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1일 일요일

오(吳, AD. 222~280년)의 역사와 역대 황제

(, AD. 222~280년)의 역사와 역대 황제

 
(, 222~ 28051)는 중국 역사상 삼국시대 동남방의 정권이다. 역사적으로는 대오(大吳), 손오(孫吳), 동오(東吳) 또는 오조(吳朝)라고도 부른다. 198년 손책이 오후(吳侯)에 봉해진 것에서 시작하여, 222년 오왕 손권이 황무(黃武)로 연호를 바꾸며 건국했고, 280년 서진(西晉)에 병합되면서 막을 내렸다.
 
손씨 가문의 시조인 손종(孫鍾)은 오() 지역에서 발흥했다. 또한 한 헌제 유협(劉協)이 손책(孫策)을 오후(吳侯)로 봉했고, 위 문제 조비(曹丕)가 손권(孫權)을 오왕(吳王)으로 봉했으므로, 국호는 ()’이다. 후대 사람들은 황실 성씨가 손씨인 점과 통치 지역이 고대에 강동(江東)이라 불렸던 점 때문에 손오(孫吳), 동오(東吳), 오조(吳朝)라고도 칭한다.
 
삼국 중 손오는 양주(揚州), 형주(荊州) 대부분의 지역과 교주(交州) 전역을 점령했다. 북으로는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일대 및 한수(漢水)와 장강 일대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장강 삼협(三峽), 동쪽으로는 동해(東海), 남쪽으로는 베트남 중부에까지 이르렀다. 동오는 삼국 중 가장 긴 통치 기간을 가진 정권이며, 삼국 중 마지막으로 멸망한 정권이다. 4명의 황제가 통치했고, 58년간 지속되었다. 만약 손책이 강동을 건넌 시점부터 계산한다면, 손오 황족이 강동을 통치한 기간은 총 85년이다.

기원후 262년경. 노란색이 오나라
기원후 262년경. 노란색이 오나라
 

1. 동탁 토벌

 
후한 말, 오군 부춘 사람 손견(孫堅)은 파로장군(破虜將軍)에 임명되어 오정후(烏程侯)를 받았으며, 예주자사(豫州刺史)와 장사태수(長沙太守)를 겸임했다. 그는 황건적의 난, 서량의 변장(邊章)의 난, 구성(區星)의 난에도 참전한 적이 있다.
 
군대를 이끌고 동탁(董卓) 토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선봉을 맡아 화웅(華雄)을 베고, 여포(呂布)를 격퇴했으며, 가장 먼저 낙양(洛陽)에 입성했고, 동탁이 어쩔 수 없이 화해를 청하게 만든 등의 업적이 있다. 이후 원술(袁術)에게 의지하면서 원술과 원소(袁紹)의 정쟁에 휘말렸다.
 
191(초평 3), 손견은 원술의 요청에 따라 원소의 동맹인 형주(荊州) 양양(襄陽)의 유표(劉表)와 황조(黃祖)를 정벌하다가 전사했다. 이때 나이 겨우 서른일곱 살이었다.
 

2. 강동 통일

 
손견이 죽은 후, 조카 손분(孫賁)이 지도자 자리를 계승하고 원술에게 의탁했다. 나중에 손견의 장남 손책(孫策)은 원술 막하에 들어가 원술에게 병마를 빌려 양주(揚州)를 공격해 점령했다. 원술이 스스로 황제를 칭한 후, 손책과 손분 등은 그와 결별하고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손책은 유요(劉繇), 허공(許貢), 엄백호(嚴白虎), 왕랑(王朗) 등 양주의 할거 세력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손오(孫吳)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조조(曹操)가 장악한 허창(許昌) 조정은 그를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임명하고, 오정후 작위를 세습하게 했으며, 또한 오후(吳侯)로 책봉했다. 건안(建安) 5(200) 여름, 손책은 오군 태수 허공의 문객들에게 습격당해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손책은 임종 직전 둘째 아우 손권(孫權)에게 강동(江東)을 다스릴 것을 명했다. 손책은 한()의 신하였고, 손권은 손책의 아들이 아니었으므로, 한 조정의 관직과 오후 작위를 물려받지는 못했다. 손권은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짧은 시간 안에 강동의 상황을 안정시켰다. 그 후 손권은 한편으로는 양주 내의 산월(山越) 반란을 진압하고, 동시에 황조를 세 번이나 정벌하며 형주와 강하(江夏)를 차지하려고 노력했다.
 
