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4일 화요일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서기 14년 8월 19일)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63923~ 서기 14819)

 

  •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7~ 서기 14)
  •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트수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로 불렸다.

 

출생과 성장

 

그는 기원전 63923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평민 출신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이며 벨리트라이라는 마을 출신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아버지가 평민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아티아는 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민층에 속하였다. 훗날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귀족의 지위를 얻게 된다.

 

기원전 59년에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 아티아가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을 하게 되었다. 필리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었고 기원전 56년에는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이자 외할머니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기원전 51년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가 죽고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에 의해 양육되었다. 기원전 46년에 카이사르가 오랜 숙적이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싸우려고 할 때 옥타비아누스도 참전하려고 하였으나 병으로 인해서 참전하기 어렵게 되었다. 병에서 회복한 뒤 어려움을 뚫고 카이사르의 막사까지 가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이때 카이사르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로마로 돌아온 뒤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작성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제1상속자로 낙점하였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권력을 획득하기까지

 

기원전 443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에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옥타비아누스는 제1상속자이자 아들로 입양되면서 부각되었다. 당시에 안토니우스 측에서는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성적으로 총애햇기 때문에 입양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에게 충성하는 로마군단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였고, 안토니우스를 불편해하는 원로원들은 옥타비아누스를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과거 대표적인 반()카이사르파 원로원이었던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공격하면서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도움을 주었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군사 독재 체제인 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하였다. 3명의 집정관은 300명의 원로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 출신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추방 명령을 내렸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이 국외 탈출을 기도하면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도왔던 키케로가 추방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추방명령법 제정을 반대했었다고 한다) 이때 많은 수의 공화파 원로원이 제거되면서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위한 디딤돌이 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4211일 로마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하였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로 정당성이 확보되었다. 기원전 4210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아그리파에게 직속 지휘권을 넘겨준 것에 대해서 겁쟁이라고 비판하였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연인관계로 지낸다.

 

기원전 40년 가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브룬디시움 조약에 서명하였는데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맡기로 하였다. 이 해 말엽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확고한 동맹을 위해 자신의 친 누나인 소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낸다.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치기 위해 합동작전을 개시하였다. 옥타비아누스를 이겼지만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기원전 3693일 나우로쿠스 전투에서 아그리파의 군대에게 패하고 퇴각하였고 다음해에 안토니우스 휘하의 장군에게 잡혀 처형당한다. 이후 레피두스는 자신이 시칠리아를 다스릴 능력이 충분히 된다고 자부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전했다가 휘하의 부대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면서 항복하고 이탈리아의 카페 키르케이에 있는 장원으로 유배되었다.

 

파르티아 원정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안토니우스(원래 옥타비아누스가 2만의 병사를 보내준다고 했지만 2천명의 병사만 보내줬다)는 이집트에서 힘을 키우려고 하면서 전처인 옥타비아를 로마로 돌려보냈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다.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의 인기가 점점 추락하게 된다. 기원전 32년 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집정관의 권한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고 클레오파트라가 다스리고 있는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기원전 3192,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무찔렀고, 기원전 3081일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다시 한번 승리를 거두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하였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은 살려주는 대신에 카이사리온은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로마의 일인자

 

