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말제 손호(末帝 孫皓, AD. 243~284년) : 재위 AD. 264~280년
- 이름 : 손호(孫皓)
- 출생 : 243년
- 사망 : 284년
- 재위 기간 : 264년 9월 3일 ~ 280년 5월 1일 (15년 241일간 재위)
- 사망 후 묘지 : 낙양(洛阳) 맹진(孟津) 봉대촌 북쪽
- 황후 : 등황후(滕皇后)
- 후궁 :
장미인(張美人) — 장포(張布)의 딸
좌부인(左夫人) — 별도의 성씨로 전함, 애첩 중 한 명 - 아들 :
태자 손근(孫瑾)
노왕(魯王) 손건(孫虔)
그 외에도 총 34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됨 - 연호(재위 중 사용한 연호)
원흥(元興) : 264년 – 265년
감로(甘露) : 265년 – 266년
보정(寶鼎) : 266년 – 269년
건형(建衡) : 269년 – 271년
봉황(鳳凰) : 272년 – 274년
천책(天冊) : 275년 – 276년
천새(天璽) : 276년
천기(天紀) : 277년 – 280년
【기원후 243년】 적오 6년
- 손호(孫皓) 출생. 오대제 손권(孫權)의 셋째 아들 손화(孫和)의 장남. 어릴 적 이름은 “팽조(彭祖)”
【기원후 250년】 적오 13년
- 부친 손화, ‘이궁의 쟁투’에 휘말려 폐위되고 고장(故鄣)으로 유배됨.
【기원후 252년】 태원 2년
- 정월 : 부친 손화, 남양왕(南陽王)에 봉해져 장사(長沙)로 이주.
- 오대제 손권 서거, 손량(孫亮)이 즉위.
【기원후 253년】 건흥 2년
- 손준(孫峻)이 제갈각(諸葛恪) 주살 후, 손화가 황제로 옹립되려 했다는 소문을 핑계로 부친 손화의 왕위를 박탈하고 신도(新都)로 유배 보냈으며, 후에 사사(賜死)됨. 모친 장비(張妃)도 함께 사망.
【기원후 258년】 태평 3년
- 손침(孫綝)이 손량(孫亮)을 폐위시키고 경제(景帝) 손휴(孫休)를 옹립.
- 경제(景帝) 즉위 후 : 손호가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지고 오정(烏程)으로 감. 오정령(烏程令) 만욱(萬彧)과 교분을 쌓음.
【기원후 264년】 영안 7년
- 7월 : 경제(景帝) 손휴(孫休) 서거. 당시 촉한(蜀漢) 멸망 및 교지(交趾) 반란 등으로 정세가 불안정하자, 좌전군(左典軍) 만욱(萬彧) 등의 추천으로 23세의 나이로 황제 즉위.
- 연호를 원흥(元興)으로 개원.
- 즉위 후 혜민 정책을 펴 백성들의 호응을 얻음(포상, 식량 배포, 궁녀 방면, 야수 방생). 명군이라는 칭송을 받음.
- 손휴의 처 주태후를 경황후로 강등, 부친 손화(孫和)를 문황제(文皇帝)로 추존, 생모 하기(何姬)를 태후로, 처 등씨(滕氏)를 황후로 세움. 손휴의 태자와 다른 아들들을 왕작(王爵)에 봉하여 계위 정당성을 강화.
- 옹립 공로가 있던 승상 복양흥(濮陽興)과 장포(張布)를 처형(즉위 4개월 만).
- 외척 중용(등목, 하홍, 하장, 하식 등을 후(侯)에 봉함).
【기원후 265년】 감로 원년
- 7월 : 전 태후 주씨에게 자살을 강요. 손휴의 아들 네 명을 연금하고 그중 두 명을 살해.
- 9월 : “형주에 왕기가 있다”는 술사의 말을 믿고 수도를 무창(武昌)으로 옮기기로 결정.
- 12월 : 서진(西晉)의 사마염(司馬炎)이 진(晉) 왕조를 건립.
【기원후 266년】 보물 원년
-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충(丁忠) 귀환. 연회 중 상시(常侍) 왕번(王蕃)을 참수하여 대신들에게 큰 충격을 줌. (육개(陸凱) 등 중신들이 간언했지만 무시됨).
- 진(晉)나라와 절교.
- 8월 : 좌승상(左丞相)에 육개, 우승상(右丞相)에 측근 만욱을 임명.
- 무창 천도 후의 생활 불편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됨. (어린이 노래 “寧飲建業水, 不食武昌魚...”)
