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1일 토요일

윤치영(尹致暎,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 [2] 해방 이후

윤치영(尹致暎, 1898210~ 199629)
 

대한민국의 사상가, 정치인, 언론인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내무부 장관, 주프랑스 공사를 역임했다. 본관은 해평 윤씨, 호는 동산(東山).
 
한 살 연상의 조카 윤보선은 그의 둘째 형 윤치소의 장남이었다. 인촌 김성수의 아들 김상석(金相晳)이 그의 사위이다.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는 그의 본처의 처남인 동시에 사돈이기도 했다.
 
1945
 
  • 1945년 초 일본에서 불령선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야산으로 끌고가 처형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뒤 도망치려다가 양주군에서 다시 되돌아왔다.
  • 1945년 초 광복 직전, 윤치영은 일체의 대외활동을 자제하였다. 기업, 광산사업이 실패한 뒤 별다른 뚜렷한 직업이 없던 그는 아내가 가정 부양을 맡았다. 그의 일과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임영신의 집에 가서 그가 삶아주는 닭고기를 먹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비밀리에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밀청했다.
  • 1945815일 광복이 되자,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그는 장덕수, 임영신 등과 함께 별도의 국민정당 조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민당이 창당된다는 소식을 듣고 활동을 중단하고 한민당에 가담하였다.
  • 19459238도선 이남에 미군정이 주둔하자 미군정청 재무부 재산처분국장에 임명되었다.
  • 96일 오전 그는 경기여고 강당에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수립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집 안국동 104번지에서 담 하나 사이인 당시 경기여고 강당에는 6백여 명이 모여 소위 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여운형은 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 허헌 등과 함께 각본대로 좌익 인사들이 중심이 된 55인의 헌법기초위원을 정하고 소위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정부 조직법을 통과시켰다. 경기여고 강당에서 담장 하나 건너편에 있던 윤치영은 자기 집에서 이 장면을 목격했다.
  • 96일 송진우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약칭 국준)을 조직하였다. 윤치영은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조사부장 겸 외교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 916일 경성부에서 결성된 한국민주당 창당에 공동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한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송진우의 임정 봉대론에 동조하였고, 임정을 추대해야 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 19451012일 이승만이 귀국하자 공항장으로 나가 그를 영접했다. 19451012이승만의 귀국 이후, 돈암장의 이승만(李承晩)의 공보비서로 활동하였고 비서실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한민당 활동은 소원해졌고, 자연스럽게 한민당과 멀어져갔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는 1012일 저녁 중앙방송에 출연, “대표적인 친일파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일체 문책하지 않겠다.”라고 방송을 하여 민심을 수습시켰다.
  • 최기일은 윤치영과 면담하였다. 최기일은 윤치영에게 이승만 박사가 지도자로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학생층과 이북 출신 청년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치영은 자신의 생각과 일치했던 최기일에게 청년 및 학생단체를 다루어 줄 것을 부탁하며 자신의 비서로 채용했다. 그는 2년 동안 돈암장에서 생활하면서 이승만 박사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윤치영이 맡긴 소임대로 최기일은 많은 실력 있는 젊은 사람들을 이승만에게 소개했다.
  • 윤치영은 이승만을 방문하는 방문자를 선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돈암장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윤치영, 임영신의 눈에 들어야 했다. 특히 윤치영이 싫어하는 사람은 돈암장에 절대 출입할 수가 없었다.
  • 윤치영은 청년 인재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최기일의 건의를 받아들여 청년들을 비서로 채용하였다. 이들을 통해 정치, 언론, 사회동향과 정보를 입수하고 자신의 비서이자 정보조직원으로 활용하였고, 그가 청년들을 통해 수집한 정보와 자료들은 이승만의 정세변화와 대응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이승만의 비서실장이 되면서 그는 한민당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끝내 한민당과 단절되었다. 이승만의 비서실장이던 그는 최기일 등을 자신의 공보비서로 채용하였으며, 인재들을 이승만에게 천거하기도 했다. 자신의 비서로 채용한 최기일 등을 이승만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 194512월 사촌형인 윤치호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의 활동에 관련되어 그는 비판받지 않았고, 윤치호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지는 않았다. 이후 1227일 경교장에서 열린 소집회의에 참석하였고, 1230일부터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 윤치영은 이승만의 사무 비서 외에도 이승만의 경호를 직접 담당하기도 했다. 시국이 점차 험하게 되어감에 따라 돈암장으로서도 정당한 자기 방어를 위하여 미군에게 무기를 양여받아 청년학도들을 무장시키게 되었는데 그 수효는 점차 늘어나 한창일 때는 7,8백 명 선에까지 다다랐다.
  • 그는 이승만의 비서진을 직접 짜기도 했다. 처음에는 유자후(이준 열사의 사위, 이승만의 공보 선전 담당 비서관), 황규면(영문 담당 비서), 윤석오(국한문 서신 담당), 임영신 등등이 업무를 분담하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임영신은 윤치영의 후처 이은혜와 함께 프란체스카 도너를 도와 돈암장과 이화장의 음식과 안살림을 도맡았다. 윤치영의 아내 이은혜는 이승만이 좋아하는 음식이 뭐고 싫어하는 음식이 무엇이며 맞지 않는 음식이 무엇인가까지 상세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윤치영은 (돈암장과 이화장) 집안 살림은 전적으로 아내가 책임을 맡아서 해냈는데 이 박사의 생활 습관이나 음식 기호 등 미국 시절부터 잘 아는 터였다라고 증언했다.
  • 이기붕을 사무비서로 고용한 뒤에도, 윤치영은 방문자 선별과 이승만 내외 경호 업무는 직접 맡았다. 송진우 암살과 여운형 암살, 장덕수 암살 이후로 윤치영은 밤을 새면서 이승만의 신변 안전을 위해 미군정이 보낸 경호원들과 함께 이승만을 직접 경호하였다. 그는 510 총선거 직전까지 이승만의 신변을 담당했는데, 나중에는 종종 짜증을 내기도 했다.
  • 태평양 전쟁 후반까지만 해도 윤치영은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과 중앙학교 동창인데다가, 여운형과도 친분관계가 있었으나 해방 이후 적으로 돌변하였다.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윤치영과 임영신은 여운형에 대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여서 좀처럼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 여운형은 강원룡에게 이승만, 김구 등 지도자들과 관련된 얘기를 해주었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이승만이 귀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승만을 개회식에 초대했다고 한다.
    여운형에 의하면 이승만은 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이 시작되어도 각도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은 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청년들을 보지도 않고 수행한 윤치영과 귓속말로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며 곧 퇴장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 정치적 노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를 초청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여운형은 인간적으로 섭섭했다면서 자기가 이 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했다. 해방 이전에는 사적인 일로 여운형과 자주 만나는 사이였으나 해방 이후에 그는 여운형을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1946
 
