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4일 화요일

티베리우스(Tiberius, 기원전 42년 11월 16일 ~ 37년 3월 16일)

티베리우스(Tiberius, 기원전 421116~ 37316)

 

  •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이다.
  •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들어가기 전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
  •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였던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아들이다.

 


출생과 성장

 

기원전 421116일에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사이에서 태어났다. (수에토니우스는 출생지를 푼디라는 학설과 출생년도를 43년 혹은 41년이라는 학설이 있다고 제시한다)

 

반 아우구스투스파였던 아버지 틀라우디우스 네로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반란에 참여하자 1세 때부터 로마를 떠나 페르시아, 네아폴리스, 시칠리아, 그리스로 도망치며 생활하였다. 티베리우스가 3살 무렵일 때 사면령으로 티베리우스 일가가 로마에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리비아의 미모에 반하여 티베리우스 네로에게 이혼하라고 압력을 넣었기 때문에 부모는 이혼하고, 리비아는 티베리우스 네로의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하였다. 티베리우스는 리비아가 결혼 직후에 출산한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에게 거두어져 양육되었다. 티베리우스가 9살 때 아버지가 죽어 드루수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에게로 가서 같이 살게 되었다.

 

청소년으로 성장한 티베리우스는 12세의 나이로 당시 로마의 제일인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있던 옥타비아누스 휘하에서 정무나 군무업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298,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한 개선식에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조카 마르켈루스와 함께 개선식에 참가하였다. 그 후 드루수스와 함께 군단의 사령관으로서 각지에 파견되어 유능한 장군의 자질을 증명해 나갔다.

 

후계자를 물색하는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으며 임페라토르로 등극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카 마르켈루스와 동지인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등을 후보로 생각하고 자신의 딸 율리아를 처음에는 마르켈루스에게, 마르켈루스가 요절한 후에는 아그리파에게 시집을 보내었다. 이때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사이에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두 형제가 태어나자 두 명의 손자들을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 생각하게 되었다.

 

기원전 12년 아그리파가 죽고 율리아가 또 다시 미망인이 되자 당시 자신의 친척 중에서 최연장 남자인 티베리우스를 두 명의 손자(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의 후견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와 그의 첫 번째 아내 폰포니아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하였으며,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셋이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빕사니아와 이혼시켜 율리아와 결혼하게 만들었다.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와의 이별을 슬퍼했지만 율리아와의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품행이 좋지 않던 율리아의 행실로 부부 사이가 악화되어, 티베리우스는 자진하여 로도스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에 율리아는 간통죄를 추궁받아 티베리우스와 이혼을 당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2년에 로마로 귀환하였지만, 후계자 후보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이미 요절한 상태라 티베리우스가 임페라토르의 후계자 후보가 되었다.

 

기원전 4,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되었다. 그때 티베리우스에게는 친아들 소()드루수스가 있었는데,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삼게 되었다. 게르마니쿠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이 외손자이며, 율리우스 가문의 피가 흐르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티베리우스에게 두 번째의 호민관 직권이 주어졌다. 한편 티베리우스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된 아그리파의 아들 아그리파 포스트무스가 추방되면서 티베리우스는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임페라토르 즉위

 

기원전 13년에 로마군 총사령관과 종신 호민관 직권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으로 지명받아서, 사실상 공동 임페라토르가 되었으며, 서기 14년부터는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노환으로 실질적으로 단독 임페라토르가 되었다. 이윽고, 14819일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그의 유언장에 의해 유산의 상속자로 지명되었고 티베리우스는 임페라토르로 즉위한다.

 

임페라토르가 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서 금융 위기 대책, 변경 방위망 확립 등 뛰어난 행정 수완을 발휘했지만, 임페라토르 주최의 전차 경기대회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키는 등 재정 낭비 중단 정책을 단행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는 낮았다고 한다.

 

서기 26년부터 서기 37년에 사망할 때까지 카프리 섬에 은거하여,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를 통해서 로마를 통치했기 때문에, 그의 인기는 한층 더 떨어지게 되었다. 또한, 29년에 이루어진 아그리피나 소탕작전은 더욱 티베리우스의 인기를 떨어뜨렸으며, 서기 311028일에는 권력욕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던 세야누스(Sejanus)를 교묘한 전략을 사용해 처형하기도 했다. 37, 79살에 병에 걸려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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