 

3. 형주 쟁탈전

 

1) 형주의 상실과 적벽대전

 
건안 13(208), 형주목 유표가 죽었다. 조조군도 이때 남하하여 형주를 정벌했다. 뒤를 이어 형주목이 된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형주를 획득한 후, 더 나아가 손권이 점령한 강동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손권은 부하 노숙을 유비에게 보내 군사 정보를 탐색하게 했는데, 노숙은 유비가 창오태수 오거에게 의탁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손권에게 의탁하도록 설득했다. 그래서 유비는 제갈량을 동오에 파견해 손권과 회합했고, 적벽에서 황개가 적선을 불태워 조조의 30만 대군을 크게 격파했다(후세에 적벽대전이라 부른다). 이후 조조는 북방으로 물러나 형주 북부의 남양군, 장릉군, 강하군 일부 및 남군 일부 지역, 즉 후에 양양군이라 불리는 곳을 점령했다. 손권은 주유, 여몽, 감녕, 정보, 한당, 주태, 장흠 등 장수들을 보내 이릉, 강릉, 일부 무릉군, 및 일부 장사군, 즉 후에 한창군이라 불리는 곳을 점령했다.
 

2) 형주의 분할과 갈등

 
이 시기에 유비는 형주 남부의 장사, 계양, 무릉, 영릉 네 군을 공격했다. 주유는 강릉에서 촉으로 들어가 다시 양번을 탈취하자고 주장했고, 여범과도 유비를 통제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노숙은 유비를 지원하여 함께 조조에 대항하자고 제안했다. 주유가 죽은 후, 손권은 노숙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이 점령한 남군과 그 주변의 일부 무릉군, 장사군을 유비에게 빌려주었다’(유비 측의 용어로는 그가 형주를 도독하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양측의 형주 귀속에 대한 이해가 달라 화근을 남겼다). 이는 일시적으로 유비의 힘을 빌려 강릉 일대에서 조조의 군사적 압력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건안 15년에 손권 세력은 교주를 장악했다.
 
유비가 촉을 점령한 후, 손권은 유비에게 형주와 형주의 세 군인 장사, 영릉, 계양을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유비는 양주를 점령한 후에 형주를 주겠다는 핑계를 댔다. 손권은 여몽을 보내 세 군을 기습했다. 결국 양측은 동맹 관계를 회복하기로 합의하고 상강을 경계로 장사, 계양, 강하는 손권에게, 영릉, 무릉, 강릉은 유비에게 속하게 되었다.
 

3) 관우의 북벌과 백의도강

 
유비와의 동맹을 주장했던 노숙이 죽은 후, 건안 24년에 유비 휘하의 형주 총관 관우가 양번을 북벌하며 위세가 크게 떨쳤다. 그는 강동 통치자들을 적대시했고, 이는 손권에게 위협이 되었다. 또한 손권은 초기부터 노숙, 주유 등의 장강 전역 장악과 독립 모색에 대한 권유를 계속 받았으나, 단지 조조의 압박 때문에 노숙의 형주 대여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조조의 위협이 줄어들자 손오는 오래전부터 형주를 탐내고 있었다.
 
여몽은 손권에게 관우를 기습하여 강릉, 양양, 백제성을 탈취하고 각각 손교, 여몽, 반장이 지키게 한 후, 장흠을 보내 강을 순찰하며 장강을 모두 장악하자고 제안했다. 손권의 부하들도 대부분 형주 탈취를 건의했다. 이에 손권은 조조가 통제하는 정부에 신하를 자처했고, 조조는 강남을 손권에게 할양하겠다고 약속했다. 손권은 정식으로 한을 보좌하고 조조를 치려던 초기 목표를 포기하고, 여몽을 시켜 관우가 양양을 공격할 때 상인으로 위장해 상수지맹을 파기하고 강릉, 영릉, 무릉, 이도 등지를 기습했다. 이것이 백의도강이다. 패주하던 관우를 죽이고, 유비 세력은 형주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손권은 조조 정부로부터 표기장군, 가절, 겸 형주목, 남창후로 봉해졌다. 그러나 여몽, 손교, 장흠도 이때 병으로 죽었다.
 

4. 삼국의 형성과 동맹 회복

 
220년 조조가 죽고, 그 세력은 아들 조비가 계승했다. 조비는 상황을 잘못 판단해 조인에게 양양을 불태우고 떠나라고 명령했고, 양양은 손권이 차지했다. 같은 해, 조비는 제위를 찬탈하여 조위를 세웠고, 동한은 멸망했다. 조비는 즉시 손권이 자신의 허락 없이 양양을 함부로 점령했다는 이유로 조인과 서황을 보내 양양을 탈환하게 했다.
 