  • 19461월에 벌어진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반탁 운동에 앞장선 학련 운동원들을 적극적으로 독려, 치하하였으며 반탁을 통해 국민적 총의를 결집시키려 노력하였으나, 반탁 시위를 폭력사태로 규정한 미군정에 의해 저지된다.
  • 1946115일 독촉중협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윤치영은 향후 대책이 임정의 비상정치회의ㆍ반탁총동원회를 중협(中協)에다 어떻게 연결하느냐하는 점이라고 지적함으로써 독촉중협을 주축으로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 19462월 민주의원이 설치되자 민주의원 비서국장에 선임되었다.
  • 1946년 민주의원 사무총장에 피선되었다. 그해 임정에서 조직한 국제법급외교연구회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이승만을 대신하여 신태평양지 주필 겸 이사에 선출되었고, 1947년 서울시 경기연맹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이 경제보국회에서 3백만원을 얻어 쓰게 되었다. 이때 윤치영이 중간에서 얻어 쓰게 되었다. 미군정에서 감사를 해 보니까 이 돈은 이승만에게 갔고, 미군정에서 찾아오라고 하자 윤치영은 중간에서 일부를 소비하고 나머지를 이승만에게 갖다 주었으므로 윤치영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462월과 5월에 열리는 미소공위를 놓고 이승만과 김구가 미소공위를 결사 반대하자, 그 역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에 반대하는 칼럼과 강연, 홍보활동에 나섰다. 외국이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역설했고, 여러 청년들이 그의 주장에 호응했다. 462월 임영신 등과 함께 민주의원 대표 자격으로 UN에 파견, UN대표들에게 한국 정부의 조속한 수립에 협조해 줄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481월 인도 대표 크리슈나 메논을 단장으로 한 유엔한위 조사단의 파견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윤치영은 공로를 임영신에게 모두 돌렸다.
  • 194646일 조선항공사업사를 명칭을 바꾼 대한국제항공사 사장과 대한항공공업주식회사 사장에 임명되어 19472월 과도정부 재산처분국장으로 복귀할 때까지 재직했다.
  • 19465미군정에 끌려갔다 온 조봉암을 적극 지원하여 그의 전향을 유도한 것은 윤치영이었다. 19465,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에게 보낸 조봉암의 편지가 미군 정보 기관에 압수되어 공개된 일이 있었다. 이왕 미군정에 의해 이왕 공개될 것이면 자발적으로 공개하라고 유도했다.
    조선공산당을 장악하고 있던 박헌영의 당 운영에 불만을 품은 조봉암이 박헌영의 1인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편지를 신문에 공개하게끔 은밀하게 주선한 것이 바로 윤치영이었던 것이다. 미군정이 편지를 공개하기 전에 조봉암은 윤치영의 권고대로 선수를 쳐서 언론에 박헌영에 대한 비판을 공개비판으로 발표하고 전향을 선언하게 된다. 이는 조선일보와 안재홍의 한성일보에서는 특히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 1946615일 오후 5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그해 조선국제법학회와, 외교학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 이때 그는 경교장 측과 미군정 측 양측의 표적이 되었다. 19468월의 신익희의 쿠데타를 밀고한 일로 경교장과의 사이는 틀어지게 된다. 19468월 신익희는 무력으로 미군정을 접수하고 두 번째로 쿠데타를 시도할 계획을 세웠다. 신익희의 쿠데타 계획을 입수한 윤치영은 즉시 CIC 미군 방첩대에 신익희의 쿠데타 기도를 알렸다. 821, 822일에 장덕수, 윤치영 등은 미군 CIC에 신익희의 쿠데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정변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8
    22일 윤치영은 CIC요원에게 신익희가 1) 8·29에 중경임정 승인 탐색, 2) 영향력 있는 새 인물 임정에 배치, 3) 승인될 새 정부 구성 탐색, 4) 군정의 무능 드러내고 새 정부를 위한 요구를 주장하는 미군정에 대한 대중시위를 갖는다는 4단계 계획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1947
 
  • 1947318일 유진산, 엄항섭 등과 대한노총 창립에 참여하였다.
  • 한편 주한국 총영사이자 하지장군 정치고문이었던 랭던을 규탄한 익명의 진정서를 보냈다가, 진정서사건으로 이묘묵의 비판을 받고 이승만의 비서실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쿠데타가 좌절되자 신익희는 일을 폭로한 윤치영을 책망했고, 미군정과 갈등하던 윤치영은 후회한다. 19472월 안재홍이 민정장관이 되면서 미군정청 재산처분국장으로 복직한다.
 
