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2일 토요일

동학의 지도자 김개남 vs 의병대장 임병찬, 두 사람의 악연

동학의 김개남을 밀고한 훗날 의병대장 임병찬

동학농민전쟁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과 함께 거병을 했지만 강경파였던 김개남(1853~1894)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최소한 전봉준은 형식적으로나마 재판을 받았지만, 김개남은 잡혀서 서울로 호송되는 도중에 재판 없이 즉결 처형되었다. 김개남이 잡히는 과정 역시 어처구니 없이 옛 친구의 밀고에 의해서 잡히게 되었다.

 

그 옛 친구는 이후 1906년 스승인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한일합방 이후에 고종의 밀서를 받고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전쟁을 일으킨 임병찬(1851~1916)이었다.

 

“1894121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김개남(金開男)을 고발함으로써 124일 김개남이 처형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해(1894) 겨울,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인물이었던 김개남이 (임병찬이 살고 있던 종송리) 이웃 너듸(四升) 마을 서영기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임병찬은 김종섭을 시켜 김개남으로 하여금 더욱 안전한 종송리로 옮기도록 설득하여 같은 마을 송두용 집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김송현, 임병욱, 송도용을 시켜 전라관찰사 이도재에 고발했다. 그리하여 이 해(1894) 121, 전주에 머물고 있는 강화병방 황헌주에 의하여 잡혀갔다. 1895년 정월, 김개남을 체포한 공으로 임실 군수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관찰사가 쌀 20석을 보내왔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 <정읍의병사> 164~165

 

이후 임병찬 장군의 임씨 집안과 김개남 장군의 김씨 집안은 대를 이은 원수 지간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임병찬 장군이 포상에 탐이 나서 밀고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처지와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방법이 달랐기에 빚어진 비극이었다고도 한다.

 

왼쪽 : 의병대장 임병찬
오른쪽 : 동학군 지도자 김개남

이후 임병찬 장군은 한일합방 이후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4년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총사령 자격으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이하 대소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여기에서 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주지시키며, 외국에 대해서는 일제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일제를 일시에 구축하려는 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일본경찰에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잡힌 뒤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이 탄로나면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6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나, 19165월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두 사람 다 구국이라는 차원에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방법상으로 한 사람은 동학을 통해서, 한 사람은 의병활동을 통해서 일제와 맞선 사람들이다. 임병찬의 김개남 밀고는 나머지 동학도를 구하기 위해 사전에 협의해서 스스로 김개남이 붙잡히는 고육지책을 썼다는 주장도 있고, 체제 전복을 외치는 김개남에 대해서 나라의 주인을 지키려고 하는 유림의 한계였다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김개남과 임병찬은 그 뜻부터가 달랐고 할 수 있다. 김개남에게 백성은 사발이고, 왕과 조선지배층이 물이었다면, 임병찬에겐 왕이 사발이고, 백성은 물일 뿐이었다. 임병찬에게 동학군은 임금에게 반기를 든 동학비도(東學匪徒)’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겐 우정보다 임금에 대한 ()’이 먼저였다. 선비로서 당연했다. 그가 임실군수와 백미 20의 포상을 사양한 것도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임병찬 장군이 포상이 탐나서 김개남 장군을 밀고한 게 아니라, 아마도 서로의 처지와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방법이 달랐기에 빚어진 비극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동학군은 일본군이 아니라 정부군+일본군+양반군에 의해 진압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림들은 동학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이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 야망을 드러내자 유림들이 나라를 구하려고 나선 것이다. 그들의 애국은 때늦은 애국이 되어 버렸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