다음 해 유비는 황제를 칭하고 촉한을 세웠으며, 손권도 유장을 익주목(益州牧)으로, 주태(周泰)를 한중태수(漢中太守)로 삼았으며, 삼협(三峽)에 유비의 행정구역과 이름이 같은 고릉군(固陵郡)을 설치하고 반장(潘璋)을 태수로 삼아 촉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유비는 황제가 된 후, 복수라는 명분으로 손권에게 이릉대전(夷陵之戰)을 일으켰다. 손권은 먼저 조비에게 칭신(稱臣)하고 조위(曹魏)의 황초(黃初) 연호를 사용했으며, 대장군, 오왕(吳王), 사지절(使持節), 독교주(督交州)에 봉해지고 겸하여 형주목이 되어 무창(武昌, 지금의 어저우시)에 도읍을 정했다. 이는 양쪽 전선에서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222, 유비는 효정(猇亭) 자귀(秭歸) 일대에서 오()의 진서장군(鎮西將軍) 육손(陸遜)에게 패배하여 거의 전군이 전멸했다. 손권도 조위의 공격에 직면했기 때문에 유비와 사자를 교환하며 화해했다. 유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성(白帝城)에서 죽었다. 유비가 죽은 후, 실권을 잡은 촉한 승상 제갈량(諸葛亮)은 등지(鄧芝)를 오나라에 사신으로 보냈고, 손권은 오와 촉의 동맹을 회복하는 데 동의했다.
 

5. 동오 건립

 
손권은 아들 손등(孫登)을 조위(曹魏)에 인질로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조위와의 짧은 동맹은 단절되었고, 그는 연호 황무(黃武)를 제정하며 조위의 신하 관계에서 벗어났다. 이에 조비는 세 차례에 걸쳐 오나라를 공격했지만, 모두 격퇴당했다. 조위가 오나라의 여러 현()을 점령했지만, 오나라는 곧 기춘(蘄春)을 수복하는 등 반격했다. 이후 조휴(曹休)228년 석정(石亭) 전투에서 오나라를 공격했지만, 육손(陸遜), 전종(全琮), 주환(朱桓) 등의 영격으로 패배하고 전사했다.
 

6. 손권 황제 칭호

 
황룡 원년(229, () 태화(太和) 3, 촉한(蜀漢) 건흥(建興) 7) 4월 병신일, 손권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오(), 연호를 황룡(黃龍)으로 바꾸었다. 그가 바로 오대제(吳大帝). 그는 사자를 보내 촉한에 이를 알렸다. 촉한의 관리들은 손권을 황제 참칭(僭稱)이라 여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제갈량(諸葛亮)은 당장 오나라와 연합하여 조위와 대항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손권의 참칭을 문제 삼으면 두 나라가 장기적인 전쟁에 빠질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제갈량은 사자를 보내 손권의 황제 등극을 축하했고, 함께 조위를 멸망시킨 후 천하를 반으로 나눈다는 약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촉한 사자 등지(鄧芝)는 손권에게 위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두 나라가 반드시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가화(嘉禾) 2(233), 손권은 요동을 할거하던 공손연(公孫淵)을 연왕(燕王)으로 봉하고, 태상(太常) 장미(張彌), 집금오(執金吾) 허안(許晏), 장군 하달(賀達)에게 1만여 명의 병력과 금은보화를 보내 구석(九錫)을 더하여 그를 연왕으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공손연은 오나라가 제때 지원해 주지 못할 것을 염려했고, 또한 재물을 탐하여 사신들을 살해했다. 동시에 오나라는 여러 차례 조위를 공격하여 조위의 병력을 약화시키고 여러 성을 점령했다. 이듬해 제갈량이 죽은 후, 손권은 조위가 촉한을 멸망시키려 한다고 보고, 바구(巴丘)에 병력을 증강하여 촉한의 수비를 돕는 한편, 촉한이 패망하면 조위와 함께 촉한의 영토를 분할할 준비를 했다.
 
가화 6(237),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을 칭하고 연호를 소한(紹漢)으로 바꾸며 연()나라를 세웠다. 이듬해 정월에 동오에 칭신했지만, 8월에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가 이끄는 군대에 평정되어 공손연은 전사하고 연나라는 멸망했다.
 