1948
 
  • 1948년 이승만의 비서에서 밀려나자 이때부터는 이범석, 이기붕 등이 이승만을 주변에서 시종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프란체스카의 시중을 들던 조카딸 윤노라 역시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윤치영의 오랜 지우이자 이승만과는 한때 로맨스가 있었던 임영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윤치영의 부인에게도 거부감을 갖던 프란체스카는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가 사소한 심부름까지 하게 되면서 그들을 신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 19481UN한국위원단이 한반도에 입국하였다. 인도의 수상 자와할랄 네루가 개인적으로 반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그는 UN한국위원단 단원들, 특히 인도 출신 크리슈나 메논의 주변에 사람을 붙여 그의 발언과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 19484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YMCA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그는 연단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평양 일방 남북회담을 적극추진하고 있는 김구를 지적, 중국으로부터 귀국 시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으니 그는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다 라며 성토하였다. 윤치영의 성토가 있자 청중은 흥분하여 연설을 중단시키라며 연단으로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윤치영은 흥분한 청중을 피해 뒷문으로 뛰어 도망쳤다. 그는 김구 등의 단정 수립 반대를 호되게 비판했다. 윤치영은 남북협상이란 기만적인 술책이며 평양 일방 남북회담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백범의 명분은 옳았지만 이것은 우리 가슴에 칼을 내지르는 소리요. 결과적으로는 백범 망신에 그치고 만 것이 다행이지, 만약 그때 남북합작(南北合作)을 한다고 덤볐다가는 나라가 망했을 것입니다.”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형님 아우 하며 친분이 있던 김규식과의 연락도 끊었다. 김규식은 사촌형 윤치호와 친분이 있었고, 자신의 프린스턴 대학교 동창 김관식의 6촌 형이기도 했다.
  • 그 뒤 5105·10 단독 총선거에 서울 중구에서 무소속으로 제헌국회의원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출마 공약으로는 깨끗한 한표는 진정한 애국자”, “사랑하는 나의 조국 그리스도화 하자라고 공약하였다. 당시 서울 중구에는 그의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임영신이 출마했다.
  • 한편 그는 한국독립당 탈당파 중 17명의 여성을 제헌국회의원 후보로 출마시켰다. 황신덕의 언니인 황에스더도 윤치영이 마지막에 입후보시켰다. 윤치영은 황에스더가 서울 중구에 출마하도록 유도했는데, 김선은 여기 중구에 살지도 않는데 왜 했느냐고 하자 윤치영은 상관없다고 했다. 그가 황에스더의 출마를 권한 것은 여자 후보를 더 내서 여자 유권자의 표를 분산시키려 했다는 의혹도 있다. 윤치영은 선거기간 중 편지로 유세를 하였는데, 김선의 증언에 의하면 전부 편지를 써서 보성중학교 학생들한테 시켜서 각자의 집에 모두 편지를 보냈다. 우리(김선) 집에도 보냈다.”는 것이다.
  • 제헌 국회의원 선거기간 중 그는 한국독립당 탈당파 정치인들을 친이승만 진영으로 포섭, 끌어들이는데 노력했다. 한국독립당의 당원이었던 이들 중 상당수는 이념적 차이가 농후한 타 정당보다는, 차이점이 적은 이승만진영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윤치영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일부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하는데, 자금과 인력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 13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승리하여 530일 국회의원에 당선, 미군정청 재산처분국장 직을 사퇴했다. 6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서상일, 유진오, 조봉암 등과 함께 헌법 제정에 참여하였다.
  •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초안에는 국민을 인민으로 표현했다. 초안 작성자인 그가 국민 대신 인민이란 어휘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강하여 국가우월적 느낌을 준다. 반면에 인민은 국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표현한다. 그러니 유진오에 의하면 국가를 구성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개인을 표시하는 데 인민이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국회의원이던 윤치영은 대한민국 헌법 초안의 인민이라는 용어를 문제삼아 유진오를 통박하였다. 그는 인민이란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그러한 말을 쓰려고 하느냐. 그런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유진오)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흥분했다. 유진오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항의했고 윤치영은 틀린 말 하지 않았다며 맞받아쳤다. 국회는 논쟁이 벌어졌고, 윤치영은 인민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국회의원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인민이라는 용어는 대한제국의 절대군주 시절에도 사용되던 용어였다.
  • 530일 바로 장면, 이훈구 등과 UN한국위원회 교섭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됐다. 서울을 방문한 J. A 패터슨 등 국제연합 UN 대표단을 상대로 대한민국 국회가 합법적인 단체임을 승인해줄 것을 설득, 1948612UN 위원의 승인을 얻어냈다.
  • 1949626일 김구가 암살되자 바로 경교장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630일 김구의 국민장 장례기간 중 국민장 준비위원회에 참석, 상주하였다. 이후 그는 한국독립당 탈당파를 대한국민당으로 입당, 유치하는 정책을 펼친다.
  • 194871일부터 시작한 국회 본회의 헌법 초안 제2회독 때 국회의원 진헌식이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몇 개 조문을 제외하고 모두 인민으로 하자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역시 윤치영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인민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 좋은 말을 공산주의에 빼앗긴 셈 치고 포기하였다. 그는 38선 이북 조선에 공산주의 집단이 존재하는데 대한민국 국회에서 북괴와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유진오에게 따졌고, 유진오는 인민이라는 말은 People를 한글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며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그것도 모르느냐며 반박, 설전이 계속되었다.
  • 1948722일 대한민국 이승만정권의 조각 인선시 외무부장관의 물망에 올랐으나, 뒤에 장택상과 그 직이 바뀌어 초대 내무부장관으로 천거되었다.
  • 722일 바로 초대 내무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이후 815일 정부수립 이후 내무부 장관으로 비국 및 불국 한국특명전권대사, 국제 연합 총회 한국대표 등으로 해외에 다녀왔다. 소속 정당이 없었던 윤치영은 1948년 조봉암과 함께 이정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19488월초 정부수립 직전 겸임 한미정권이양한국특명전권위원이 되어, 915일까지 정권 이양 관련 사무를 맡아보았다. 초대 내무부 장관이었던 그는 특별히 총기휴대증을 발급받아, 총기휴대를 허락받기도 했다.
  • 1948810일 경찰기구 재편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완전한 조직이 될 때까지는 당분간 현재의 기구와 인원을 그대로 쓰겠으나 앞으로는 지방관구경찰청제는 없애고 서울 안에는 경시총감부(가칭)같은 것을 두어 인천 개성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 일원의 강력 치안확보에 대비하고자 한다. 그밖에 방금 훈련중에 있는 특무기관 정예들의 활동에 의하여 범죄의 과학적인 수사의 미연방지에 이바지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윤치영의 바램과는 달리 경찰 중앙집중화는 실현되지 못하였고, 중앙경찰청 산하 지방경찰청 체제로 정착되었다.
  • 그는 경찰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고, 이는 경찰권을 장악한 장택상, 조병옥 등과 수시로 갈등, 마찰하는 원인이 된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관으로 있던 자들을 등용했다며 경찰청을 공격했고, 조병옥은 Pro-jabPro-jap(일본)은 구별해야 된다는 논리로 맞섰다. 내각 조각 때부터 윤치영과 알력을 빚던 장택상은 조병옥의 손을 들어주었고, 내무부의 경찰권 장악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해 109일 여순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강경 진압론에 동조하였다.
  • 한편 윤치영은 내무장관 재직 중인 194810월경부터 암암리에 원내에서 이박사 노선을 지지하고 한국민주당을 견제할 수 있는 인사들을 규합하는 운동을 벌여나갔다. 이들을 통해 이승만 친위세력을 규합하고 야당들을 견제하려 하였다.
  • 194810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 중순 여수ㆍ순천 반란 사건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로 지목했다.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10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다. 여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강경 진압론을 주장하였고 극우 세력이 배후에 가담했다는 이범석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 1021일 오전 11시 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 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는 책동이며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라고 밝혔다. 여의도 국회 의사당에서는 소란이 발생했고, 그 극우파가 누구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윤치영은 극우파가 가담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대응했다. 이범석은 또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김구는 극우 정객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근거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이후 김구는 1027일 김구는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극우 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김구의 반박 보도문은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인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이 사건에 대해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이에 김구는 그 극우가 대체 누구냐며 윤치영에게 따졌고, 윤치영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극우 인사인 것은 분명하다며 응대하였다.
  • 1029일 윤치영은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사건에 관련된 정보를 발표했다.
    “10월 28일 오후 기관총 2정을 휴대한 무장 폭도 약 40명이 강화도에 상륙하였고, 북측으로 향하는 것 같아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 300명이 파견되었다”, 또한 서울 시내에서 남로당원이 열 아홉살 된 어린아이를 포함해 가족 네 사람을 찔러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있었으며, 동대문 밖에서는 민애청 단원이 수류탄을 잘못 던져 자신이 죽은 사건이 있었다는 사건을 공개했다. 그러나 강화도를 통해 월북을 시도한 무장 폭도들을 체포하지 못했고,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자세한 경과는 공개하지 않았다.
  • 48118일 윤치영은 북한의 최소한 8개 도시에서 공산지배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폭동이 1주일 전부터 일어났다고 발표했다. 그는 평양, 신의주, 원산, 함흥 등 기타 4개 도시는 폭동에 휩쓸려 들어갔으며 원산의 6천 명의 반도 전부는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어 윤치영은 청진, 함흥, 원산, 해주, 평양 등지로 확대되어 가는 북한의 대소동은 여수ㆍ순천 반란 사건으로 인한 남한의 공산화를 우려한 민중들이 각지에서 호응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벌어진 반공 시위는 소규모인데다가 바로 진압되었고,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 19481113일 여자국민당의 임영신, 대동청년단의 이청천, 한국독립당 탈당파 신익희, 함께 이정회에 가담했던 조봉암 등과 함께 친이승만 성향의 정당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국민당 당수를 지냈으며, 재선에 성공하여 2, 3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한민당을 주축으로 하는 내각개헌안이 제출되자 반한민(反韓民) 계열은 모두 이에 대한 반대 진영에 결집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반한민 계열의 총수로, 이재형은 그의 모사로 지목되었다. 대한국민당은 2대 국회 때에는 24명의 당선자를 내기도 했으나, 그 후 당세가 기울어서 약체를 면치 못했다.
 
