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5일 수요일

개신교의 전래와 수용 (1) 선교사 이전의 개신교와 접촉

개신교의 전래와 수용 (1) 선교사 이전의 개신교와 접촉


[한국기독교의 역사]

 

1. 조선에 처음 온 개신교인들

 

1) 벨테브레

 

1627(인조 5) 네덜란드 사람 벨테브레와 두 사람이 일본으로 가다가 표류하여 전라도 해안에 도착했다. 이들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군대에 편입되어 병자호란에 참전하였다. 이 전쟁에서 두 사람은 전사했고, 살아남은 벨테브레는 전공을 인정받아 한국 여자와 결혼하여 11녀를 낳았다. 네덜란드가 개신교 국가였기에 개신교 신자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2) 하멜

 

1653(효종 4) 일본으로 가던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벨테브레가 통역관으로 제주도에 내려오기도 하였다. 이들 역시 훈련도감에 편입되었는데, 도중에 탈출을 꾀하였다는 이유로 유배되어 잡역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조선에 억류된 지 13년만인 1666(현종 7) 결국 탈출에 성공하여 고국으로 돌아간다. 하멜은 고국에서 표류기를 저술하여 당시 유럽에 조선을 소개하였다. 하멜이 개신교인이었다는 것은 그의 책 마지막에 하나님의 자비로 조선을 탈출한 것에 대한 언급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3) 맥스웰(Murray Maxwell)과 홀(Basil Hall)

 

  • 1816(순조 16) 영국 군함 올체스트 호의 선장 맥스웰과 라이라 호의 선장 홀이 조선의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고 해도를 작성하기 위해서 접근하였다가 군산만 마량진에 정박하였다. 마량진 첨사 조대복은 한문을 사용하여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였으나 소통이 불가능했다. 조대복은 이때 한문성경을 한 권 받았는데, 조선인으로서는 맨 처음 성경을 손에 쥔 사건이 되었다.
  • 바실 홀은 영국으로 귀환한 후 한국 서해안 및 류큐 열도의 항해기를 출판(1818)하여 조선을 유럽에 소개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홀이 영국으로 돌아가다가 세인트 헬레나 섬에 들러서 나폴레옹에게 조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는 기록이 선교사 게일을 통해 전해진다.

 

2. 조선에 처음 온 개신교 성직자들

 

1) 칼 귀츨라프

 

  • 본래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이었던 그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군함이 중국 등지를 항해할 때 동행하다가 18327월에 백령도에 상륙했다가 남쪽의 충청도 고대도에 도착해서 통상을 요청하고 기다리다가 조선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 이때 홍주 목사 이민회의 서생 양씨에게 한자로 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게 된다. 그리고 감자 재배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조선은 중국 황제의 허락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2) 알렉산더 윌리엄슨

 

  • 청나라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진 후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선교단체가 앞을 다투어 중국으로 진출하였다.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186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파견되어 산종성 지푸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인 상인들과 청나라에 왕래하는 사절단을 보면서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토마스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려고 할 때 다량의 한문성경을 주면서 그의 선교를 지원하였다. (토마스 목사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대동강에서 평양 관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윌리엄슨은 18679월 한국인들의 교역지인 고려문에서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하였다.
  •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을 한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가 만주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된 것도 윌리엄슨의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와 열정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중국 정부가 만주에 관심을 가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동을 시작하였을 때, 윌리엄슨이 로스를 만주로 파송하는 것을 제안하여 로스는 만주로 가게 되었다. 로스의 매부가 되는 매킨타이어 역시 만주로 선교지를 옮기게 되었다.

 

3) 로버스 토마스 목사의 순교

 

  • 18659월 윌리엄슨이 제공한 많은 양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한국의 서해안으로 떠났다. 1차로 그는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에서 약 두 달 반을 머물렀다가 돌아갔다. 다음해 미국인 프레스톤의 소유인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에 상업 차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18667월 통역겸 안내자로 동승하여 조선으로 향하였다. 대동강에 도착한 제너럴 셔먼호가 무장을 하고 있어서 해적선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배를 조사하러 올라온 조선인 관리를 억류하기도 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했고, 평양감사 박규수의 명에 따라 제너럴 셔면호가 공격을 당했고 이때 토마스 목사는 박춘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1866.9.2, 27).
  • 후에 박춘권은 안주교회 영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토마스 목사가 던져 준 성경 세 권을 주웠던 최치량이라는 소년이 한권을 박영식에게 주었고 박영식은 성경을 벽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후에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가 박영식의 집에 왔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예수를 믿고 후에 평양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널즈(이눌서)의 조사가 되어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공헌하였다.