7. 이궁의 다툼과 혼란

 
적오(赤烏) 4(241), 손권의 장남 손등(孫登)이 죽었다. 이듬해 손권은 현존하는 황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셋째 아들 손화(孫和)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넷째 아들 손패(孫霸)를 노왕(魯王)으로 봉하며 이궁의 다툼(二宮之爭)’ 혹은 남노당쟁(南魯黨爭)’을 야기했다. 조정 대신들도 이로 인해 두 파로 갈라섰다.
 
결국 손화는 폐위되었고, 손패는 사사(賜死)당했다. 최종적으로 일곱째 아들 손량(孫亮)이 태자로 책봉되었고, 그의 어머니 반숙(潘淑)은 황후가 되었다. 오나라는 이 사건을 겪으며 황실이 형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분열되어 내부 투쟁의 씨앗을 뿌렸다. 반황후는 서한(西漢)의 여태후(呂太后)처럼 섭정하며 정사를 돌보려 했으나, 불안감을 느낀 궁녀들에게 살해당했다. 이 일 역시 대신들의 배후 조종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8. 조정의 혼란

 
252, 강동을 52년간 통치했던 손권이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손량이 즉위하며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바꾸었다. 제갈각(諸葛恪), 손홍(孫弘), 손준(孫峻) 등이 보정(輔政)을 맡았다. 손홍이 제갈각을 해치려 하자, 제갈각은 손준의 도움을 받아 손홍을 죽였다. 253, 제갈각은 회남(淮南)을 정벌했으나 참패했다. 제갈각은 손준에게 살해당했고, 대권은 손준의 손에 넘어갔다. 손준은 폐태자 손화(孫和), 손등의 유일한 생존 자식인 오후(吳侯) 손영(孫英), 손권의 막내딸 손노육(孫魯育) 등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조위(曹魏)의 장수 관구검(毌丘儉)과 문흠(文欽)이 수춘(壽春)에서 권신 사마사(司馬師)를 토벌하려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배했고, 수춘의 많은 백성이 동오로 도망쳐 왔다. 손준은 이 기회를 틈타 회남으로 출병했으나, 오히려 위()의 장수 제갈탄(諸葛誕)에게 추격당했고, 유찬(留贊) 등이 전사했다. 제갈각과 손준 모두 서주(徐州)를 차지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256년 손준이 병사한 후, 국정은 그의 사촌 아우인 편장군(偏將軍) 손림(孫綝)에게 넘어갔다. 손림은 중신 등윤(滕胤), 여거(呂據) 등을 처형했다. 제갈탄이 또다시 수춘에서 권신 사마사(司馬師)의 동생인 사마소(司馬昭)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고 동오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손림은 3만 병력을 이끌고 출병하며 제갈탄에게 관직과 작위를 봉했다. 제갈탄은 위()와 오()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합비 신성(合肥新城) 요새에 더 이상 방비를 두지 않아 합비는 공성(空城)이 되었고, 오군 일부가 수춘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위()의 장수 왕창(王昶)이 협석(夾石)을 굳게 지켜 강릉(江陵) 태수 시적(施績)과 전희(全熙)는 견제당해 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위군은 오군의 군량도 불태웠다. 손림은 작전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대장 주이(朱異)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제갈탄도 결국 패망했고, 오군은 합비 등지를 효과적으로 점령하지 못했다.
 
이후 손림은 손량을 회계왕(會稽王)으로 폐위시키고, 그의 형인 손휴(孫休)를 황제로 옹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림의 삼족은 손휴에게 살해당했고, 손량 역시 손휴에게 강요당해 죽음을 맞이했다.
 
 
원흥 원년(264), 손휴가 죽었다. 이때 촉한이 멸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오군은 서쪽으로 진격했다가 실패했으며, 교지(交趾)는 오나라를 배신하고 위나라에 항복하여 동오 국내 정세는 불안했다. 이에 나이가 많은 군주를 세우고자 했다. 좌전군(左典軍) 만욱(萬彧)은 승상 복양흥(濮陽興)과 좌장군 장포(張布)에게 손화의 장남 손호(孫皓)를 황제로 추천했다. 손호는 즉위 초 한때 인정을 베풀어 국내 백성을 위로하고, 창고를 열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며, 후궁 궁녀의 수를 줄이고, 궁궐 안의 불필요한 진귀한 새와 짐승들을 방생하여 한때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잔인한 면모가 점차 드러나 백성들의 원망이 끊이지 않았다. 다행히 육항(陸抗), 육개(陸凱) 등 대신들이 전력을 다해 국정을 지탱했다.
 