1949
 
  • 19491월경, 주필리핀 특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고사하였다.
  • 그러나 대한국민당에서 신익희, 지청천 등이 탈당하여 당세가 약화되었다. 19492월 대한국민당 일부의 민국당 입당으로 당이 사실상 와해되자 그는 이정회를 조직하여 꾸렸다. 이정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데 선봉에 섰다.
  • 1949년 반민특위에서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때는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이기붕 세력, 장택상 세력 등과 경쟁관계에 놓였으며, 그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이승만의 주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 그는 국민당이 민족주의적 혁명세력임과 반공주의를 적극 홍보하여 김구 암살 후 해체 위기에 직면한 한국독립당의 당원들을 국민당으로 영입하는 활동을 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이념이 차이가 없었고, 임정 세력이었던 점과, 민족주의적 혁명 세력임을 적극 부각시켜 한민당과 차별을 둠으로써 공감대를 얻기도 했다. 해방 이후부터 청년층과 꾸준히 접촉하고, 축구, 야구 등의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거나 개입한 점 역시 효과를 보였다.
  • 줄곧 한국독립당계 인사들을 적극 영입하여 대한국민당으로 흡수하였다. 한편 국회 프락치 사건과 19491138선 근방에서 북한의 도발이 있자 그는 안보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소수 정당이었지만 국민당의 지위와 입지는 올라갔다.
  • 19491112일 이인, 임영신 등과 함께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했다.
 
1950
 
  • 19505월 제2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서울 중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족자주연맹의 원세훈(元世勳)에게 낙선하였다.
  • 19506한국 전쟁이 터지자 서울을 탈출, 대전에서 합류한 이후 한국 전쟁 당시 정부가 이전할 때 함께 이동하였다. 서울을 탈출하기 전 가족들을 미리 피신시킨 그는 인척인 이범석을 데리고 가려다가 그가 먼저 탈출한 것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비밀리에 전화연락과 서신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서울점령 소식을 알리고 피난, 은신할 것을 알리고 다녔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 19508월 미국에 파견되는 외교사절단 대표(특사 대우)에 임명되었다. 9월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미국에 도착했다. 9월 하순 일본 도쿄에서 영친왕 이은을 예방하고 일본 수상 이하 정계 인사들과 면담했다. 일본 정계 인사들을 만난 뒤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하고 미국에 도착하여 제5차 유엔 총회에 대표로 파견되었던 임병직을 만나 미국 정계 인사들을 방문하였다.
  • 한편 6.25 전쟁 중 공식 성명서를 내고 인도군과 일본자위대의 파견을 적극 반대했다. 인도군 파병에 반대한 것은 인도가 1948UN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비호의적이었던 것에 대해 악감정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도가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평생 반감을 가졌다.
 
1951
 
  • 195012월 미국 체류 중 그는 주 프랑스 공사관 공사에 임명되어 파리로 부임했으나, 유엔 총회가 끝나는 대로 빨리 돌아오라는 이승만의 호출을 받아 19514월 사표를 제출하고 귀국하였다.
  • 195112월 자유당(自由黨)이 결성되었다. 자유당에는 윤치영의 아내 이은혜의 인척이자 이승만의 강경파 측근 중의 한 사람인 이범석이 몸담고 있었으며 그에게도 입당 권유가 들어왔으나 그는 자유당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이범석에게 주변에 질시하는 이들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충고하였다.
  • 그 뒤 일일신문(日日新聞)사를 창간하고 사장 겸 주필이 되었으나 경영난으로 곧 폐간된다. 곧 제헌동지회 회장에 선출되고 1952년에는 다시 태평양주보사에서 사장으로 영입하였다.
 
1952
 
  • 1952년 잠깐 중앙대학교에 출강하여 국제법학 강사와 외교학 강사로 강의하기도 했다.
  • 19522월 보궐선거 때, 충청남도 공주에서 민의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대 민의원에서 윤치영은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 19525월 부산정치파동 당시 야당 의원들은 민주주의 수호를 이유로 연좌농성을 벌였다. 윤치영은 마작에 마약을 하는 애국자들 있다면서 야당을 향해 야유를 보냈다. 이에 마작을 할 줄 알았던 신익희나 정구영은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부산 정치 파동 때 그는 연좌시위를 하는 야당 의원들을 향해 너절한 놈들이라고 조롱하였다.
  • 국민 방위군 사건(1951), 부산정치파동 등을 목격한 윤보선은 이승만에게 사태를 바로 볼 것을 촉구했고, 주변에서 아첨하는 측근들을 내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윤보선이 그의 숙부인 윤치영이 자신에게 총애를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사적으로 청탁하는 것으로 여겨 이를 멀리했다. 실망한 윤보선은 이때 이승만과의 결별을 선언한. 그러나 윤보선이 이승만과의 결별을 계기로, 1920년대부터 이승만의 열성적인 추종자였던 숙부 윤치영과 멀어지게 된다. 윤보선은 윤보선 대로 한민당을 탈당한 윤치영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윤치영은 윤치영 대로 그가 이승만 박사에게 대든다고 판단했다.
  • 19527조봉암과 함께 민의원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축구와 야구, 달리기 등으로 체력이 다져진 그는 국회에서 난투극이 벌어질 때 순발력을 발휘해 단상위를 뛰어내리거나 피신했다. 국회부의장 재직 당시, 자유당의 조직부장 임철호에게 요직을 추천하는 김일훈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사이가 틀어졌다. 이후 조봉암이 대한국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의 리더가 되자 그는 개인적으로는 조봉암과 친분을 유지했지만, 이후 원내외에서 조봉암에게 비판과 비난이 쏟아질 때 감싸주거나 도와주지 않는다.
 
