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30일 토요일

친일파의 끝판왕 이완용, 나라 팔아먹고 며느리와 간통까지 저지르다

20억 원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친일파의 끝판왕, 이완용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왕에게 백작이라는 귀족 작위와 20억 원이 넘는 돈을 받습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일본은 미국의 중재로 맺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습니다. 그전에 일본 수상 가쓰라와 미국 국무장관 태프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습니다.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대신 일본이 조선을 먹기로 미일 양국 간 합의를 한 것이지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합니다.
 

을사늑약의 활약으로 총리대신에 오르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러한 국제적 승인을 배경으로 190511월 조선에게 을사보호조약을 강제합니다. 이를 위해 총리대신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으로 급파하여 속전속결로 조선을 보호국화합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 체결 당시 학부대신으로 고종을 협박하는 데 남달리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공로를 인정해 이완용을 추천해 총리대신에 오르게 합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와 고종 퇴위, 순종 즉위 


1907년 고종 황제는 일제의 이러한 만행을 폭로하고자 이회영, 이상설, 이준을 비밀리에 헤이그 밀사로 파견합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궐석재판에서 이상설을 사형에, 이위종을 종신형에 처하고 고종 황제를 폐위시킵니다. 친일파 송병준은 고종 황제 폐위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고종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릅니다. 초대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76월에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순종으로 갈아치웁니다.
 

이완용의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 역할을 자처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19091026일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 3발을 가슴과 복부에 맞고 즉사합니다. 이토가 처단된 지 10여 일이 지난 시점, 서울에서 그를 추도하는 추도회가 열립니다. 이완용은 추도사에서 이토 공은 나의 스승과 같은 존재였고 이토 공을 존경한다는 망언을 합니다.
 

송병준과 매국 경쟁에서 승리!


19107월 조선에 부임한 데라우치는 일반 경찰을 헌병경찰제로 전환시키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킬 궁리에 몰두합니다. 바로 그 시점에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근대 신소설 혈의 누작가)을 시켜 지금의 내각이 와해되어도 이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며 협상에서 선수를 칩니다. 그리하여 1910814일 이인직을 조선통감부에 몰래 보냅니다. 11시가 넘는 야심한 시각에 말이죠. 망국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협상은 새벽 1시에 끝났습니다. 나라를 팔아먹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쟁하던 이완용은 송병준을 제치고 협상에 성공합니다.
 

한일병합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과 헌신


1910818한일합방을 위한 내각회의에서 이완용(총리대신), 조중응(농상공부대신), 박제순(내부대신) 등 일제의 주구인 매국노들은 합방에 적극 찬동하며 분위기를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용식(학부대신)이 국운이 결정되는 최후의 순간, 죽는 한이 있어도 망국적인 합방안에 찬성할 수 없다며 반대하자 이날 회의는 연기되었습니다. 이후 이완용은 이용식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본 수해지역 시찰 특파사로 임명하는 이면공작을 펼칩니다.
 
그리고 1910822일 오후에 어전회의를 열어 병합조약안을 전격 통과시킵니다. 당시 어전회의는 일본군 2개 사단이 서울에 동원되어 어전회의장 주변을 물샐틈없이 경계하는 등 아주 살벌한 분위기에서 외부와 통신연락이 단절된 채 진행되었습니다. 순종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매국 대신들을 나무랐지만 일본의 방해로 선왕인 고종과 전화 연락을 할 수도 없었으며 무기력했습니다. 822일 오후 4시 어전회의에서 한일병합안이 통과되자 이완용은 마차를 타고 데라우치 통감 관저로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1910(경술년) 822일 오후 5시에 한일병합조약은 그렇게 체결되었습니다. 일제는 조선 민중의 동요를 두려워해 조약을 체결한 즉시 공포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유력한 대신들을 일본군이 가택 연금한 상태에서 일주일 동안 조선 사회를 예의주시합니다. 그러다가 1910829일 치욕적인 한일병합조약을 공표합니다.
 
한일병합조약전문은 이렇습니다.
한일 간 두 나라의 행복을 증진하고 동양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해 데라우치와 이완용이각국 황제의 전권을 위임받아 합병조약을 체결한다.”
 
8개 조항에는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이 행사한다는 것과 일본 황제가 한국의 황제와 황족들 그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훈공을 세운 조선인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주겠다는 내용입니다. 거기다 이 조약을 받아들이고 식민지 정책에 협조하는 조선인 가운데 충량한 자들을 총독부 관리로 등용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이완용, 며느리와 간통하다


이완용은 190912월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고 귀가하다 이재명 의사의 칼에 폐를 깊숙이 찔렸습니다. 그는 간신히 생명을 건져 요양중이었습니다. 당시 큰아들 이승구는 일본 유학중이었는데 이완용은 병시중을 들던 며느리와 간통을 합니다. 시아버지와 간통한 며느리 임건구는 간통 와중에 하늘이 무섭다고 고백하지만 이완용은 즐겁다고 했습니다. 결국 귀국한 아들이 내실에서 며느리 무릎을 베고 누운 이완용을 목격하고 자살합니다. 일말의 죄의식조차 사라진 이완용에게서 인간성의 바닥을 보는 듯합니다.
 

이완용의 자기합리화 : 매국노의 궤변 논리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이완용은 매국노다운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나는 친일파다. 어차피 넘어갈 나라이니 일본과 손잡고 희생을 줄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대한제국의 황실을 보호하고 이 땅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나섰다.”
 
이완용의 자기합리화는 이후 친일 매국노들의 한결같은 궤변이 되어 자신들이 민족의 십자가를 졌다며 친일행위를 미화하는 논리로 써먹습니다.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살림터, 2017, 1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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