- 10월 : 영안산 주민 시단(施旦)의 반란 발생(손겸 납치, 건업 근교까지 진격). 손호는 이를 술사의 예언에 대한 증거로 여기며 무사히 진압 후 손겸 모자를 독살. 손화의 적자이자 이복동생인 손준(孫俊)도 살해.
- 12월 : 수도를 건업(建業)으로 다시 옮김.
【기원후 267년】 보물 2년
- 6월 : 소명궁(昭明宮) 건설 시작. 막대한 비용과 농사 피해에도 육개, 화학(華覈) 등 중신들의 만류를 듣지 않음.
【기원후 268년】 보물 3년
- 진(晉)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시적, 만욱, 정봉, 제갈정 등의 북벌 시도 좌절. 남정하던 교지군도 패배).
【기원후 269년】 건형 원년
- 좌승상 육개(陸凱) 병사. 이후 손호가 꺼리던 중신들이 대부분 사망하여 손호의 폭정이 심화되는 계기가 됨.
- 남쪽 교지 반군 토벌을 위한 군대 파견(우사, 설규, 도황; 이후, 서존).
- 우대사마 정봉(丁奉)을 다시 북정 시킴.
【기원후 270년】 건형 2년
- 정봉(丁奉) 부대, 진(晉)의 견홍(牽弘)에게 패퇴.
- 이후(李勖) 부대, 길을 핑계로 안내인 죽이고 회군. 손호가 이에 분노하여 이후와 서존을 일족과 함께 처형.
- 하정(何定)이 하구(夏口)로 사냥 갔을 때, 전장군 손수(孫秀)가 자신을 잡으러 온 것으로 오해하고 진(晉)나라로 투항 (수백 명 인솔). 진(晉) 무제가 손수를 후하게 대우함.
【기원후 271년】 건형 3년
- 정월 : 도현증이 수정한 참문(“황기자개, 견어동남, 종유천하자, 형, 양지군!”)을 믿고, 진(晉)나라 정벌을 위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서진(西進). 대설로 인한 병사들의 불만과 배반 소문으로 회군.
- 회군 전, 우승상 만욱(萬彧), 우대사마 정봉(丁奉), 좌장군 유평(留平)이 사적인 대화를 나눈 것이 손호에게 알려졌으나 즉시 처벌하지 않음.
- 그해 : 정봉 병사.
- 남정군 (설규, 우사, 도황)이 교지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구진(九真), 일남(日南) 두 군을 수복, 부엄이(扶嚴夷)를 평정하여 수년간 지속된 교지의 난을 잠정적으로 종식.
【기원후 272년】 봉황 원년
- 초 : 손호, 만욱과 유평을 독주로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 만욱은 자살, 유평은 근심으로 죽음.
- 8월 : 육항(陸抗)이 서진(西晉)으로 배반했던 서릉독(西陵督) 보찬(步闡)을 성공적으로 토벌. 전략적 요충지 서릉을 수복하고 보찬 등을 삼족과 함께 처형. 명장 양호(羊祜)의 5만 대군과 양조(楊肇)의 3만 원군을 격퇴하는 대승 거둠.
- 서릉대첩 이후 자만심이 극에 달함. 술사 상광에게 점을 쳐 “경자년(庚子年)에 푸른 일산이 낙양에 들어갈 것”이라는 결과에 흡족해하며 천하통일을 굳게 믿음.
- 빈번히 진(晉)나라를 공격했으나 성과 없음.
- 육항(陸抗)이 무모한 군사 행동에 반대하고 방비를 강화할 것을 간언했으나 무시됨.
- 이 무렵부터 연회에서 신하들을 취하게 한 뒤 과실을 적발, 얼굴 가죽 벗기기, 눈 파내기 등 잔혹한 처벌을 가함. 간언하는 충신들에 대한 용인도가 크게 낮아져 살육을 서슴지 않음(누현, 하소, 위소, 장준, 차준, 장영, 웅목, 하정, 진성, 장숙 등 처형).
【기원후 274년】 봉황 3년
- 육항(陸抗) 병사. 손호는 그의 병력을 다섯으로 나누어 육항의 아들들에게 분산 통솔하게 함.
【기원후 276년】 천희 원년
- 진(晉)나라의 회유책 속에 오나라 종실 무위장군 손개(孫楷) 등 주요 장수들이 진(晉)나라로 투항.
【기원후 279년】 천기 3년
- 곽마(郭馬)가 광주(廣州)에서 반란. 손호가 등수(滕脩), 도준(陶濬), 도황(陶璜) 파견하여 토벌.