1954
 
  • 그는 자유당을 탈당해 호헌동지회(1954.11)에 가담한 정치인들을 향해 국회의원 금뱃지를 붙여주었더니 명월관에나 가서 기생 이마에 돈붙이는 놈들, 검사하다가 마작해서 파면당한 놈들, 우리가 등용했더니 국민 앞에서는 딴소리하는 놈들 투성이라며 야유하였다. 호헌동지회를 결성할 때도 그는 강력한 지도자가 사회를 단결시키는 법이라며 냉소를 보였다.
  • 그는 같은 이승만의 측근으로 함께 이승만을 모시던 측근들 중 이윤영, 임영신, 이범석과 절친하였다. 1공화국이 붕괴된 뒤에도 임영신이나 이윤영, 이범석의 개인적인 행사에는 늘 참석했고, 초청하였다. 박용만과도 가까이 지냈으며, 허정과는 다소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장택상과 상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의 성격이 맞지 않았고 초대 내각 때 자리가 바뀌면서 오해가 생긴 일로 오랫동안 척을 지고 지냈다.
 
1955
 
  • 19551월 유엔에 파견되는 대한민국대표단으로 파견되어 다녀왔고, 그해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하였다.
 
1956
 
  • 195653대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58
 
  • 19587월 대한국민당의 해산으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단기간 대학 강단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조봉암이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하던 상인 양명산의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문제 되자, 판단을 잘못한 것이라며 조봉암의 무죄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택상 등의 주도로 조봉암 구명운동이 전개되었을 때는 소극적으로 관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비호와 장택상 등 다른 사람들의 구명운동과 상관없이 그 해 10월 제2심 재판에서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 후일 그는 한 인터뷰에서 조봉암을 회고하면서 비극의 주인공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조봉암의 사법살인은 이기붕 일파와 자유당 당원들의 농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조봉암이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보면서도 자유당 일파들의 정치인 법살행위에는 분개했다.
 
1960
 
  • 19604대 정ㆍ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그는 부통령 출마의 변 중 하나로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나는 만송이 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면 그를 에워싼 아첨배들의 극성으로 나라의 장래를 그르칠 것이라고 염려가 되었고, 그러한 그들의 파당책 작폐를 예방하려는 뜻에서 내가 속해 있는 대한국민당의 부통령 후보로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당선되리라는 예상보다는 내가 고약하게 보고 있는 무리들에 업힌 이기붕 후보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낙선시켜야 한다는 하나의 사명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3월 15일 부통령 선거 기표결과 낙선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기붕은 부정선거 및 개표조작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었다.
  • 315 부정선거에 대한 후유증으로 419 혁명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의 측근이었다가 이기붕 등에 밀려났으므로 화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윤치영은 419 혁명을 419 사태라며 비판하였다. 윤치영은 419를 두고 김창룡의 요절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윤치영은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윤치영은 419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는 419‘419 사태라고 보았다. 그의 주장은 학생 운동권들의 격렬한 반발을 유발했다.
  •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인 허정은 1960529일 새벽 이수영 외무부 차관에게 이화장으로 가서 직접 이승만 내외를 모시고 나오도록 지시하고, 그는 직접 김포공항으로 나갔다. 허정이 이승만을 비밀리에 하와이로 출국시키고 이후 이승만은 1965719일 사후에 귀환한다. 윤치영은 개인적으로 이승만을 비밀리에 출국조치시킨 허정을 비판하였다.
    “한 두어 주일 후에는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담담한 표정으로 떠나간 이 박사는 이것이 영영 살아서 고국과의 이별이 되고 말았으니 그런 일을 꾸민 자세한 음모가 이제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나 개인으로는 당시의 정부를 책임지고 있었던 허정 과도정부 내각 수반과 하와이로의 일시 요양을 권고한 매카나기 주한미국 대사와 그 여행을 위해 심부름을 맡았던 이수영(李壽榮) 외무차관에게 그 경위를 묻고 싶다.”
  • 장면 내각 출범 이후 함태영 등을 중심으로 이승만의 환국운동이 추진되었다. 장면이 찾아와 그에게 내각 참여를 요청했지만, 그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거절했다. 윤치영은 이승만 환국운동이 일어나자 역시 환국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장면 내각의 반대로 이승만의 귀국은 무산되었고, 윤치영은 장면을 비난하였다. 윤치영은 장면의 이승만 귀국 저지를 비판함과 동시에 장면이 이승만을 세 번이나 제거하려 모략을 꾸몄다고 비판했다.
    “그 뒤로도 이 박사의 환국을 막아버린 장면 씨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박사 제거 음모를 꾸민 것은 휴전 반대와 반공포로 석방 때부터 두 차례나 되고 419를 빙자해서 끝내는 세 번째에 성공을 시켰으니 내가 지금까지 한스럽게 생각해 온 것은 이 나라와 지도자의 운명이다.”
  • 윤치영은 장면에 대해 냉소적이었으며, 장면 내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2공화국 기간 중 내내 윤치영은 이승만의 귀국 운동을 추진했는데, 2공화국 출범 이후 그는 장택상, 이범석, 함태영, 허정 등과 이승만의 귀국을 추진하는 이승만 박사 환국운동을 주도했다. 631월 이승만 박사 환국추진회의 결성에 동참하였다.
  • 윤치영은 제2공화국 당시 장면 내각의 시위, 집회의 자유가 혼란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던 반공주의 우익단체의 주장에 동조하여 우익시위와 집회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조카인 윤보선 대통령에게는 비판적이지는 않았으나, 딱히 협력하지는 않았다.
 
