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0일 수요일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Alexios V Doukas, AD.?~1204) : 동로마 제국 제117대 황제(AD.1204)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Alexios V Doukas, AD.?~1204) : 동로마 제국 제117대 황제(AD.1204)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 : 콘스탄티노플 함락 직전의 비운의 황제 (12042-4)
  • Alexios V Doukas
  • [Greek : Ἀλέξιος Δούκας / romanized : Aléxios Doúkās]
  • Mourtzouphlos / Murtzuphlus [Μούρτζουφλος]
  • 출생 : 미상
  • 사망 : 120412
  • 배우자 : Philokalina, Eudokia Angelina
  • 재위 : 1204127~ 412
  • 대관식 : 120425
 
요안니스 조나라스의 『역사 발췌집』 사본이 포함된 15세기 필사본에서 나온 알렉시오스 5세의 초상화
요안니스 조나라스의 역사 발췌집』 사본이 포함된 15세기 필사본에서 나온 알렉시오스 5세의 초상화
 

1. 서론 : 제국의 벼랑 끝에서 등장한 마지막 방패

 
1204413, 천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서유럽 십자군에게 함락되는 전례 없는 비극을 맞이했다. 이는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자, 중세 유럽 역사의 흐름을 뒤바꾼 대변혁의 순간이었다. 이 비극적인 함락 직전, 불과 두 달여 동안(12042월부터 4월까지) 제국의 황제 자리에 앉아있던 인물이 바로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Alexios V Doukas, ?-1204)이다. 그의 통치는 매우 짧았지만, 그는 멸망 직전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마지막 비잔틴 황제로 기록된다.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는 무르추플로스’(Mourtzouphlos)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그의 짙고 붙어 있는 눈썹을 묘사하거나 울퉁불퉁한’, ‘음울한성격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였다. 그는 쿠데타를 통해 황제에 올랐으며, 선대 황제들을 폐위시키고 제거하는 냉혹함을 보였다. 그러나 막상 황제가 된 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제4차 십자군(Fourth Crusade)에 맞서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결국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었고, 제국의 수도는 처참하게 함락당했으며, 그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1261년 비잔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기 전까지 콘스탄티노플을 통치한 마지막 비잔틴 황제로 역사에 남게 된다. 이 글에서는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의 생애와 권력 장악 과정, 그의 짧았던 통치 기간 동안의 노력과 한계,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와 역사적 평가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2. 시대적 배경 : 앙겔로스 왕조의 몰락과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침공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가 등장하기 전의 비잔틴 제국은 이미 오랜 기간 동안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12세기 말, 코메노스 왕조(Komnenos dynasty)의 마지막 유능한 황제 마누일 1세 코메노스(Manuel I Komnenos, 1118-1180)의 죽음은 제국에 거대한 권력 공백과 혼란을 가져왔다.
 
  • 앙겔로스 왕조의 무능 : 마누일 1세의 죽음 이후, 앙겔로스 왕조(Angelos dynasty)의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Isaac II Angelos, 1156-1204)와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Alexios III Angelos, 1153-1211)가 연이어 황위에 올랐으나, 이들은 모두 무능하고 부패한 통치자들이었다.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의 재정은 파탄나고, 군사력은 약화되었으며, 외부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발칸 반도에서는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이 부활하여 비잔틴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동부와 서부 국경에서는 지속적인 영토 상실이 이어졌다.
  • 4차 십자군의 변질 : 본래 이집트를 목표로 했던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공화국(Republic of Venice)의 개입과 복잡한 정치적, 재정적 이해관계에 얽혀 목표를 변경하게 된다. 1202, 십자군은 비잔틴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이자 당시 망명 중이던 알렉시오스 앙겔로스(훗날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의 설득을 받아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기 시작했다. 알렉시오스 앙겔로스는 십자군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를 복위시키고 자신을 공동 황제로 옹립해 주면 막대한 보상금과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2037) : 1203,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수도를 포위하고 공성에 돌입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무능하게 수도를 버리고 도주했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그들은 폐위되었던 이사키오스 2세를 감옥에서 풀어 황제로 복위시키고, 그의 아들 알렉시오스 앙겔로스를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Alexios IV Angelos, 1182-1204)로 공동 황제에 옹립했다.
 

