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0일 토요일

촉한(蜀漢, AD. 221~263년)의 역사와 역대 황제

촉한(蜀漢, AD. 221~263)의 역사와 역대 황제

 

1. 촉한의 개요

 
촉한(2215152631223)의 국호는 한()이다. 후세에는 일반적으로 촉한, 촉국, , 서촉 또는 계한으로 부른다. 2대에 걸쳐 2명의 황제가 다스렸으며, 43년간 존속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한을 계승한 정통 왕조로 묘사되며, 중국 역사상 삼국시대 서남방의 한 국가이다.

220, 위왕 조비는 한 헌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황제에 올랐다. 국호를 ()’로 바꾸면서 동한은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221, 한중왕 유비는 성도에서 한나라 황실의 후예 자격으로 황제에 올랐다. 한나라 왕실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하며 국호는 여전히 ()’으로 했다. 이는 북방의 조위와 대등하게 맞서려 한 시도였다.
 
 
222, 유비는 전력을 다해 손권이 이끄는 동오 정권을 공격했다. 이는 여몽의 백의도강(白衣渡江)으로 형주를 기습당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 역사적으로는 이릉대전이라 불린다. 오군 총사령관은 유비가 병력을 산림에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한여름이라는 점을 보고 화공 전술을 사용했다. 촉한 군대는 크게 패배했다. 223, 유비는 세상을 떠났고, 시호는 소열황제이다. 태자 유선이 즉위했으며, 승상 제갈량이 실질적으로 정권을 주도했다.
 
 
제갈량이 정권을 주도하는 동안, 그는 유비의 유지를 이어받아 다섯 차례에 걸쳐 북벌을 감행했다. 롱서(隴西)를 공략하고 중원(中原)을 수복하고자 하는 염원이었다. 234년 제갈량이 죽은 후, 강유는 열한 차례 북벌을 감행했지만, 모두 위군에 의해 저지되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263, 조위가 촉한 영토로 쳐들어왔고, 유선은 항복하여 촉한은 멸망했다.

262년경 지도 - 촉한은 초록색
262년경 지도 - 촉한은 초록색
 

2. 국호

 
유비는 한() 왕조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이라고 불렀다. 때로는 스스로를 계한(季漢)’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와 진() 정권은 촉한 정권이 한 왕실을 계승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주요 영토가 고대에 촉()이라 불렸다는 이유로 이를 ()’이라 불렀다. 이로 인해 ()’이 속칭이 되었으며, ‘촉국이라고 통칭하기도 했다.
 
촉한은 조위(曹魏)에게 멸망당했고, ()은 위()를 대신하여 통일 왕조를 세웠다. 촉한 출신이었으나 촉한 멸망 후 서진에서 벼슬을 한 진수(陳壽)삼국지를 저술할 때 정치적 올바름을 유지하기 위해 위()와 진()을 동한 헌제 이후의 정통 황조로 인정했다. 따라서 본문 서술에서 ()’이라고 칭하지 않고 계속해서 촉국’, ‘으로 불렀다. 마찬가지로 촉한에서 벼슬을 했던 이밀(李密)진정표(陳情表)에서 촉한을 위조(僞朝, 가짜 왕조)’라고 칭했다. 자치통감에서는 ()’이라고 칭한다. 훗날 역사는 서한과 동한과의 구별을 위해 이를 촉한’, ‘계한이라고 부른다.
 

3. 촉한의 역사

 

1) 동한 말년의 기반 구축

 
동한 말년, 군웅이 할거하는 시기에 한 경제의 후예 유비는 수십 년의 전쟁 끝에 형주 반을 차지했다. 이후 익주지전(益州之戰)을 일으켜 유장이 다스리던 익주를 공격해 점령했다. 또한 한중지전(漢中之戰)에서 성공적으로 조조로부터 한중을 빼앗았고, 219년에 스스로 한중왕에 올랐다.
 
