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30일 토요일

1987년, 서정주의 전두환 축시 「처음으로」

1980년 광주 학살의 원흉! 전두환을 구국의 위인으로 찬양했던 서정주1987년 전두환 56회 생일에 축시 처음으로를 낭독하면서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인물로 극찬합니다.

1985년의 미당 서정주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 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88 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얻으셨나니
 
이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
 
무릇 시는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삶이 들어 있지 않은 시를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순수문학, 참여문학 논쟁은 그 다음에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품의 지향성에 관한 논쟁으로 문학작품의 성립 조건을 갖추었는가에 대한 논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학작품으로서의 성립 조건! 그것은 작품에 삶이 담겨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정주의 작품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녹여낸 작품도 있지만 당대의 삶과 유리된 채 권력과 시류를 좇아 언어유희에 머문 작품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시적 기교로 배반된 삶을 감추고 현란한 언어유희로 자신의 혼탁한 삶을 탈색한 작품들이야말로 우리가 서정주에게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기교와 언어유희에 능한 마술사를 우리가 훌륭한 시인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시인과 문학인으로서의 서정주에 대한 평가는 엄격하고 냉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140-142)

독일의 과거사 청산 노력

1920년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가인 독일은 유럽사회의 전형적인 후진 국가였습니다. 히틀러 집권 6년 만에 독일은 일약 경제대국, 군사강국, 정치대국으로 급부상했지만 (오늘날) 독일 국민 절대다수는 히틀러를 존경하거나 그에 열광하지 않습니다. 독일은 철저하게 역사를 청산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이후 오늘날에도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인들을 색출하여 90세가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법정에 세우고 징역형을 언도합니다.
 
2013년에 나치 친위 대원이었던 지베르트 부루스인스(당시 92)를 레지스탕스 요원 살해 혐의로 법정에 세웠습니다. 2015년에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장부관리인이었던 오스카어 그뢰닝에게 징역 4년을 언도했습니다. 2016년에도 나치 SS 친위대원이자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경비병이었던 라인홀트 한닝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94세에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라인홀트 하닝. 그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노동수용소 경비병으로 집단학살을 방조한 혐의를 받고 70년이 지난 2016년 전범으로 독일 법정에 섰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불의가 저질러지는 것에 침묵했고 그를 멈추게 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이 부끄럽다고 고백했지만 형사처벌을 피할 순 없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과거사 청산에 단호합니다. 극우 세력이 장기 집권한 일본이나 한국과는 전혀 다릅니다. 독일 당국은 지금도 단 한 사람의 나치 전범일지라도 끝가지 추적해서 법의 심판대에 세울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역사 청산에 철저한 독일에게 배워야 할 소중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살림터, 2017, 132-133.

친일파의 끝판왕 이완용, 나라 팔아먹고 며느리와 간통까지 저지르다

20억 원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친일파의 끝판왕, 이완용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왕에게 백작이라는 귀족 작위와 20억 원이 넘는 돈을 받습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일본은 미국의 중재로 맺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습니다. 그전에 일본 수상 가쓰라와 미국 국무장관 태프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습니다.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대신 일본이 조선을 먹기로 미일 양국 간 합의를 한 것이지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합니다.
 

을사늑약의 활약으로 총리대신에 오르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러한 국제적 승인을 배경으로 190511월 조선에게 을사보호조약을 강제합니다. 이를 위해 총리대신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으로 급파하여 속전속결로 조선을 보호국화합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 체결 당시 학부대신으로 고종을 협박하는 데 남달리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공로를 인정해 이완용을 추천해 총리대신에 오르게 합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와 고종 퇴위, 순종 즉위 


1907년 고종 황제는 일제의 이러한 만행을 폭로하고자 이회영, 이상설, 이준을 비밀리에 헤이그 밀사로 파견합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궐석재판에서 이상설을 사형에, 이위종을 종신형에 처하고 고종 황제를 폐위시킵니다. 친일파 송병준은 고종 황제 폐위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고종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릅니다. 초대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76월에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순종으로 갈아치웁니다.
 

이완용의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 역할을 자처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19091026일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 3발을 가슴과 복부에 맞고 즉사합니다. 이토가 처단된 지 10여 일이 지난 시점, 서울에서 그를 추도하는 추도회가 열립니다. 이완용은 추도사에서 이토 공은 나의 스승과 같은 존재였고 이토 공을 존경한다는 망언을 합니다.
 

송병준과 매국 경쟁에서 승리!