3. 알렉시오스 5세의 등장 : 혼란 속에서 권력을 장악하다(12041)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의 본명은 알렉시오스 두카스이며, 두카스 가문 출신이다. 그의 정확한 혈통은 불분명하나, 강력한 비잔틴 귀족 가문인 두카스와의 연관성이 제기되었다. 일부에서는 그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코메노스의 고손자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1) 알렉시오스 4세의 실정과 민심 이반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는 공동 황제가 되었지만, 그들의 통치는 십자군에게 약속했던 막대한 보상금을 충당하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알렉시오스 4세는 제국 국고를 쥐어짜고, 교회 재산을 압수하며, 시민들에게 고액의 세금을 부과했다. 이러한 과도한 세금과 재정 착취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극심한 반발과 불만을 야기했다. 십자군은 약속된 보상금이 제때 지급되지 않자 콘스탄티노플 내부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았고, 시민들의 종교적 감정을 자극했다. 이는 라틴인에 대한 반감을 극대화시켰고, 십자군을 불러들인 알렉시오스 4세에 대한 증오로 이어졌다.
 
알렉시오스 4세는 약속 이행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제국은 이미 파산 직전이었고, 십자군의 요구는 끝이 없었다. 그는 십자군과 시민들 사이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으며, 누구에게도 신뢰를 얻지 못했다. 시민들은 그를 십자군의 앞잡이로 여겼고, 십자군 또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황제로 간주했다.
 

2) 궁정 쿠데타와 황제 즉위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는 이러한 혼란과 반라틴 정서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이사키오스 3세 앙겔로스의 딸 에우도키아 앙겔리나(Eudokia Angelina)와 결혼하여 앙겔로스 가문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알렉시오스 4세와 이사키오스 2세의 치세에 고위 궁정 관리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특히 반라틴 강경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시민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1204127,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수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알렉시오스 4세를 폐위하고 투옥했으며, 스스로 황제에 올라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로 즉위했다. 그의 즉위는 십자군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등에 업은, 포퓰리즘적인 성격이 강한 권력 찬탈이었다. 그는 황제에 오른 후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를 목 졸라 죽였고, 그의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도 며칠 후 충격으로 사망했다. 이는 멸망 직전의 비잔틴 제국에서 벌어진 마지막 유혈 황위 계승이었다.
 

4. 알렉시오스 5세의 짧은 통치 : 콘스탄티노플 방어의 필사적인 노력(12042-4)

 
알렉시오스 5세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십자군과의 모든 협력을 거부하고,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의 짧은 통치는 제국 최후의 몸부림과도 같았다.
 

1) 방어 강화와 재정 확보

 
알렉시오스 5세는 십자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 방어 시설 보강 : 그는 우선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보수하고, 방어선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수세기 동안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an Walls)의 취약점을 보완하려는 시도였다.
  • 재정 확보 :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교회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금은 보화를 강제로 징발했다. 이는 제4차 십자군과의 협력을 위해 교회 재산을 십자군에게 바치려 했던 알렉시오스 4세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의 이러한 단호한 재정 확보는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
  • 군사 재편 : 그는 약해진 비잔틴군을 재편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 노력했다. 병사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지급하고, 그들을 훈련시키는 데 집중했다.
 

2) 십자군과의 대치와 실패한 협상

 
알렉시오스 5세는 십자군과의 모든 협상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십자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며,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지 않는 한 그들에게 아무것도 지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성내의 라틴인’(서유럽인)들을 억류하여 인질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미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5세는 십자군과 몇 차례 소규모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잠시 사기를 진작시키기도 했지만, 십자군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준비된 공성 기술에 비하면 그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결국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했다. 120449일 첫 번째 공격은 비잔틴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했지만, 412일 두 번째 총공세에서 십자군은 수도의 성벽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5. 알렉시오스 5세의 몰락과 비극적인 최후(12044)

 
십자군이 수도의 성벽을 돌파하자, 알렉시오스 5세는 더 이상의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1204413일 새벽,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하여 트라키아로 도주했다. 그의 도주는 멸망 직전의 제국을 지키려던 마지막 시도를 허물어뜨리고, 콘스탄티노플을 십자군의 잔혹한 약탈에 노출시켰다.
 