1961
 
  • 혁신세력의 통일시위가 격해지자 19613월 윤치영은 혁신세력을 자처하는 좌익계열의 조직분자들이 학생들을 앞세워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2대 악법이라고 규정짓고 더욱 거세가 국민 대중을 선동하며 연일 휏불데모까지 이어가며 기승을 부렸다고 비판하였다. 윤치영 등은 종로 1가에 있는 우주 다방을 중심으로 매일 모임을 갖고 움직임을 분석하면서 대응책을 세워나갔다. 이규갑, 임영신, 김두한, 원상남 등 주요 인사를 비롯해서 625 동란 시에도 결사대를 조직하여 활약했던 청년동지들 가운데 반성환(潘星煥), 한철민(韓哲民), 손진, 정태석(鄭泰錫), 유명욱(劉明郁) 등이 있었다.
  • 32861개 우익단체를 동원,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등지에서 좌경분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대대적인 데모를 우리들이 주동한 것을 기폭으로 하여 이제는 약체를 면치 못하는 민주당 정권을 뒤엎고 강력한 반공정권을 쟁취해야 한다는 결의가 다져졌다. 이것은 혁명모의가 분명했지만 당시의 실정으로서는 우리가 활로를 찾는 유일한 방략이라는데 뜻이 모아졌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대강 약 2억원으로 우선 성사시키고 그 이후의 일은 다시 조달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는데 자금 마련도 얼마 안 가서 5천여 만원에 달하였다. 그러나 우익단체의 혁명 모의는 정보가 장면 내각 담당자에게 새어나감으로서 경찰 등의 감시로 실패하였다. 정변이 실패하자 장면은 극우 인사라며 그를 공박했고, 감시하는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따라붙게 되었다.
  • 1961516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그는 군사 정변을 지지하였다. 이어 군사혁명위원회의 2인자였던 육군 소장 박정희가 직접 그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이어 지식인들의 516 군사 혁명 지지 성명이 있자 윤치영 역시 혁명 지지 선언에 동참한다.
 
1962
 
  • 1962년초 서울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516 군사 정변의 핵심 인물인 김모 씨 등을 만났다. 혁명의 취지를 설명하는 그에게 윤치영은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군정 중 공화당을 창당하기 위한 움직임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구국운동으로 생각하고 창당에 협조하기로 했다. 한편 구 자유당계 정치인들이 정치정화법으로 단죄될 때 그는 자유당 계열은 아니었으므로 정치정화법에 해당되지는 않았다.
 
1963
 
  • 1963년 초에는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활동했고, 박정희(朴正熙) 당시 국가재건최고희의 의장을 민주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추천하였으며, 민정(民政)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 뒤 19635월 정구영(鄭求瑛)의 뒤를 이어 제2대 민주공화당 의장에 선출되었다.
  • 그의 조카인 윤일선이 공화당의 사전 조직인 재건당의 리더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과 김종필의 꾸준한 설득과 극진한 예우가 그를 공화당으로 입당하게 했다. 이후 박정희를 만나 시국관과 강력한 반공주의와 민족국가론을 토론하면서 깊이 공감한 그는 공화당에 적극적으로 참여, 활동하게 된다.
  • 이승만 박사를 모시던 것과 같은 심정으로 박 대통령을 모시겠다.”
  • 이후 당시 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를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토록 한 것도 동산 윤치영이었다. 그는 여운홍과 함께 박정희 공화당 총재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군정 연장을 반대하던 야당에서는 그가 음모를 꾸민다며 비난했다.
  • 1963년초 박정희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의사를 보이자 그는 적극 환영하였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치영은 박정희의 선거 사무장으로 활약했다. 광주에서 그는 반만년래의 위대한 지도자이신 박정희 씨를 대통령으로!”라며 박정희의 지원 유세를 하였다. 그는 박정희 후보의 선거사무장 겸 선거대책본부 본부장으로 전국 순회강연, 유세를 다녔다. 그는 박정희라는 청년 정치인의 참신성과 함께 상대방이 한민당에서부터 내려온 구태 정치집단임을 강조했다. 626일 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김구 14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 남로당 전력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는 구 정치인들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자 930일 그는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한 정치인들 중에는 그의 조카였던 윤보선도 있었다.
  • 윤치영이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으로 선거관리를 총괄하면서 야당인사인 허정, 김준연과 야당의 대선 주자인 윤보선과도 갈등하였다. 윤보선의 어머니이자 윤치영의 형수인 이범숙이 윤치영의 안국동 집에 찾아와 통곡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치영과 윤보선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화가 난 윤보선은 윤치영을 만났을 때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그의 악수를 거절한다. 윤보선은 사석에서 그를 만났을 때도 수인사 조차 거절하였다. 윤보선과의 관계는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개선되었다.
  •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그는 전국구(민주공화당) 2번으로 당선되었다. 6대 국회에서 국회의장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공화당 당내 일각에서는 윤치영을 의장 후보로 미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당초 박정희는 196312월 초에 정구영을 청와대로 불러서 국회를 맡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윤치영에게 국회의장을 맡길 마음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정구영과 윤치영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박정희는 갈등을 겪기도 했다. 김종필은 국회의장은 정구영 선생하고 윤치영 씨가 팽팽하게 맞서 있는 상황이라 골치가 아픕니다라고 했다. 결국 국회의장직은 이효상에게 돌아갔다. 국회의장직에 낙마한 대신 그는 곧 관선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었다. 서울시장직에 취임하면서 그는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1964
 
  • 19645월 사퇴한 최두선 국무총리의 후임의 물망에 올랐으나, 야당의 집단 반발로 총리 지명은 무산되었다. 그는 자신이 한민당을 탈당했던 것에 대한 감정적인 정치보복이라며 야당 인사들을 맹비난하였다.
  • 1960년대 서울이 만원이 되자 윤치영은 아예 서울로의 이주의 자유를 제한하자고 제의한 적도 있었다. 서울특별시로 이주하는 것을 제한하자는 그 제안은 비난을 잔뜩 받았고, 실현되지 않았다. 서울특별시장을 거쳐 민주공화당에 재입당,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 7대 국회의원, 국토통일원 고문, 국회부의장 등을 지냈다. 19685월 다시 민주공화당 의장에 피선되었다.
  • 1964년 박정희,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일 회담이 추진되자 그는 이승만 정부의 10년간의 치적은 반공과 반일이라며, 일본이 식민통치에 대한 사과를 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외교를 체결하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 1964523일 대한웅변협회 제15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1965
 
  • 1965523일 다시 대한웅변협회 16대 회장으로 재선되었다.
  • 중앙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 수여
  • 722일 비행기를 통해 이승만의 유해가 귀국하자, 오전 8시경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이승만의 유해가 도착하자 영접하였다. 방송 인터뷰에 출연하여 이승만에 대한 회고를 하기도 했다. 윤치영은 허정, 장택상, 이범석 등과 이승만의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룰 것을 요구하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승만의 국민장(國民葬)을 추진하였으나,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國葬)을 고수하였다. 419 관련 단체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국장도 국민장도 안 된다며 대규모 시위, 집회를 열었다.
  • 박정희 집권기간 중 윤치영은 박정희를 가리켜 단군이래의 최고의 지도자라고 찬양하자, 야당에서는 이런 윤치영을 두고 단군 이래 최고의 아첨꾼이라고 맞받아치기도 하였다.
 
