.
 
한참 뒤 인솔 장교는 살아 남은 사람은 하나님이 돌봐주신 것이니 모두 살려주겠다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듣고 50여 명이 일어났다. 그러자 장교는 다시 사격 명령을 내렸다. 장교는 이번에 살아 남은 사람은 진짜 하느님이 돌봐주신 것이니 빨리 동네에 가서 불을 꺼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10여 명이 일어나 동네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자 그들의 등을 향해 다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여덟 차례 걸쳐 524명을 학살함

 
5중대 군인들은 129일 월야면 외치리 외치마을에서 각 세대 장남 18명을, 나산면 이문리 사정마을에서 주민 10여 명을 죽였다. 이어 1231일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에서 60여 명, 51112일 해보면 쌍곡리 쌍구룡에서 70여 명, 114일 나산면 우치리 소재 마을에서 노약자 36명 등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454동을 불태웠다.
 

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내놓은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

 
권복기는 민간인 대량학살에 대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내놓은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 개념이 그것이다. 견벽청야는 중국 한나라 때 변경 지역 방어를 위해 사용된 전술 개념으로 성밖을 말끔하게 치워버리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적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전략 거점은 성벽을 쌓듯이 안전하게 확보하되 적이 이용할 만한 지역은 소각 등으로 파괴하는 작전이다. 초토화 작전과 비슷하다. 이 작전은 함평 사건이 난 뒤 60여 일 뒤 거창에서도 쓰였다. 거창에도 최덕신의 11사단 병력이 투입됐다. 당시 9연대는 예하 대대에, 작전지역 내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할 경우 소각하라는 세 가지 지침을 내렸다. 여기에다 군 지휘부에서 각 부대에 내린 것으로 보이는, ‘하루에 공비 50명 이상 사살, 무기 50점 이상 노획이라는 목표가 군인들에게 민간인 학살이라는 손쉬운 전과를 택하도록 했을 가능성도 큰 것으로 보인다.”
 

견벽청야 작전, 장개석의 패배 요인

 
견벽청야는 중국의 하승천이 쓴 안변론에 나오는 말로 성 밖을 말끔하게 치워버리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적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 현대에서 이 작전 개념을 가장 광범위하게 적용했던 사람은 장개석이었다.
 
장개석의 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모택동은 우리는 인민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며 물과 물고기의 관계에 빗댄 수어(水魚)이론을 제창했다. 그는 공산주의 운동은 인민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물 속의 물고기 신세와 같다는 이론을 내세워 당원들로 하여금 인민을 괴롭히는 식량ㆍ금품 요구를 금지시키고 위반자는 처형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 반면 장개석의 견벽청야는 인민의 원성을 사 패배를 초래하고 말았다.
 

나산면장 이오섭의 개입

 
실제로 견벽청야는 제11사단 작전명령 5호였다. 나산면장 이오섭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을 것이다. 5중대장인 대위 권준옥은 40일 넘게 계속된 초토화 작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기등등했다. 1951114일 나산면장 이오섭은 함평경찰서 나산지서장 나병오를 설득해 같이 권준옥을 찾아가 항의했다. 권준옥은 권총을 빼들고 건방진 자식, 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오섭이 물러서지 않자 권준옥과 그의 부하들은 이오섭을 군화발과 주먹으로 몰매를 가했고, 동행한 나병오의 권총을 빼앗아 버렸다. 그러나 이 장면을 본 20연대장이 무언가 깨달은 바 있어 불갑산 주변의 다른 마을들을 초토화시킬 계획을 중단케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 16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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