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수난과 발전 (3) 병인박해와 조선후기 사회 변화
[한국기독교의 역사]
조선 천주교회는 처음에 양반과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후 점차 중인 이하의 상민,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형태로 변화되었습니다. 이후 1860년 병인박해 때에는 무식하고 가난한 하층민이 교회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1) 천주교회의 재건과 발전
1844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안동김씨인 순원왕후는 강화도에 있는 은언군의 손자를 불러 왕으로 세웠다. 그가 조선의 25대 임금 강화도령 철종이다. 이때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시파 세력도 회복되었다. 신유박해 때 사사되었던 은언군 내외와 며느리 신씨, 그리고 이승훈의 신원되었다.
한편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는 병오박해 와중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성모성심회’라는 수도단체를 창설하였고, 김대건 이후 두 번째로 사제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도 입국하였다. 제4대 주교 베르뇌는 철종이 즉위하고 천주교에 대한 태도가 완화되자 1856년 충청도 배론에 신학당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 한글로 된 교리서가 간행되기 시작하였는데, 한글교리서는 한글의 발전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
2) 대원군의 집권과 서양 선박들의 출현
1864년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신정왕후 조씨는 흥선군의 아들을 왕으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고종이다. 이 당시에는 서양의 배인 이양선이 출몰하였고,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였다. 원래 대원군은 개인적으로 천주교와 인연이 있었지만 이양선의 출몰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의 전초로 보였고, 프랑스 신부들이 이끄는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의 명분이 되었다.
3) 병인박해(1866년)
1866년 실시된 병인박해는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표방하여 외국과의 교류ㆍ통상을 금하고 대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함으로써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원군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1866년 1월 천주교인이면서 정부에서도 영향력 있던 남종삼, 홍봉주 등이 대원군에게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계책을 내었고 흥선대원군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2월에 홍봉주와 베르뇌 주교를 체포하면서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 박해로 12명의 프랑스 신부 중 9명이 처형되었고 천주교 신자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텐진에 있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순교 소식을 전했다. 로즈는 청나라 중재제의를 거부한 채 군함 세 척을 이끌고 무력보복에 나서며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9월 26일 양화진을 거처 서강까지 순찰한 후 강화도를 공격하며 약탈을 자행하다가 11월에 철수하였다(양헌수와 조선군 포수의 반격). 이 사건에 분노한 흥선대원군은 양화나루 옆의 잠두봉에서 천주교인들을 처형하라 명하였고, 이때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죽었고 그곳은 오늘날 양화진 절두산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병인양요가 있었던 해인 1866년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면호가 평양군수 박규수와 군민들에 의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때 배에 타고 있었던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 목사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1868년 6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오페르트는 조선에서 탈출한 페롱, 깔래 신부들과 최선일 등의 조선인 교인들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고 했기 때문에 대원군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1871년 6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미국이 군함을 거드리고 공격하였다. 3일간의 교전 끝에 광성보가 함락되고 어재연을 비롯한 조선 수비대가 전멸하였으나, 이후 완강한 쇄국정책으로 미국은 철수하였다. 미국은 이 정도 때렸으면 통상에 협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선의 조정이 의외로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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