 

3. 외지에서 입교한 한국인들

 

1) 만주에서 입교한 의주 청년들

 

  •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는 1862년부터 중국 선교를 시작하였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산동성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산동성에 왔다가 만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선교사역을 계속해 나갔다.
  • 로스는 1874년 압록강 하류 국경지방에 있는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이 고려문은 약 3천 명 정도의 한국인이 거주하는 곳으로 한국과 만주 사이의 교역 중심지였다. 로스는 이곳에서 한국인 상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한국인 최초의 세례자 백홍준의 부친이었다. 1874년 두 번째로 고려문을 방문한 로스는 의주 청년 이응찬이 장사차 왔을 때 어학선생을 요청하였고 이응찬은 로스에게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그의 고향친구들인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이 로스가 있는 영구로 가게 된다. 네 사람은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으나 기독교신앙은 기피하였다. 당시 외래종교는 극형에 처하는 조선의 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1879년에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 이들의 세례는 1876년이라는 설과 1879년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18791월 김진기 또는 장진국으로 알려진 의주 청년 한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이어서 4월에 백홍준, 7월에 이응찬, 12월에 이성하로 알려진 한의사 출신 상인이 각각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문답을 거쳐 세례를 받았다. 옥성득 교수는 18791월을 한국 개신교회가 출발한 때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이때 같은 의주 청년인 서상륜이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홍삼장사를 하러 영구에 왔다가 열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였으나 로스를 만나 목숨을 건지게 되고 이에 감동받은 서상륜은 1879년에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2) 만주에서의 한글 성경번역

 

  • 로스는 한글 성경번역의 과업을 수행할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우선 1877년에 한국어 입문서를 출판하였다. 성경 번역을 위한 기초작업을 진행한 후 신약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1882년 봄에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를 책으로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한글 성경이었다. 이후 1887년 신약 전체 번역이 완료되어 5천부가 간행되었다.
  •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외지에서 성경이 번역되어 출판된 일은 세계 선교 역사에 별로 없는 기록적인 사건이다.

 

3) 권서(勸書), 매서(賣書)인의 활동

 

  • 권서란 성경책을 갖고 다니면서 사보라고 권면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매서란 성경책을 팔고 다니면서 전도하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성하가 복음서를 국내에 갖고 오려다가 실패하고, 백홍준이 다시 시도하였다. 쓸모없는 책을 사서 성경을 한 장씩 뜯어 돌돌 말아 긴 끈을 만들어 책을 묶었다. 조선에 들어온 후에 책을 다시 풀어서 끈을 붙여서 성경을 만들었다. 고향에 돌아온 의주 청년들의 노력으로 1885년에는 약 18명의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 서상륜은 188210월 영국성서공회에 의해 최초의 권서로 임명되어 고국에 들어와 전도에 열심을 기울였다. 관가에서 그를 체포한다는 소식으로 그는 삼촌이 사는 황해도 장연의 송천으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개신교 첫 번째 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웠다. 후에 솔내는 58세대 중에 50세대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서상륜은 서울에 머물면서 전도하였고, 이때 전도받은 사람들이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창설할 때 교인들로 참서가였고, 서상륜은 세브란스 병원의 전도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 외지에서 개신교의 신앙을 받아들인 선각자들이 성경번역을 도와 성경을 출판하였고, 그 성경을 가지고 와서 전도하여 결신자를 내고 교회를 세웠는데, 선교사들에 의하지 않고 순전히 한국 사람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교회가 세워지는 일이 개신교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4) 일본에서 입교한 이수정과 성경번역

 

  •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이 개신교에 입신한 의주 청년들과 함께 성경번역을 진행하고 있을 무렵, 일본에서도 개신교의 한국 선교를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안종수는 일본의 학자인 진전선의 서재에 걸려있던 산상수훈의 족자를 읽고 귀국해서 친구인 이수정에게 진전선을 소개하면서 일본에 가면 만나보라고 당부하였다. 이수정은 임모군란 때 민비를 구출하는 데 역할을 하였는데,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수신사로 갈 때 비공식 수행원으로 가게 되었다. 일본에서 진전선을 만난 이수정은 그에게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을 받고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후에 진전선의 도움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미국인 선교사 녹스에게 18834월 세례를 받았다.
  • 이수정은 민족이 복음화되기 위해서는 선교사가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미국 선교부에 선교사들을 파송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녹스 선교사는 이수정의 호소를 한국의 마케도니아인의 부름이라고 말하면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수정은 일본과는 역사적으로 감정이 있기 때문에 미국 교회가 선교를 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는 188312월 미국교회에 다음과 같은 공개청원서를 보냈다.
  •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 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선교사를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이러한 이수정에게 자극받은 주일본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이스가 한국어 성경번역을 제안하였다. 우선 한문성경에 토를 달아서 읽기와 이해를 쉽게 하는 것을 착수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한글성서번역을 착수하여 18834월에 마가복음이 완성되었고 18852월에 요코하마에서 1천부가 발행되었다.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받은 언더우드가 이 마가복음을 들고 입국한 것이다. 188412월에 있었던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하였고 조선의 조정은 자객을 보내어 암살을 시도하였다. 이수정은 김옥균과의 관계를 멀리하면서, 과거 민영익과의 관계도 있어서 귀국하였다. 백낙준 박사는 그가 불행하게 귀국 직전에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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