건안 24(219) 유비가 후방을 안정시킨 후, 형주 수비대장 관우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조조를 북벌했다. 번성지전(樊城之戰) 초기에 위군을 크게 물리치고 번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220, 손권이 맹약을 어기고 형주를 기습 공격했다. 관우는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맥성지전(麥城之戰)에서 패배해 살해당했다. 관우의 패배로 형주가 함락되면서 유비는 큰 타격을 입었다. 같은 해 조비는 한 헌제를 협박하여 선양을 받았다. 당시 헌제가 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유비는 221년 성도에서 황제에 올랐다. 군사 제갈량을 승상으로 봉하고, 한 고조의 태묘를 세워 한나라 황제들을 함께 제사지냈다. 한실의 종친 신분으로 한나라의 명맥을 이어받으며 국호는 여전히 ()’이었다. 동한을 중한(中漢)’이라 부르고, 유비가 황제가 된 이후 시기를 계한(季漢)’이라 불렀다. 조위는 계속해서 이를 촉국이라 불렀다.
 
같은 해,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어 손권을 토벌했다. 형주를 되찾으려 했으나, 대장 장비가 전쟁 전에 부하 장달과 범강에게 살해당하는 불행이 있었다. 후에 222년 여름, 육손에게 이릉지전(夷陵之戰)에서 패배하여 결국 백제성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유비는 2234월에 승하했고, 시호는 소열제이다. 황태자 유선이 즉위했으며, 유언으로 대신들인 제갈량과 이엄이 조정을 보좌했다. 제갈량은 즉시 동오와 화친하여 연오항조(聯吳抗曹)의 정책을 회복했다. 촉이 멸망하기 전까지 양국 간에는 더 이상 전쟁이 없었다.
 

2) 제갈량 집정 시기

 
유비가 죽은 후, 유선은 어렸기 때문에 제갈량이 실질적으로 촉한의 실권을 장악했다. 부를 열어 정사를 처리하고, 백성들을 쉬게 하고 양성하며, 제도와 법률을 완비하여 촉한의 국력은 이릉지전의 대패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225, 제갈량은 남중 여러 군의 반란을 평정하고, 남중 소수민족 부족을 항복시켜 이엄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촉한의 후방 문제를 해결했다. 이후 촉한의 30여 년 역사에서, 내외적으로 조위와의 전쟁 하나에만 집중했고, 위오 양국의 정변이나 반란 등의 상황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228,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한중을 나와 첫 번째 북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가정전역(街亭戰役)에서 패배했고, 이에 큰 책임이 있는 참군 마속을 법에 따라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229, 오왕 손권이 황제를 칭하고 사자를 촉에 보냈다. 촉한의 여러 신하들은 손권이 황제 칭호를 참칭했으니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일단 동오와 전쟁을 벌이면 승부를 가리기 어렵고, 조위만 이득을 볼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장은 손오와 동맹을 맺어 위에 대항해야 하며, 손권의 참칭 죄를 문책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자를 보내 손권의 즉위를 축하하고, 위를 멸망시킨 후 천하를 나누자는 손권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촉한 사자 등지는 손권에게 위를 멸망시킨 후에도 두 나라는 한 번의 전쟁을 더 치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후 제갈량은 계속해서 북벌을 이어갔지만, 여러 차례 보급선이 너무 길고 군량이 부족하여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북벌은 계속 중대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중 건위지전(建威之戰) 후에 본래 조위에 속했던 무도(武都)와 음평(陰平) 두 군을 점령했다. 234, 제갈량은 다섯 번째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사했다.
 

3) 제갈량 사후의 정권 변화

 
제갈량이 죽은 후 유선은 군정 대권을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회수하기 시작했다. 또한 장완(蔣琬), 비의(費禕), 동윤(董允) 등 중신들에게 조정의 정사를 맡겼다. 대장군 장완은 여러 차례 강유(姜維) 등을 파견해 조위를 공격했다. 246년 장완이 죽은 후 비의가 권력을 잡았는데, 그는 과도한 군사 공격을 주장하지 않았다. 같은 해 동윤이 세상을 떠났고, 유선은 환관 황호(黃皓)와 총신 진지(陳祗)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조정의 정치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비의는 253년 암살당해 사망했다.
 

