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7일 일요일

아테네의 이레네(Irene of Athens, AD.750/756~803) : 동로마 제국 제81대 황제(797~802)

아테네의 이레네(Irene of Athens, AD.750/756~803) : 동로마 제국 제81대 황제(797~802)

 
  • Irene of Athens [Greek : Ερήνη, Eirḗnē]
  • Sarantapechaena [Greek : Σαρανταπήχαινα, Sarantapḗchaina]
  • 출생 : 750/756
  • 사망 : 80389/ Lesbos
  • 배우자 : 레오 4(Leo IV)
  • 자녀 : 콘스탄티누스 6(Constantine VI)
  • 재위 : 797819~ 8021031
 
아테네의 이레네(Irene of Athens, AD.750/756~803) : 동로마 제국 제81대 황제(797~802)
아테네의 이레네(Irene of Athens, AD.750/756~803) : 동로마 제국 제81대 황제(797~802)

철권 통치와 모성 비극 : 동로마 제국을 다스린 최초의 여제, 아테네의 이레네 (750/756-803)

 
8세기 후반의 동로마 제국은 성상 숭배를 둘러싼 격렬한 종교적 논쟁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황제들의 강경한 성상 파괴 정책이 이어지면서 제국 사회는 깊은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황후의 자리에 올라 섭정을 거쳐, 로마 제국 역사상 전례 없는 여제(Empress Regnant)’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 바로 아테네의 이레네(Irene of Athens, 750/756803)이다. 그녀는 남성 황제 없이 스스로 로마 제국을 다스린 최초의 여성이었으며, 성상 숭배를 회복시킨 위업을 달성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아들을 실명시키고 폐위시키는 잔혹한 선택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녀의 치세는 8세기 로마 제국의 복잡한 종교적, 정치적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 아테네의 귀족 가문 출신, 황실과의 인연 : 이레네의 초기 생애와 결혼

 
이레네는 서기 750년에서 756년 사이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사란타페초스(Sarantapechos)라는 유력한 그리스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 사란타페초스 가문은 그리스 본토 중부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집안이었다. 비록 이레네 자신은 고아였지만, 그녀의 삼촌 또는 사촌인 콘스탄티누스 사란타페초스(Constantine Sarantapechos)8세기 말에 파트리키우스(patrician)’이자 스트라테고스(strategos, 군사령관)’를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가문 배경은 이레네가 당시 로마 제국 황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768, 이레네는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5(Constantine V, 718775)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레오(Leo)와 결혼했다. 레오는 훗날 레오 4(Leo IV the Khazar, 750780) 황제가 되는 인물이다. 그들의 결혼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강력한 통치 하에 성상 파괴 정책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레네는 황실에 시집오기 전부터 성상 숭배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성상 파괴자였던 남편 레오 4세와,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5세와는 대조되는 이레네의 종교적 성향을 보여준다. 이레네는 7691217일에 공동 황후로 대관식을 치렀다.
 

2. 황후이자 섭정 : 성상 숭배 회복을 위한 투쟁 (775-790)

 
775, 시아버지 콘스탄티누스 5세가 사망하자 레오 4세가 황제에 즉위했다. 이레네는 그의 황후로서 775년부터 780년까지 황후 자리를 지켰다. 770년에는 아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를 낳았는데, 이 아들이 훗날 콘스탄티누스 6(Constantine VI, 771797)가 된다.
 
78098, 남편 레오 4세가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이레네는 불과 9살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섭정(regent)으로서 제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레네는 강력한 성상 숭배자였으며, 그녀의 섭정 통치는 성상 파괴 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서막이었다.
 
1) 성상 숭배 회복 노력 : 이레네의 가장 큰 목표는 제국에서 성상 숭배를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즉위 초부터 성상 파괴자들을 요직에서 배제하고, 성상 숭배를 지지하는 인물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자신의 핵심 참모로 삼았던 환관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를 통해 제국 정부의 성상 파괴주의자들을 교체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2) 2차 니케아 공의회(787) : 이레네는 성상 숭배 회복을 위한 결정적인 조치로 787년 니케아(Nicaea)에서 제2차 니케아 공의회(Second Council of Nicaea)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는 동방과 서방 교회의 대표자들이 모여 성상 숭배의 합법성을 논의했다. 공의회는 성상 숭배를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성상 파괴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로써 약 60년간 제국을 뒤흔들었던 성상 파괴 논쟁은 이레네의 노력으로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3) 군사적 저항 진압 : 이레네의 성상 숭배 정책은 성상 파괴 정책을 지지하던 군부 세력의 반발을 샀다. 787, 군사 반란이 일어났으나, 이레네는 이를 단호하게 진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그녀는 군사적 재능보다는 정치적 수완과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었다.
 

3. 모자(母子) 간의 권력 투쟁 : 콘스탄티누스 6세와의 갈등 (790-797)

 
이레네의 섭정 통치는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가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심각한 모자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6세는 16세가 되던 787년부터 성인으로 간주되었으나, 이레네는 여전히 실권을 쥐고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려 하지 않았다 .
 