로마는 형식상 공화국이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차근차근 권력을 손에 넣기 시작했다. 기원전 31년부터 8년간 해마다 집정관의 자리를 맡았다.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제일인자라는 뜻의 국가 제1시민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프린켑스). 기원전 27년에 내전이 종결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역사학자 하워드 스컬러드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의 진정한 권력은 군대와 최종결제권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게 된 속주들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킬리키아, 키프로스, 이집트였는데 속주에 파견할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기 자신을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라 칭했다. 자신이 신군 윤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것과 승리를 상징하는 임페라토르의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항하려 했다. 결국 무레나는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피소는 널리 알려진 공화정 지지자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동료 집정관과 협력하면서 파벌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과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잠시 병을 앓았을 때 사람들은 친구인 아그리피나와 사위인 마르켈루스에게 권한을 위임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동료 집정관인 피소에게 위임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에서 사임하면서 공화주의자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러나 집정관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호민관의 특권을 죽을 때까지 행사하였다. 그는 또한 군 통수권을 손에 넣어서 그만이 로마군의 최고 통수권자의 자격으로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12년에는 최고 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레피두스가 죽은 후에 그 자리에 취임하였다. 최고 제사장은 종신제인 데다가 단 한 명만 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기원전 2년에는 로마 시민으로부터 국부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대외정책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무력으로 점령한 지역도 적지 않았으며 외교도 적적히 사용하였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당했던 대패를 직접적인 전쟁으로 만회하는 대신, 대 아르메니아 왕국에 친로마 성향의 인물을 왕위에 앉힌 후에 파르티아를 압박하여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또한 히스파니아의 북부,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와 노리쿰, 일리리쿰,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25년에는 왕이 후게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르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어 버렸다. 도한 오늘날 스페인의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기원전 19년에 최종적으로 진압하였으며, 이 지역에서 채굴되는 풍부한 광물 자원은 이후 군자금의 원천이 되었다. 기원전 17년과 16년에 일리리쿰 총독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가 알프스 산악 지역의 노리쿰(오늘날의 티롤, 스티리아, 잘츠부르크)에 정복 사업을 개시하여 황제의 의붓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스스가 완수했다. 기원전 12년에는 알프스 근방에서 군사활동을 재개했고 게르만족을 공격하였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기원전 9년에 드루수스가 이끄는 군대는 엘베강에 도달했다. 하지만 드루수스가 낙마하여 죽었고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유해를 로마로 송환하였다.

 

노란색은 기원전 31년경 영토 / 녹색은 아우구스투스 통치기간 획득 / 분홍색은 동맹국

죽음과 후계 문제

 

기원전 23년에 암살음모가 발각되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후계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삼는다. 그는 리비아가 데려온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도 아꼈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으며,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나서는 티베리우스 부부를 이혼시킨 후 티베리우스를 미망인이 된 율리아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기워넌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분담하였지만 얼마후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 버린다.

 

서기 2년과 4년에 루키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차레로 요절하였다.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이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방만한 행실로 인해 7년에 추방되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13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모든 특권을 부여받는다.

 

서기 14819일에 아우구스투스는 놀라에서 숨을 거두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들인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추모 연설을 하였다. 이후 마르스 광장을 지나 아우구스투스 영묘 앞 광장에서 유해를 화장하였고, 영묘에 묻혔다. 얼마 후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금욕적인 모습과 달리 취미가 도박이었다. 그가 수립한 정책은 로마 제국이 존재하였던 기간에 게속 사용되었고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 또는 아우구수투스에 의한 평화(Pax Augusta)”라 칭송받았다. 그는 수도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만들었다. 내전이 끝난 후 그는 28개 군단 17만 명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조직한다. 서기 6년에는 현역 및 퇴역 군인의 연금을 지급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1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하여 군인 연금 기금을 만들었다. 기원전 27년에는 자신의 경호를 목적으로 친위대를 창설하였다. 근위대는 훗날 원로원에 압력 넣기, 새 황제 추대, 기존 황제 제거 등 로마의 역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친위대는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해체할 때까지 존속된다)

 

관대한 정책들과 과다한 지출 삭감으로 기원전 29년에는 25만 명의 시민들에게 개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 씩 지급하였고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는 12만 명의 퇴역병에게는 1,000세스테리우스 씩 지급하였으며 약 7억 세스테르티우스를 들여 자신의 병사들이 땅을 사서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로마의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 82곳을 복구하였고, 기원전 28년에는 검소하고 관대한 모습을 강조하려고 자신의 모습을 본뜬 은상 80여 개를 녹였다.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308월에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 뒤 권좌에 오르자, 이를 기리고자 원로원이 8월을 아우구스투스로 바꾸었다. 그는 죽기 전에 나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물려받았고, 대리석의 로마를 물려줬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용모와 자태에 기품이 어려 있고, 평생 언제 어느 때나 아름다워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중략) 그의 눈은 밝고 맑으며 형형히 빛났다. (중략) 머리칼은 엷은 금색이고 약간 곱슬머리였다. 양쪽 눈썹은 붙어 있고, 귀는 보통 크기였다. 콧마루는 끝에서 약간 솟아오르고 그 밑변이 안쪽으로 약간 구부러져 있었다. 피부는 거무스름하지도 않고 희지도 않고 딱 중간이었으며, 키는 작았다.

— 수에토니우스(박광순 옮김) (1998).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 풀빛미디어. 1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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