- 11월 : 진(晉) 무제 사마염(司馬炎)이 양호(羊祜)의 계획에 따라 사마주(司馬伷), 왕혼(王渾), 왕융(王戎), 호분(胡奮), 두예(杜預), 왕준(王濬), 당빈(唐彬) 등 6로 대군을 파견하여 오나라를 대대적으로 정벌 시작.
【기원후 280년】 천기 4년
- 정월 : 두예, 왕혼 등이 오나라 요새 함락. 왕혼 부대는 건업 100리 지점까지 진격.
- 2월 : 왕준, 당빈, 두예, 호분, 왕융 부대의 공격으로 형주의 군사 요충지 대부분이 함락(단양, 서릉, 강릉 등). 오나라 장수 130여 명 사상 또는 투항.
- 3월 :
- 승상 장제(張悌)가 이끄는 오나라 정예 부대가 판교에서 왕혼 부대에게 격파, 장제 등 전사.
- 손호는 멸망이 임박했음을 자각하고 외삼촌 하식(何植)에게 자책하는 편지를 보냄.
- 하식도 왕혼에 항복.
- 왕준이 수군을 이끌고 무창에서 건업으로 진격.
- 오나라 수장 장상(張象)의 1만 수군이 투항.
- 도준(陶濬)의 2만 군대도 밤새 도망.
- 총신 진훤(岑昬)을 살해.
- 설영(薛瑩)과 호충(胡沖)의 계책에 따라 왕준, 사마주, 왕혼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요청하며 분열 시도했으나 실패.
- 3월 임인일(5월 1일) : 왕준이 석두성(石頭城)에 진입. 손호는 태자 손경(孫瑾) 등 21명과 함께 항복. 오나라 멸망. 진 무제가 손호를 귀명후(歸命侯)에 봉함.
- 5월 : 손호가 낙양(洛陽)에 도착. 진(晉) 무제로부터 비교적 우대받음.
- 진 무제와 가충, 왕제 등과의 대화에서 특유의 호방함과 지혜, 비수를 감춘 언변을 보임.
【기원후 284년】
- 초 (태강 4년 12월) : 손호(孫皓), 낙양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 망산(邙山)에 묻힘.
【가족 관계】
- 아버지: 손화(孫和) → 오나라의 황태자였으나 후에 폐태자가 되었으며, 손권의 아들.
- 어머니: 하희(何姬) → 손화의 측실이며, 손호의 생모.
- 형제들
- 손덕(孫德) :
손호(孫皓)의 이복형제
손휴(孫休) 재위 시절 전당후(錢塘侯)에 봉해짐 - 손겸(孫謙) :
손호의 이복형제
손휴 재위 시절 영안후(永安侯)에 봉해짐
손호 재위 중, 산민(山民) 시단(施旦)에게 납치되어 반란을 꾀했으나 실패, 후에 손호에게 처형당함 - 손준(孫俊) :
손호의 이복형제, 생모는 손화(孫和)의 정비 장씨(張氏)
손수 재위 중 기도위(騎都尉)에 봉해졌으나,
후에 손호에게 살해당함 - 자매 손씨(孫氏) : 손호의 이복 여동생, 생모는 장씨(張氏). 육경(陸景)에게 시집감
- 후비들
- 등황후(滕皇后) :
태상(太常) 등윤(滕胤)과 같은 집안 출신
아버지는 등목(滕牧)
오나라 멸망 후, 손호와 함께 낙양으로 이주 - 장미인(張美人) :
장포(張布)의 딸
손호의 총애를 받았으나, 손호를 풍자하다가 몽둥이로 맞아 죽음 - 좌부인(左夫人) :
- 어떤 기록에는 왕씨(王氏), 다른 기록에는 장씨(張美人의 언니)로 전해짐
손호의 총애를 받았고, 사망 후 손호는 밤낮으로 그리워하며 수개월간 조정을 돌보지 않음 - 아들들
- 손근(孫瑾) : 269년, 건형 원년(建衡元年)에 태자(太子)로 책봉. 오나라 멸망 후, 낙양으로 이주, 중랑(中郎)으로 봉해짐
- 손건(孫虔) : 처음에는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다가, 후에 노왕(魯王)으로 작위 변경. 오 멸망 후 낙양으로 이주, 랑중(郎中)으로 봉해짐
- 손충(孫充) : 서진(西晉) 영가 4년(永嘉四年, 310년), 전괄(錢璯)에게 옹립되어 “오왕(吳王)”으로 칭함. 그러나 후에 전괄에게 살해당함
- 손번(孫璠) : 서진 태흥 원년(太興元年, 318년)에 반란을 도모하였으나 실패 처형당함.
- 손희조(孫希祖) : 후에 고향 부춘현(富春縣)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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