 

9. ()의 오() 정벌

 
조위(曹魏)가 촉한(蜀漢)을 멸망시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소(司馬昭)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황제가 되었고, () 왕조를 세웠다. 그가 바로 진 무제(武帝)이다.
 
손호(孫皓) 시대에 동오는 연이어 북벌을 감행했다. 교지 수복, 서릉 전투에서 진()군을 격퇴하고 반란 장수 보천(步闡)의 난을 평정한 것, 손신(孫慎)이 강하(江夏)와 여남(汝南)의 백성들을 약탈한 것 등의 군사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승리보다는 패배가 많았으며, 결국 오나라의 약세와 진()나라의 강세라는 국면을 바꾸지는 못했다.
 
274, 육항이 병사했다. 함녕(咸寧) 5(280), 진 무제는 여섯 갈래로 대대적인 오() 정벌 명령을 내렸다. 진군은 거침없이 진격했고, ()나라의 장수 왕혼(王渾), 두예(杜預), 왕준(王濬), 가충(賈充) 등이 차례로 오나라의 장수 장제(張悌), 심영(沈瑩), 손진(孫震), 장상(張象), 오연(伍延), 설영(薛瑩), 호충(胡衝), 손흠(孫歆) 등을 격파했다. 서릉(西陵), 강릉(江陵), 무창(武昌) 등 주요 거점들을 빼앗았고, 방어가 견고한 여수(濡須)와 동관(東關)을 우회하여 상대적으로 약한 역양(歷陽)을 취함으로써 오나라의 장강 방어선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진군의 수군도 익주(益州)에서 강을 따라 내려왔으나 동오 건평 태수 오언(吾彥)은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손호가 교주와 광주(廣州) 두 주에 배치했던 군대도 거리가 멀고 곽마(郭馬)의 난을 겪고 있어 참전하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진()나라의 장수 두예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지난번 오() 정벌의 기세를 이어갔다. 손호는 급히 장제(張悌)에게 7~8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저항하도록 명령했으나, 두예는 장제(張悌)의 대군을 격파하고 건업(建業)으로 직진했다. 손호 수하에는 더 이상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없었고, 대세가 기울었음을 스스로 알았다. 그는 서진(西晉)의 대군이 공격해 오자 석두성(石頭城) 위에서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동오는 멸망했고, 삼국은 서진에 의해 통일되었다. 오언(吾彥)과 교주자사 도황(陶璜), 광주자사 등수(滕修) 등도 동오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진에 항복했다.
 
오나라가 멸망했을 당시, 4개 주, 43개 군, 313개 현을 영토로 삼았으며, 523천 호, 관리 32천 명, 병사 23만 명, 남녀 인구 230만 명, 280만 석, 5천여 척, 후궁 5천여 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10. 오나라 역대 황제


대수묘호시호성명연호재위기간능호
-오 시조(吳始祖)
(오 대제 추숭)
무열황제
(武烈皇帝)
손견(孫堅)--고릉(高陵)
--장사환왕
(長沙桓王)
(오 대제 추숭)
손책(孫策)---
--오왕(吳王)손권(孫權)황무(黃武) 222~229년220~229년-
제1대오 태조(吳太祖)대황제(大皇帝)손권(孫權)황룡(黃龍) 229~231년
가화(嘉禾) 232~238년
적오(赤烏) 238~251년
태원(太元) 251~252년
신봉(神鳳) 252년
229~252년장릉(蔣陵)
제2대-폐황제(廢皇帝)
유주(幼主)
회계왕(會稽王)
후관후(候官侯)
손량(孫亮)건흥(建興) 252~253년
오봉(五鳳) 254~256년
태평(太平) 256~258년
252~258년관후묘(官侯墓)
제3대-경황제(景皇帝)손휴(孫休)영안(永安) 258~264년258~264년정릉(定陵)
--문황제(文皇帝)
(오 말제 추숭)
손화(孫和)--명릉(明陵)
제4대-말황제(末皇帝)
오정후(烏程侯)
귀명후(歸命侯)
손호(孫皓)원흥(元興) 264~265년
감로(甘露) 265~266년
보정(寶鼎) 266~269년
건형(建衡) 269~271년
봉황(鳳凰) 272~274년
천책(天冊) 275~276년
천새(天璽) 276년
천기(天紀) 277~280년
264~2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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