1967
 
  • 19671021일 대한웅변협회장직을 사직하였다.
  •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그해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의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하며 전국 순회유세를 다녔다.
 
1968
 
  • 19681219일 개헌의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윤치영 당 의장 서리가 한 지구당에서 행한 연설에서 흘러나왔다. 어느 조항인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윤치영은 개발도상국에서 근대화를 위해서는 일당이 장기간 집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선언했다. 윤치영은 개헌 문제야말로 국제상황의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해 공화당 당의장 서리에 취임하였다.
  • 건국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 수여
 
1969
 
  • 19691월초 박정희의 3선 개헌 시도가 공공연하게 알려지자 그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196917일 공화당 당의장 서리 자격으로 명동에 있는 한 경양식당에서 국회 상임위원장과 공화당 시도 지부장을 초대하여 오찬 모임을 주관하였다. 그것은 3선개헌 문제를 다루기 위한 첫 공식회의였다. 모임 초두에 윤치영은 이런 요지의 말을 하였다.
    “민족중흥을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단군 이래의 민족의 위인인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는 개헌을 해야 하며, 헌법상의 대통령 연임 금지조항을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당 간부들도 개헌 무드 조성에 앞장서 주었으면 한다. 이것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도발을 막고 경제건설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이다.”
  • 그는 공화당 당내에서도 3선개헌을 반대하는 일부 소장파 의원들을 설득하기도 하였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장기간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연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공화당 내에서도 3선으로 용퇴하라는 여론이 빗발쳤고, 그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경제발전의 동력을 계속 이어나가야 된다며 3선 퇴진론에 맞섰다.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비토하면서 쏟아지던 비판은, 윤치영에게 쏠렸다.
  • 1969118일 윤치영은 민족중흥의 강력한 리더십을 위해 3선개헌을 하겠다고 거듭 말했다. 57일 윤치영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발전을 위해선 박 대통령의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천명했다.
  • 그는 한국에는 한국식 민주주의가 필요한 법이라며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야당의 견해에 맞섰다. 1969412일 윤치영은 공화당 의장서리 자격으로 반 당() 행위를 조사하라는 총재 박정희의 지시를 받고 조사에 착수하였다. 196987일 윤치영 외 121명의 이름으로 된, 박정희 대통령에게 3선의 길을 터놓는 것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야당의 반발 끝에 3선개헌안은 통과되었다.
  • 528, 방한한 베트남 공화국 대통령 응오딘지엠을 영접하였다.
  •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70
 
  • 197017일 윤치영은 시국이 조국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강력한 지도 체제를 요청하고 있으므로 여당은 대통령 임기 조항을 포함한 헌법상의 결함을 연구ㆍ검토해야 한다는 그의 소신을 재차 피력했다.
  • 18일 공화당 정책위 부의장 김주인도 윤치영의 의견에 동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 위협이 가중되고 있는 이때, 강력한 영도자가 국가를 영도하기 위해 대통령 출마자의 3선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조항을 폐지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함으로써 윤치영 당 의장 서리의 견해를 되풀이했다.
  • 여당은 개발도상국에서 서구 선진국형의 정치 질서와 안정의 전제조건인 경제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강력한 영도 체제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한국의 현 시국은 박 대통령이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한번 더 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국민은 조국의 밝은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헌법적 장애를 제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력한 지도자와 리더십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유신 개헌을 지지하였다.
  • 197012월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이 되었다. 국무총리의 물망에도 올랐으나 신민당의 집단 반발로 무산되었다.
 
1971
 
  • 6, 국무총리의 물망에 올랐으나 신민당의 집단 반발로 무산되었다.
  • 미국을 방문, 고든 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Doctor of Letters)학위를 받았다.
  • 71,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972
 
  • 197210, 박정희의 10월 유신이 발표된 후, 학생 운동권으로부터 그가 10월 유신의 원흉이라는 성토가 쏟아져나왔으나 곧 긴급조치 발표로 묻혀졌다. 이후 그는 각종 반공 척사대회와 이승복 추모행사 등에 참여하며 야당이 학생들을 선동하여 정권을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과 야당은 국익보다 권력욕에 눈먼 집단이라며 야당, 학생 운동가들을 성토했다. 또한 일부 야당은 미국을 등에 업고 외세에 의존하려 든다며 질타하였다.
  • 조카인 대통령 윤보선과는 달리 여당인 자유당과 민주공화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적으로 윤보선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승만과의 관계는 윤보선이 한때 이승만의 측근에 있다가 떨어져 나감으로서 대립하게 되었으나, 박정희의 경우는 윤보선의 정적임에도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윤보선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계속된 여당 생활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1976
 
  • 1976년에는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이 되었고,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두 번 지냈다.
 
1978
 
  • 1978년 한국유신학술원 고문을 지냈다. 말년에는 덕수교회 장로로서 봉사하기도 했다.
  • 그 밖에 이승만 기념사업회 일을 주관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미국을 등에 업은 친일파가 세웠다는 주장에 반박, 학생운동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 고황재단, 경희대학교 이사
 
1979
 
  • 1979129일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1980
 
  • 1980년초 그는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 그해 초 박창암이 이갑성의 밀정설을 주장했다가 소송당하자 박창암을 찾아가 아무도 해결못할 일을 해결하려 했다며 격려해주기도 했다.
  • 1980424일 국정자문회의 운영위원에 위촉되어 국정자문회의 운영회의를 주관하였다. 그해 재혼한 아내 이은혜와 사별하였다. 이후 윤치영은 재혼하지 않았다.
  • 19808월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위촉되었다.
 
1981
 
  • 1981년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에 재위촉되었다. 기타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국회의원 동우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82
 
  • 1982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 이후 이승만 기념사업회와 이승만 재평가 운동, 이승만 복권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정계은퇴 후에도 92년까지 서울특별시 직원들의 모임인 서울시 시우회장과 안중근의사 숭모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왕성한 사회활동을 계속하는 등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였다. 1980년대 그는 학생운동권 중 민족해방계열로부터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민족해방파의 이승만의 정부 수립을 단독 정부로 보고, 단독정부 수립은 한국 분열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하자 그는 미국에 의한 분단 주장을 반박하고, 박용만 등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84
 
  • 1218, 서울 종로에서 열린 국정자문위원회 위원 오찬에 참석하다.
 