4) 강유의 북벌과 내부 갈등

 
대장 강유는 247년부터 북벌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군사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비의가 죽은 후인 253년에 강유는 촉한의 군사 대권을 장악하고 조위에 대한 대규모 군사 작전을 262년 마지막 북벌까지 감행했다. 심지어 한때는 해마다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이는 촉한의 국력을 심각하게 소모시켰고, 백성들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
 
강유는 환관 황호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유선에게 상서하여 황호를 처형할 것을 요청했다. 황호는 이 사실을 알고 강유를 폐하고 염우(閻宇)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조정의 대신들인 제갈첨(諸葛瞻), 동궐(董厥) 등도 강유가 여러 차례 위나라를 정벌했지만 성과가 미미한 것에 반감을 느꼈다. 그들은 유선에게 상서하여 강유를 불러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삼고 그의 병권을 빼앗을 것을 요청했다. 강유는 농서 답중(陇西沓中)으로 피신하여 둔전(屯田)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외적으로 심각한 분열이 생겼고, 한중(漢中)의 관문은 크게 열렸다. 당시 조위의 실질적 권력자 사마소(司馬昭)는 촉한 조정의 상황을 알게 된 후 촉을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5) 촉한의 멸망

 
2638, 사마소는 정서장군(征西將軍) 등애(鄧艾), 중호군(中護軍) 제갈서(諸葛緒), 진서장군(鎮西將軍) 종회(鍾會)를 보내 세 방향으로 남하하게 했다. 이로써 위멸촉지전(魏滅蜀之戰)이 시작되었다. 한중이 함락되었고, 종회군은 답중에서 돌아온 강유에게 검각(劍閣)에서 저지당했지만, 등애는 군대를 이끌고 부성(涪城, 현재의 면양시)을 기습했다. 촉한의 강유 수장 마막(馬邈)은 위군이 갑자기 나타나자 당황하여 위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등애는 계속해서 성도로 진격하여 수비하던 위장군(衛將軍) 제갈첨을 격파하고 살해했다. 11, 유선은 대신 초주(譙周)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도의 문무백관을 이끌고 항복했다. 이로써 촉한은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한편 강유는 종회에게 가짜로 항복했다. 그는 종회의 야심을 이용해 그가 모반을 일으키도록 부추기고, 위군 내부의 혼란을 만들어 기회를 틈타 종회를 죽이고 군권을 탈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실패하여 종회와 함께 위군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4. 촉한의 인구

 
촉한(蜀漢)의 전성기에는 30만 호() 이상을 보유했으며(형주[荊州]를 잃기 전), 인구는 약 100만 명으로 삼국 중 가장 적었다. 한 소열제(漢昭烈帝, 유비)가 즉위한 장무 원년(章武元年, 221) 당시, 호구(戶口)는 다음과 같았다:
  • 20만 호 90만 명의 인구
그 후 제갈량(諸葛亮)이 촉을 다스리면서 점차 발전하여, 촉한이 멸망한 263년에는 다음과 같은 수치를 기록했다:
  • 총 인구 : 1,082,000
  • 호수 : 28만 호
  • 민간인 수 : 94만 명
  • 무장 병사 : 102천 명
  • 관료 수 : 4만 명
 

5. 촉한의 역대 황제

 
대수묘호시호성명연호재위기간능호
제1대한 열조(漢烈祖)소열황제(昭烈皇帝)
선주(先主)
유비(劉備)장무(章武) 221~223년221~223년혜릉(惠陵)
제2대-효회황제(孝懷皇帝)
후주(後主)
안락사공(安樂思公)
유선(劉禪)건흥(建興) 223~237년
연희(延熙) 238~257년
경요(景耀) 258~263년
염흥(炎興) 263년
223~2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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