  • 콘스탄티누스 6세의 친정(親政) 시도 : 790, 콘스탄티누스 6세는 어머니 이레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하려 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장교들과 함께 어머니를 축출하려 했지만, 이레네가 이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이레네의 강요를 거부하며 콘스탄티누스 6세의 편에 섰고, 결국 이레네는 폐위되어 궁전에 유폐되었다.
  • 이레네의 복귀와 권모술수 : 황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6세는 정치적 불안정을 우려해 이레네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고 그녀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이는 관용적인 조치였으나, 결국 이레네가 다시 권력을 잡고 아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밀 기회를 마련하고 말았다.
  • 콘스탄티누스 6세의 실책 : 콘스탄티누스 6세는 황권을 잡은 후 여러 실책을 저지르며 인기를 잃었다. 그는 교회와 대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황후와 이혼하고 정부 테오도테(Theodote)와 결혼하며 간음 논쟁(Moechian controversy)’을 일으켰다. 또한 불가르족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며 군사적 무능함을 드러냈고, 자신의 측근들에게 편집증적인 잔혹성을 보이며 폭압적인 통치를 이어갔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레네는 아들의 이러한 실책을 이용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했고,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4. 최초의 여제 : 아들을 제거하고 단독 황제에 오르다 (797)

 
콘스탄티누스 6세의 실책과 인기 상실은 모후 이레네에게 다시 권력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7978, 이레네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환관들과 유력 귀족들을 동원하여 아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797819, 콘스탄티누스 6세는 어머니 이레네의 지시에 따라 황궁의 자줏빛 방(Porphyra)’에서 자신의 눈이 뽑히는 실명형(blinding)’을 당했다. 자줏빛 방은 전통적으로 로마 황제들이 태어나는 신성한 장소였다는 점에서, 이레네의 행동은 단순한 복수를 넘어 황제로서의 콘스탄티누스 6세의 모든 존재와 정통성을 지워버리겠다는 잔혹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6세는 이 실명형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죽음과 함께 로마 제국 이사우리아 왕조의 남성 계보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레네는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를 실명시킨 후 스스로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그녀는 797년부터 802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한 최초의 여제(Empress Regnant)’이자, 남성 황제 없이 통치한 전례 없는 황제가 된다. 그녀의 치세는 로마 제국 역사상 첫 번째 여성 단독 통치라는 점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지닌다.
 

5. 여제의 통치와 권력의 그림자 (797-802)

 
이레네는 단독 여제가 된 후, 제국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들을 펼쳤다.
 

1) 재정 및 행정 정책 


이레네는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세금을 감면하는 등 재정적으로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특히 이전 콘스탄티누스 5세가 군인들의 미망인에게 요구했던 지불금과 세금 감면 혜택 중단을 철회하는 등 호의적인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장기적으로 제국의 재정에 부담을 주었으며, 재무 관료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고조되었다. 재무 관료 니케포루스(Nikephoros)는 이레네의 이러한 재정적 방만함을 비판하며 그녀를 축출하는 데 일조했다.
 

2) 대외 정책


이레네의 치세 동안 제국은 군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의 통치기가 되면서 제국의 국경에서는 몇 차례의 군사적 좌절을 겪었으며, 특히 아랍과 불가르족의 위협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3) 카롤루스 대제(Charlemagne)와의 관계


이레네가 단독 여제가 되면서, 서방에서는 카롤루스 대제가 서유럽의 강력한 지배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800,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 레오 3(Pope Leo III)에 의해 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치렀다. 서방에서는 여성이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것을 정당하지 않게 여겼고, 이레네의 통치는 로마 제국 황위가 공석이 된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카롤루스 대제와 이레네 사이에 혼인을 통해 로마 제국을 재통일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보기도 하나, 이는 불발되었다.
 

6. 여제의 몰락과 비극적인 최후 (802-803)

 
이레네의 통치는 5년 만에 막을 내렸다. 8021031, 제국의 재무 관료 니케포루스가 주도한 궁정 쿠데타에 의해 이레네는 황위에서 축출되었다. 그녀의 재정 정책과 남성 중심적인 로마 사회에서 여제가 단독으로 통치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레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작은 섬인 프린키포(Principe)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80389일에 레스보스(Lesbos) 섬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유물을 레스보스 섬의 에레소스(Eresos) 수도원에 봉헌했다고 한다.
 

7. 아테네의 이레네가 남긴 유산과 역사적 평가

 
이레네의 치세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복합적인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된다.
  • 성상 숭배의 회복 : 그녀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성상 숭배를 회복시켰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레네는 이 업적으로 인해 일부 성상 숭배자들에게는 성인(saint)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 최초의 여제 : 그녀는 남성 황제 없이 로마 제국을 다스린 최초의 여성이었다. 이는 로마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으며, 여성의 권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모성 비극의 주인공 : 자신의 아들을 실명시키고 황위에서 몰아낸 잔혹한 선택은 그녀를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역사가 테오파네스(Theophanes the Confessor)는 그녀가 황실 문제에 여성이 개입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녀를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 이사우리아 왕조의 종말 : 그녀의 즉위와 몰락은 강력한 성상 파괴 황제들을 배출했던 이사우리아 왕조의 종말을 의미하며, 동로마 제국의 황위 계승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 제국의 쇠퇴 시작 : 그녀의 재위 동안 이사우리아 왕조의 후반기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레네의 통치는 이사우리아 황제들의 강력한 군사적 리더십과 대조되어, 제국의 국력이 약화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테네의 이레네는 강력한 의지와 야심, 그리고 비극적인 운명으로 점철된 인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고, 로마 제국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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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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