19107월 조선에 부임한 데라우치는 일반 경찰을 헌병경찰제로 전환시키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킬 궁리에 몰두합니다. 바로 그 시점에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근대 신소설 혈의 누작가)을 시켜 지금의 내각이 와해되어도 이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며 협상에서 선수를 칩니다. 그리하여 1910814일 이인직을 조선통감부에 몰래 보냅니다. 11시가 넘는 야심한 시각에 말이죠. 망국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협상은 새벽 1시에 끝났습니다. 나라를 팔아먹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쟁하던 이완용은 송병준을 제치고 협상에 성공합니다.
 

한일병합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과 헌신


1910818한일합방을 위한 내각회의에서 이완용(총리대신), 조중응(농상공부대신), 박제순(내부대신) 등 일제의 주구인 매국노들은 합방에 적극 찬동하며 분위기를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용식(학부대신)이 국운이 결정되는 최후의 순간, 죽는 한이 있어도 망국적인 합방안에 찬성할 수 없다며 반대하자 이날 회의는 연기되었습니다. 이후 이완용은 이용식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본 수해지역 시찰 특파사로 임명하는 이면공작을 펼칩니다.
 
그리고 1910822일 오후에 어전회의를 열어 병합조약안을 전격 통과시킵니다. 당시 어전회의는 일본군 2개 사단이 서울에 동원되어 어전회의장 주변을 물샐틈없이 경계하는 등 아주 살벌한 분위기에서 외부와 통신연락이 단절된 채 진행되었습니다. 순종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매국 대신들을 나무랐지만 일본의 방해로 선왕인 고종과 전화 연락을 할 수도 없었으며 무기력했습니다. 822일 오후 4시 어전회의에서 한일병합안이 통과되자 이완용은 마차를 타고 데라우치 통감 관저로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1910(경술년) 822일 오후 5시에 한일병합조약은 그렇게 체결되었습니다. 일제는 조선 민중의 동요를 두려워해 조약을 체결한 즉시 공포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유력한 대신들을 일본군이 가택 연금한 상태에서 일주일 동안 조선 사회를 예의주시합니다. 그러다가 1910829일 치욕적인 한일병합조약을 공표합니다.
 
한일병합조약전문은 이렇습니다.
한일 간 두 나라의 행복을 증진하고 동양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해 데라우치와 이완용이각국 황제의 전권을 위임받아 합병조약을 체결한다.”
 
8개 조항에는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이 행사한다는 것과 일본 황제가 한국의 황제와 황족들 그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훈공을 세운 조선인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주겠다는 내용입니다. 거기다 이 조약을 받아들이고 식민지 정책에 협조하는 조선인 가운데 충량한 자들을 총독부 관리로 등용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이완용, 며느리와 간통하다


이완용은 190912월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고 귀가하다 이재명 의사의 칼에 폐를 깊숙이 찔렸습니다. 그는 간신히 생명을 건져 요양중이었습니다. 당시 큰아들 이승구는 일본 유학중이었는데 이완용은 병시중을 들던 며느리와 간통을 합니다. 시아버지와 간통한 며느리 임건구는 간통 와중에 하늘이 무섭다고 고백하지만 이완용은 즐겁다고 했습니다. 결국 귀국한 아들이 내실에서 며느리 무릎을 베고 누운 이완용을 목격하고 자살합니다. 일말의 죄의식조차 사라진 이완용에게서 인간성의 바닥을 보는 듯합니다.
 

이완용의 자기합리화 : 매국노의 궤변 논리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이완용은 매국노다운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나는 친일파다. 어차피 넘어갈 나라이니 일본과 손잡고 희생을 줄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대한제국의 황실을 보호하고 이 땅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나섰다.”
 
이완용의 자기합리화는 이후 친일 매국노들의 한결같은 궤변이 되어 자신들이 민족의 십자가를 졌다며 친일행위를 미화하는 논리로 써먹습니다.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살림터, 2017, 111-120.

4ㆍ19혁명 당시 진압 경찰의 이유있는 잔학상

419혁명 당시 진압 경찰들의 잔인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4월 혁명 당시 쫓기는 시위대와 진압 경찰의 잔학상을 생생히 기록한 문리대 학생의 글이 유독 눈길을 끕니다.
 
