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8일 일요일

[한국전쟁]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의 부임(1950년 12월)이후 전황

19501223일 의정부 부근에서 지프차가 전복되는 사고로 사망한 미 8군사령관 워커의 후임으로 미 육군 행정 및 작전 참모부장인 중장 매튜 리지웨이가 부임했다. [중국 자료는 미군과 남한의 기록과는 달리 워커가 연천 지구에서 북한군 유격대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리지웨이는 미국의 최정예 제82공수사단장으로서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부대원들과 함께 직접 낙하하여 싸운 전형적인 야전 군인이었다.
 

리지웨이가 본 한국군의 수준

 
리지웨이는 한국군의 수준에 경악했다. 그는 업무를 이어받기 위해 가던 중 목격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새해 아침 나는 서울 북방으로 차를 타고 가다가 다음과 같은 경악스런 장면을 목격하였다. 트럭을 탄 남한군이 지휘관도 무기도 없이 후퇴 명령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 그들에게는 단 하나의 목적 즉 중공군으로부터 될 수 있는 한 멀리 도망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들은 장총과 권총을 내던졌고 대포, 박격포, 기관총과 수송차량 모두 내버렸다.”
 
몇 개월 후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도 미 의회에 남한 군인들은 중국군과 전투할 때마다 순전히 도망치기에 바쁘다고 보고했더.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도 같은 의회 청문회에서 남한군이 11개월동안 전투에 10개 사단 병력의 장비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원자폭탄 사용을 주장한 맥아더

 
맥아더는 이미 12월부터 원자폭탄 사용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투하할 원자폭탄의 수까지 계산해 놓고 있었다. 모두 26개였다. 맥아더는 501230, 중국 본토 폭격을 워싱턴의 합참에 요청했다. 맥아더의 기본 구상은 중국 공격을 통한 확전이었다.
 
리지웨이의 회고에 따르면,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자신의 무오류성에 대해 거의 미신적이라고 할 정도의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맥아더의 문제점은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하여 공산 세력을 궤멸시키고 아시아에서 소련과의 냉전 대결을 완전히 종결지어야 한다고 믿었던 데 있었다.”
 

중국과의 확전을 두려워한 미국

 
맥아더가 5081일 대만에서 가진 장개석과의 회담도 그 점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50630일 장개석이 33천명의 정예 부대를 한국에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미국에 표명했을 때 미국은 중국의 대만 침공과 중국과의 확전을 두려워해 그 지원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대만군의 파병에 찬성했던 맥아더는 여전히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회담을 가졌던 것이다.
 
맥아더는 만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걸 재촉한 것이다. 113일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친서를 보내 전쟁은 한반도 내에 국한시켜야 하며, 38도선에서 휴전 협의를 시도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미 8군을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반도에서의 철수까지 대비한 극동군사령부

 
이미 극동군사령부는 한반도에서의 전면 철수에 대비한 한국 정부 피난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19일에 작성된 극동사령부의 1급 비밀보고서는 한반도 철수 및 한국 고위 인사를 포함한 요인들의 소개 계획을 소개 인원 수까지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다. 이 소개 계획에 따르면 한국 정부 관료 및 주요 인사 100만 명을 제주도로 소개시키는 대규모 소개와 주요 인사 2만 명만 선정해 제주도가 아닌 해외 지역으로 소개시키는 제한 소개의 두 방법이 검토되었다. 한국군 병력을 오키나와로 이전시키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고, 200명의 한국 망명정부 요인을 하와이나 미 영토 내의 기타 지역으로 망명시키는 계획도 입안되어 있었다.
 

패배주의의 극복을 위한 노력

 
리지웨이는 패배주의의 극복을 위하여 이승만에게까지 각하가 한국군을 통솔할 만한 지도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국군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이승만으로 하여금 일선을 방문해 지휘관들을 직접 독려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승만은 리지웨이의 요청에 자주 일선 방문을 해야만 했다.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승만이 난방도 돼있지 않은 비행기에서 벌벌 떠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몰살작전’(킬러작전)을 도입한 리지웨이

 
또한 리지웨이는 영토 확보를 위주로 하는 기존의 전투 형태에서 상대편 병력을 최대한 살상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이른바 몰살작전’(킬러작전)을 전격 도입하였다.
 
리지웨이의 몰살작전은 오직 승리만을 생각하면 효과적인 작전임에 틀림없으나 이는 한국인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건 물론 민간인 몰살까지 초래하는 매우 잔인한 수법의 작전이었다.
 
한국인들이, 공산당이 그들의 고향과 학교를 세워둔 채로 퇴각한 반면, 파괴적인 무기로 싸우는 유엔군이 일단 주둔했던 도시는 까맣게 하고(초토화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을 때 공산당은 심지어 퇴각 중에도 도덕적인 승리를 기록했다.”
 
리지웨이와 미군에게 필요한 건 도덕적인 승리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도덕을 무시한 덕을 보았겠지만, 리지웨이의 새로운 작전은 효과를 거두어 51년 봄부터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고통받는 중국군

 
전세의 역전에는 북한군과 중국군이 물자 부족, 굶주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중국군은 공중 정찰 때문에 불을 피우기 어려워 더운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특히 소화기 계통 전염병에 시달렸다... 51년 초 중국 본토에서 수천명의 전염병이 쓰러지자 인도는 구호에 필요한 의약품과 의료진을 원조하기로 했다. 중국 정부는 노르웨이 화물선을 전세내 운반하고자 하였다. CIA는 이걸 알고 그 의약품이 중국군의 치료에 쓰일까봐 중간에서 배를 나포하여 의약품을 강탈했다. 그 강탈은 중국 해적으로 위장한 미국측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제1, 19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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