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4일 일요일

천도교 유망주였던 이용구의 친일 변신

친일파라 하면 우리는 무조건 비난할 준비가 된 상태로 접근한다. 이용구(이상옥)라는 사람도 동학(천도교) 출신으로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선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상식만 갖고 무작정 돌멩이부터 던지려고 한다. (일단 아래의 사진을 보면 친일파를 연상하는 수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돌멩이를 던지더라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고서 던졌으면 좋겠다.
 
=-=-=-=-=-=-=-=-=
 
이용구 - 초기 친일 부역배
 
북접의 농민군은 남접의 농민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해 109일 논산에 집결한 뒤 공주전투를 벌였다. 이상옥은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의 지휘자로 충청감영의 뒷산인 봉황산전투에 나섰다. 한나절 동안 접전을 벌인 끝에 이상옥은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는 북접군 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투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논산으로 물러나 있다가 손병희의 주력부대와 행동을 같이해 태인까지 간 다음 임실에서 최시형을 만나 북실전투에서 패전한 뒤 충주까지 동행했다. 그뒤에 그는 충주에서 일단 최시형, 손병희와 헤어졌다.
 
여기서 이상옥의 행적에 유의해둘 필요가 있다. 그가 몸을 피해다니는 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는 바위굴에서 해산했으나 미역국은커녕 사흘 동안 밥까지 굶었다. 그의 어머니는 동네를 다니며 밥을 빌어와 산모를 먹였다. 그가 수원 땅에 속하는 독포도라는 섬에 숨어 지낼 때 그의 아내는 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18957월 이상옥은 홍천에 숨어 있는 최시형을 다시 만났다. 그러고 나서 끝없이 잠행하며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포교에 전념했다.
 
1898년 이상옥은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위해 어머니를 찾아왔다가 잡혀 이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 최시형의 소재를 대라는 모진 추궁을 당했지만 왼쪽 다리뼈가 부러지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동철(銅鐵)은 비록 굳으나 단련하지 않으면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없고 송백은 비록 굳세나 눈서리가 아니면 높은 절개를 알지 못한다”(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라고 말했다 한다.
 
이상옥은 넉 달 만에 풀려났으나 1898년 최시형이 원주에서 잡힐 때 다시 잡혔다. 그는 경성 감옥에 끌려가 또다시 다리가 부러지는 고문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이 감옥을 부수고 구출해 다시 살아남았다.
 
1901년 손병희가 일본에 갈 때 함께 따라갔고 그뒤 세 차례에 걸쳐 도쿄를 왕래했다. 이때 손병희는 그에게 동학 재건의 소임을 맡기고 또 중립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상옥을 데리고 미국을 유람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이상옥은 중립회를 진보회로 개칭했고 진보회는 다시 일진회로 통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이루어질 때 이상옥은 송병준과 함께 대한의 일본 보호를 외쳤다. 이때 그의 이름은 이상옥에서 이용구로 바뀌어 있었다. 이용구는 일본을 오가면서 일본 군부의 끄나풀이 되었고 또 송병준의 유인에 빠졌다.
 
보호국 문제는 손병희의 반대에 부딪혔고 또 일진회 회원의 탈퇴 소동이 벌어졌다. “역적 이용구라는 구호가 온 나라에 걸쳐 메아리쳤으나 그는 끄떡도 않았다. 끝내 이용구가 일진회를 친일행동대로 밀고 나가자 손병희는 어쩔 수 없이 1906년 이용구 등 62명을 천도교에서 출교 처분했다. 이에 가만히 있을 이용구가 아니었다. 그는 친일 세력을 이끌고 새로이 시천교를 창도해 동학의 정통을 이었다고 떠벌렸다. 여기에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1907년 내각에 여러 차례 건의한 끝에 이용구가 교조 최제우와 최시형을 신원한 일이다. 교조 신원이 농민군 봉기의 한 원인이었는데, 그의 노력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최제우의 초상을 유명한 화가 안중식에게 그리게 한 뒤 교당에 걸어놓고 받들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용구는 190912월 일본 천황과 각계에 ‘100만 일진회 회원이름으로 합방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합방에 앞장섰다. 합방 뒤 일본이 이용구에게 작위를 주려 했지만 그들이 약속을 어겼다고 하여 거절했다. 또 그는 일본이 양반-상놈의 신분 차별을 없애는 일을 완성해주면 합방해도 좋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계급투쟁 같은 이론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처지를 절감해 이런 주장을 폈던 것이다. 이용구는 1911년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는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용구가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아버지를 따라갔다. 이용구가 죽자 일본의 극우인사 다케다 한시가 관계하는 나고야의 조동종절에서 자랐다. 다케다 한시는 이 종파에 소속된 승려로 한일합병 당시 일진회 등과 접촉하며 합병을 부추긴 인물이었다. 이석규의 일본 이름은 오히가시 구니오(大東國男)인데, ‘대동국’(大東國)은 일본, 조선, 만주, 몽고가 동이족의 한 나라를 건설하자는 뜻의 우익 용어다. 그는 이송학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시대 동안 다이토주쿠(大東塾)라는 우익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한일수교 전에는 일한회담촉진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한일수교 뒤에는 몇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석규는 1960년에 이용구의 생애라는 책을 써서 아버지의 삶을 변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선린우호의 초일념을 관철한다는 부제를 붙인 이 책에서 그는 이용구는 훌륭하다. 선린우호의 차원에서 일본과 조선의 대등한 합방을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의 일부 정치권력자에게 속아 나라를 병합당했을 뿐이다. 그는 매국노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석규는 일본 여자와 결혼해 딸 하나만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부창자수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이화,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3, 교유서가, 2020, 58-62
 
=-=-=-=-=-=-=
 
역사시간에 일진회 친일파 이용구라는 이름만 외우는데 익숙했고, 정작 그가 어떤 삶의 굴곡을 지내왔는지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름 친일전까지는 자신의 신념에 열정을 바친 모습을 보여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번이나 잡혀서 다리가 부러지는 고문을 받는 것은 일반인으로는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혹독한 시련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이용구는 어찌 보면 동학(천도교)의 핵심이자 유망주였다고 볼 수 있다)

이용구는 왜 갑자기 친일로 변절했을까? 
 
아쉬운 것은 을사늑약 이후 강제병합 이전까지 사회의 분위기가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한 사람이 역사의 흐름을 온 몸으로 막아서 바꿀 수 없다는 패배감 속에서 (어차피 친일을 하려면) 남들보다 더 철저하게 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좀더 이용구에 대한 자료를 많이 찾아보지 않아서 섯부른 판단일 수 있겠지만, 친일을 한 댓가는 너무도 초라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은 친일의 댓가로 엄청난 부를 누렸는데, 이용구는 강제병합 이후 댓가를 받거나 누릴 새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그는 스스로 치밀한 미래의 계획을 염두에 두고 친일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돌진하는 무댓보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지금 자신의 처한 현실에 대해 진지한 고민 없이 일단 옳다고 생각한 것에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를 외치는 사람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무식한 친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참 용감한 사람들이 많다. 머리는 장식이 아닌데...
 
한 가지 새롭게 얻은 사실은 그가 동학의 교주인 최제우와 최시형의 신원 회복을 위해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아들 이석규가 쓴 아버지의 전기의 변명(?)은 이후 친일파들이 자주 써먹는 논리가 되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