“419일 교문을 나섰을 때 벌써 길가에는 무장 경관들이 꽉 차 있었다. (중략) 경찰들은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학생들을 난타하면서 강제 해산시키려 했고 우리들은 돌을 던지며 악착같이 저항했다. 잔인한 경찰들은 한 사람에게 두세 명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때렸다. 나는 별달리 저항도 하지 않았지만 그 매질은 지독한 것이었다. (중략) 그들은 죽어라고 나를 때렸고 뒤통수며 얼굴이며 가슴을 가리지 않고 찌르고 때렸다. ‘개새끼 죽여 버린다!’고 하면서 다음에는 쇠갈고리와 총 개머리판으로 장작 패듯 내리치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서 근처 전매청 공장으로 한사코 뛰어 들어갔다. (중략) 나는 죽어라고 전매청으로 뛰어 들어가 숨었다. 숨이 막히고 온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나를 그렇게 때렸을까? 아니 때려야만 속이 시원했을까? 동족인데 그 경찰관들은 너무나 잔인하고 악질이었다. (하략)”
 

419혁명 당시 고위급 경찰 60%가 일제 강점기 경찰 출신

 
19604월 혁명 당시 한국 경찰 가운데 총경급(오늘날 경찰서장의 직책) 60%가 일제 강점기 경찰 출신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군정기 한국인 경찰 가운데 미군정청 관보에 실린 52명은 일제 강점기 고위 경찰 출신들입니다. 이들은 경무국장 대리, 도 경찰부장(오늘날 지방 경찰청장에 해당), 도 경찰부의 감찰관 및 과정, 경찰서장을 지낸 것으로 나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전봉덕처럼 독립운동가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고 불온사상을 탐지하며 일제의 충견 노릇을 서슴없이 저지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친일 경찰 출신들은 일제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는 반민족적인 친일행위를 충실히 수행한 것처럼 해방 후에도 이승만 독재 권력의 충견 노릇을 충실히 수행한 것입니다. 독재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시민의 정당한 저항을 잔혹하게 탄압했던 방식은 일제의 방식 그대로였습니다.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 황해도 안악 지방 정이철 형사

 
물론 모든 경찰들이 악질적인 친일행위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처럼 극히 일부 조선인 경찰은 의열단 등 독립운동에 관련되어 투옥되고 고난을 자처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두 아들(김인, 김신)이 머물던 황해도 안악 지방을 감시하던 조선인 형사 정이철은 곽낙원 여사와 손자들이 비밀리에 출국할 때 오히려 그 시각 순찰을 돌지 않았습니다. 무사히 출국한 사실을 확인한 직후 고등계 형사직을 미련 없이 내던졌습니다.
 

친일 경찰, 하판락의 만행

 
그러나 절대다수 조선인 경찰들은 식민 당국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일본인 경찰보다 더 잔인하고 가혹하게 동포들을 대했음을 그간의 연구 결과가 말해 줍니다.
 
따라서 4월 혁명 당시 한국 경찰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저항을 왜 그토록 잔인하게 탄압했는지 그리고 부패한 독재 권력의 충견 노릇에 왜 그토록 혈안이 되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제 말기 부산 동래중학교 학생들의 독서회사건을 취조하던 친일 경찰 하판락은 고문 도중 16살 중학생의 혀를 펜치로 잡아 빼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는 해방 직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지만 곧 풀려나 90세가 넘도록 천수를 누렸습니다. 당시 같이 고문당하던 생존자는 16살에 어린 나이에 갖은 악형으로 숨져간 친구의 영혼을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그놈(하판락)을 잊을 수 없다고 절규합니다.
 

경찰력의 확장과 잔학상

 
역사적으로 19469월 남조선 총파업과 10월 대구 항쟁을 시작으로 서울, 부산 등 인민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찰은 수적인 면에서 확장기를 맞습니다. 그리고 기관총 순경대설치 및 전체 경찰에게 카빈 소총을 보급하는 등 화력 면에서도 한국 경찰은 본격적인 전투경찰 체제로 변신하는 물리적 확장기를 맞습니다. 다음은 해방 직후 부산지역 친일 경찰이 보여 준 고문의 사례입니다. 194610월 항쟁 당시 미군 장교의 목격담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청산되지 못한 친일 경찰들이 얼마나 잔악했는지 그 실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한국 경찰이 각이 날카로운 나무 몽둥이로 사람들의 정강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찰들은 사람 손톱 밑에 뾰족한 나무 조각을 쑤셔 넣는 짓도 했지요. 내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물고문을 받았어요. 그들은 한 친구의 입에다 고무 튜브로 계속 물을 퍼부어 거의 질식할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경찰들이 쇠몽둥이로 한 사람의 어깨를 갈기고 그를 쇠갈고리에 매달아 놓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살림터, 2017, 100-102.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