1) 도주와 아버지에게의 의탁

 
알렉시오스 5세는 처음에는 폐위된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그의 장인이자 이모부)가 은신하고 있던 모시노폴리스(Mosynopolis)로 피신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3세는 자신의 사위를 환영하기는커녕,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잡기 위해 그를 체포하고 눈을 멀게 하는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의 폐위에 깊이 관여했던 알렉시오스 5세 역시 같은 방식으로 비참한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2) 십자군에 의한 체포와 처형

 
눈이 먼 알렉시오스 5세는 십자군에게 생포되었다. 십자군은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와, 약속을 지키지 않은 황제 부자를 살해하고 십자군을 적대한 책임을 물어 재판에 회부했다. 사실상 그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대죄에 대한 속죄양이 되었다.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는 1204년 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테오도시우스 원기둥(Column of Theodosius) 꼭대기에서 던져져 처형당했다. 이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로서의 그의 삶과 역할을 종결짓는 비참하고도 상징적인 최후였다.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에게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수많은 보물과 예술품이 서유럽으로 약탈되었고, 시민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어 '라틴 제국'(Latin Empire)이라는 이민족의 통치 아래 놓이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6.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의 역사적 평가 : 비극의 인물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 용기와 결단력 : 그는 비록 황제 자리를 쿠데타와 살육으로 얻었지만, 즉위 후에는 제4차 십자군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회피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전임 황제 알렉시오스 3세가 수도를 버리고 도주한 것과 달리, 그는 직접 방어를 지휘하고 재정을 확보하며 시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 노력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을 지키려 했던 용기 있는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 비잔틴 국민의 지지 : 그는 반라틴 감정에 호소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었고, 실제로 성상 재정 징발이나 방어 노력 등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는 그가 적어도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음을 보여준다.
  • 잔혹함과 권력욕 : 그러나 그의 권력 장악 과정은 매우 잔혹했다. 선대 황제 알렉시오스 4세와 이사키오스 2세를 폐위시키고 제거한 행위는 그의 권력욕과 냉혹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폭력적인 수단으로 권력을 획득했고, 결국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잃었다.
  •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못한 비운의 황제 :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기울어가는 제국과 십자군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비잔틴 제국은 이미 오랜 기간의 부패와 무능으로 쇠약해져 있었고, 십자군의 군사력과 복수심은 너무나 강력했다. 알렉시오스 5세는 멸망 직전의 제국을 잠시 붙잡아 두려 했을 뿐, 그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던 비운의 황제이다. 그의 통치 기간은 비잔틴 제국이 제4차 십자군에게 최종적으로 함락당하는 최후의 순간과 정확히 일치하며, 그는 이 비극적인 역사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 인물이 되었다.
 

7. 오늘의 상황에서 : 위기 속 리더의 책임과 운명의 무게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의 이야기는 13세기 비잔틴 제국의 비극적인 한 단면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리더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알렉시오스 5세는 재위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라는 대재앙의 순간이었기에 그의 리더십은 더욱 부각된다. 그는 위기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강력한 조치들을 취하며 수도를 방어하려 노력했다. 이는 무책임하게 도주한 전임 황제 알렉시오스 3세와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에도 위기 상황에서 리더가 보여야 할 용기와 결단력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동시에 알렉시오스 5세의 노력만으로는 제국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다는 한계 또한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한 개인이 아무리 유능하고 노력한다 해도,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구조적인 문제와 시대적 흐름을 혼자서 바꾸기는 어렵다는 냉혹한 현실을 일깨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때때로 개인의 의지를 압도할 만큼 거대하게 움직인다.
 
알렉시오스 5세의 삶은 권력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고, 결국 비극적인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이야기는 리더가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멸망 직전의 제국을 지키기 위한 그의 필사적인 노력은 그 시대의 황제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려 했던 비잔틴인의 마지막 의지를 엿보게 한다.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는 비잔틴 제국의 종말이라는 어두운 역사 속에서, 용기와 비극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인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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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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