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0일 수요일

앙겔로스 왕조(Angelos dynasty) 시대의 비잔틴 제국 : 몰락으로 치달은 20년

앙겔로스 왕조(Angelos dynasty) 시대의 비잔틴 제국 : 몰락으로 치달은 20

 
앙겔로스 왕조(Angelos dynasty)1185년부터 1204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했다. 이 시기는 제국이 전례 없는 쇠퇴를 겪으며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격동의 20년이었다. 앙겔로스 가문은 콤네노스 왕조(Komnenos dynasty)의 마지막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Andronikos I Komnenos)가 폐위된 후 황위에 올랐지만, 이들은 제국을 둘러싼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혼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s)의 끊임없는 침공을 막지 못했고, 불가리아 제국(Bulgarian Empire)의 재건을 허용했으며, 달마티아(Dalmatia) 해안과 발칸 반도 내 주요 영토를 헝가리 왕국(Kingdom of Hungary)에 빼앗겼다.
 
 
내부적으로는 황족들 간의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아 재정적 역량과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서유럽과의 개방 정책이 이어졌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 시기의 라틴 학살은 서방 국가들의 비잔티움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 앙겔로스 왕조 아래에서 제국은 극도로 약해졌고, 결국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Fourth Crusade)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가 함락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이 분할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1. 앙겔로스 가문의 부상과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Isaac II Angelos, 1156~1204)의 즉위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Andronikos I Komnenos, 1118~1185)는 잔인한 숙청과 폭정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귀족과 시민들의 불만을 극에 달하게 했다. 1185, 그의 폭정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Alexios I Komnenos)의 증손자인 이사키오스 앙겔로스(Isaac Angelos)가 권력 다툼 속에서 예상치 못하게 황위에 오르게 된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자신에게 해를 가할 예언의 주인공으로 이사키오스 앙겔로스가 지목되자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이사키오스는 체포조를 죽이고 아야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에서 반란을 선동했다. 수감자들이 풀려나 폭동에 가담했고, 결국 안드로니코스 1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는 혼란 속에서 황위에 올랐다. 그는 노르만족의 침공이라는 외부 위협에 직면했는데, 노르만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불과 320km 떨어진 모시노폴리스(Mosynopolis)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이사키오스 2세는 유능한 장군 알렉시오스 브라나스(Alexios Branas)를 파견하여 노르만군을 격파하는 초기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의 통치는 전반적으로 무능력했다. 그는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했고, 제국은 계속해서 영토를 상실했다. 특히 중요한 사건은 불가리아의 반란이었다. 노르만군과의 교전으로 제국의 주력군이 부재한 틈을 타, 페트로스 4(Peter IV of Bulgaria)의 지휘 아래 불가리아인들이 봉기하여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을 재건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불가리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군사 원정을 이끌었으나, 비잔티움군은 만지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와 유사한 방식으로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학자들은 이 패배 이후 이사키오스 2세의 정책이 거의 즉흥적이고 반동적인 수준에 머물렀다고 평가한다. 그는 재정 문제 해결에도 실패하여 부패를 조장했고,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다.
 

2.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Alexios III Angelos, 1153~1211)의 찬탈과 제국의 무능력 심화

 
이사키오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불만과 무능력은 쌓여갔다. 결국 그의 형인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Alexios III Angelos)1195년 이사키오스 2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이사키오스 2세는 감금되었고, 그의 눈은 멀었다.
 
 
알렉시오스 3세의 통치는 더욱 비극적이었다. 그는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황제였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보다 측근들의 조언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동시대 역사가 니키타스 코니아티스(Nicetas Choniates)는 알렉시오스 3세가 황제에게 제출된 모든 문서를 즉시 서명했으며, 내용이 아무리 터무니없어도 개의치 않았다고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황제의 성격은 제국의 재정적 어려움과 군사적 약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국가 재산을 낭비하고 관직을 매매하여 부패를 조장했으며, 이로 인해 제국의 재정은 더욱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외부적으로는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이 끊이지 않았고, 발칸 반도에서는 불가리아 제국의 세력이 더욱 공고해졌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러한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의 영토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특히 서방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 시대의 라틴 학살은 비잔티움에 대한 서방의 적개심을 키웠고, 알렉시오스 3세는 이를 완화할 능력도 의지도 부족했다. 이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이 비잔티움 제국으로 향하는 배경이 되었다.
 

3.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Alexios IV Angelos, 1182~1204)와 제4차 십자군 원정의 개입

 
1201, 폐위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앙겔로스(Alexios Angelos), 즉 훗날의 알렉시오스 4세가 감옥에서 탈출하여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그는 십자군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황위를 되찾아달라고 요청하며 막대한 재정적 보상과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십자군에게 약 20만 은 마르크(silver marks)를 지불하고, 1만 명의 병사를 성지에 파견하며, 비잔티움 교회를 로마에 종속시키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앙겔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래 목표였던 이집트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이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12037,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알렉시오스 3세를 몰아내고 이사키오스 2세를 복위시켰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와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약속했던 막대한 보상금을 십자군에게 지불할 능력이 비잔티움에는 없었다. 제국의 국고는 텅 비어 있었고, 시민들은 십자군에게 자비를 지불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알렉시오스 4세는 시민들로부터 강제로 세금을 걷고 교회 재산을 압류하며 약속을 이행하려 했지만, 이는 시민들의 불만과 황실에 대한 반발만 키웠다. 그는 십자군과의 관계와 시민들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며 어떠한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4.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Alexios V Doukas, ?~1204)의 등장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알렉시오스 4세의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12041월에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을 주도한 인물은 황족인 알렉시오스 두카스(Alexios Doukas)였다. 그는 12042월 알렉시오스 4세를 폐위하고 살해했으며, 병약한 이사키오스 2세도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다.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라는 이름으로 황위에 올랐다.
 
 
알렉시오스 5세는 십자군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십자군에게 더 이상 지원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그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미 비잔티움 제국을 약탈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5세의 단호한 태도는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할 명분을 제공했다. 12044,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재차 공격했고, 도시는 처절한 약탈과 파괴를 겪으며 함락되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 약탈 직전의 비잔티움 제국
1204콘스탄티노플 약탈 직전의 비잔티움 제국
 
알렉시오스 5세는 십자군의 공격에 맞서 수도를 방어하려 노력했지만, 이미 제국의 군사력은 약화될 대로 약화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버리고 도주했고, 이후 십자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로마 제국의 심장이 서방 기독교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약탈당한 것이다.
 

5. 앙겔로스 왕조의 유산과 제국의 분열

 
앙겔로스 왕조의 20여 년간의 통치는 비잔티움 제국에게는 재앙과 같은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제국은 외부의 적에게 영토를 지속적으로 상실했으며, 내부적으로는 황제들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황실 간의 권력 다툼이 만연했다. 이러한 총체적인 난국은 결국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제국의 분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십자군은 라틴 제국(Latin Empire)을 세우고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분할했다. 비잔티움인들은 니케아 제국(Empire of Nicaea), 트레비존드 제국(Empire of Trebizond), 에피로스 전제공국(Despotate of Epirus) 등 여러 후계 국가들을 세워 비잔티움의 명맥을 이어나가려 했다. 앙겔로스 왕조는 비록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통치한 마지막 비잔티움 왕조가 되었지만, 그들의 통치는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결국은 몰락으로 이끈 책임이 크다. 이들의 실패는 비잔티움 제국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최종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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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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