1985
 
  • 1985년 이준열사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한국자유총연맹 고문에 위촉되었고, 우익단체인 건국청년운동협의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 815, 하와이 호놀롤루한인교회의 이승만 박사 동상제막식에 참석하다.
  • 이후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에서 활동하던 과거 우익 청년운동가 출신 회원 30만 명을 거느리고 활동하였다.
  • 윤치영은 87세가 넘어서도 서울 CC클럽에 혼자 나와 골프를 치곤 했다. 사람들이 선생님. 어떻게 혼자 나와 치십니까하면 그가 이봐, 다 죽었잖아라고 일갈했다.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은 위트 속에 비애가 담겼다고 평가했다.
 
1986
 
  • 1986년 국회의원동우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 1986228독립선언기념관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
  • 충무공 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 회장
 
1987
 
  • 1987년 국회의원동우회 회장에 재선되었으며 전국청년운동협의회총본부 회장(1990년까지) 등을 지냈다.
  • 1987312일 구순 기념 논문집을 봉헌하였다.
  • 1987114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국무총리 김정렬의 초청을 받았다.
  • 김마리아 동상건립추진위원회 회장
  • 1212, 역대 국회의장단을 초청하는 국회의장 주최 만찬에 초청되었다.
 
1988
 
  • 312, 구순기념 논문을 세계 국제법협회 한국본부에 기증하는 봉정식을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조카이자 전대통령 윤보선 등이 참석하였다.
  • 818, 경향신문과의 기자회견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가리켜 정치란 어떤 것인지 보여준 인물들이라며 두둔하기도 했다.
 
1989
 
  • 19896월 모교인 중앙고등학교로부터 자랑스러운 중앙인상을 수상하였다.
  • 19891223일 서울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린 건국청년운동사 출판 기념식에 최병렬 문화공보부 장관과 함께 임석하였다.
  • 1989년 반공주의적 성향의 잡지 한국논단이 창간하자,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90
 
  • 1990년에는 대한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만년 여당인가 봅니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1991
 
  • 1991년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며 이승만의 재평가를 주장하였다.
 
1992
 
  • 1992년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출마하자 구 군사정권 출신인 제3공화국 당시 총리인 정일권, 5, 6공화국의 실세인 정호용 등이 김영삼을 지지해 줄것을 호소하며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김영삼 지지 선언에 불참하였다.
 
1995
 
  • 1995327일 이승만 박사 탄신 12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하였다.
  • 만년에 그는 자신이 20년대 미국 유학시절부터 수집해온 장서 3118권과 제헌국회 개헌기념사진 등 기념물 121점을 국회 도서관에 기증했다. 만년에 그는 서울 충정로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이름을 쓴 문패를 달지 않고 윤저(尹邸)라는 문패를 달았다.
  • 1990년 조카인 윤보선이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자 직접 찾아 병간호를 하였고, 윤보선이 92세를 일기로 서거하자 90대의 고령에도 윤보선의 아들, 며느리 등과 함께 문상객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1996
 
  • 19961월 병환으로 서울 중앙병원에 입원하였다.
  • 199629일 오후 517분 서울 중앙병원 병실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99세였다.
  • 21310시 서울특별시 성북동 덕수교회에서 발인하였고, 장례는 간소하게 치렀다.
  •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도웅리(현 광주시 도척면 도웅리) 52번지 9호 곤좌 서덕산 장지에 이병영, 이은혜 두 부인과 함께 합장되었다. 비석은 묘소 앞에서 묘소를 마주보고 서 있다.
 
2008
 
  •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 공적과 관련되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 2008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하반기호(43)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2010
 
  • 201010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다른 15명과 함께 서훈 취소가 검토되었다. 2010년 그에게 수여된 건국포장이 서훈 취소되었다. 그러나 그의 친일 의혹 여부는 논란 중에 있다.
 
강력한 리더십과 부국강병론
 
그는 강력한 지도자의 지도 하에 일치 단결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된다는 부국 강병론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승만에게 조지 워싱턴과 케말 파샤를 합친 정치인이 될 것과 대통령과 스승과 천황을 겸할 것을 여러 차례 권고하기도 했다. 이는 임금이자 동시에 스승, 아버지여야 된다는 조선시대의 군사부일체론과 유사하다. 강력한 지도자의 지도 하에 일치 단결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된다는 그의 확신은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유신 선포에 대한 확고한 지지로 이어진다.
 
그는 일찍부터 이승만에게 국부(國父 : the father of Korea)’ 이승만이 (독립 이후) 건국 방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이승만에게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갖춘 독재적 지도자가 되라고 권고하면서 윤치영 자신은 이승만을 위해 견마지로의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는 1968년부터 박정희에 의해 추진된 삼선 개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민족중흥을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단군 이래의 민족의 위인인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는 개헌을 해야 하며, 헌법상의 대통령 연임 금지조항을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것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도발을 막고 경제건설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강력한 통치자를 중심으로 전국민이 사심없이 일치단결하는 것이 국력을 신장시키는 지름길이라 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변론
 
그는 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 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 이승만이 3선으로 퇴진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관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1979년 이후부터는 공공연히 이승만의 3선 퇴진설과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역설하며 학생 운동권의 이승만 독재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1991년의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쳐 온 분이고, 민주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인물이었다라고 평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
 
윤치영은 공산주의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비인간적인 사상이라고 규정했다. 윤치영은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연적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천부의 개성을 획일화시키며 과학문명의 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한 비인간적 주의주장이라 봤다. 그는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천부의 개성을 획일화시키며 과학문명의 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한 비인간적 주의주장임을 일찍이 간파하고 이 나라의 주권을 남한에서만이라도 찾으려 하였던 이 박사의 노선에 나는 적극 찬동하여 나는 연부역강했던 한 시절을 보람있게 보냈노라고 자부한다며 인간의 본능을 심하게 억압하는 획일화된 사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부정적 평가
 
한편 윤치영은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의 귀를 막았다는 비판도 있다. 윤치영은 청년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젊은이들을 채용하여 주변에 배치해 두었다. 그러나 최기일에 의하면 윤치영과 이기붕에게 이승만에 대한 언론과 여론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일반 대중, 그리고 이 박사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승만의 독선에 환멸을 느꼈다. 그 결과 이승만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가 떨어졌다. 최기일에 의하면 이승만에 대한 대중의 환멸과 결과적으로 생기는 대중의 이승만 지지 악화를 윤치영과 이기붕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한다. 그들의 자세는 다만 이승만 박사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최기일은 그들은 사람들이 이승만을 지지하고 따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혹평했다. 최기일은 또한 이해할 수 없게도 돈암장 사람들(이승만의 측근들)은 언론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오슬로 대학교 교수 박노자는 그를 극우주의자 라고 평가하였다. 박노자는 그의 1960년대 서울 이주 제한 주장을 전체주의적 꿈이라고 평가했다. 박노자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윤치영 전 서울시장의 전체주의적 꿈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저술가 겸 시민운동가 정경모는 그를 여운형과 김구의 암살 배후로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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