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고대 이집트 역사 - 신왕국(아멘호텝 1~3세 시기) [BC 1500~1350년]
신왕국을 창건하고 남쪽(누비아)과 동쪽(시나이, 팔레스티나 남부) 경계를 확정한 아흐모세 뒤를 이어 기원전 1514년경 아멘호텝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미 6년 동안 아흐모세와 공동통치자로서 통치에 참여했고 20년 이상 단독으로 왕위에 있었다(기원전 1514~1493년경). 그의 통치기간에 누비아는 나일 제2폭포까지 정복되었고 국경은 셈나, 쿰나, 우로나르티 요새에 의해 확보되었다. 아멘호텝 1세가 카르나크의 아문 신전에 실행한 건축조치들과, 테베 가까이에 있는 한 암벽석실분에 자신을 매장하도록 한 결정은 제18왕조 문화의 전체적 흐름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아멘호텝 1세가 통치할 때는 특히 평화스러웠고 이로써 문화가 꽃필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1493년경 왕가 방계 출신의 투트모세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기간에 이루어진 이집트의 군사력 확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투트모세 1세는 남쪽으로 나일 강 제4폭포까지 진출했으며 동쪽과 북쪽으로는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로 원정대가 통과해 카르케미시 부근의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그는 자신의 석주비문을 세웠다. 이로써 시리아 북쪽을 지배하는 미탄니 왕국와 맞서게 되었다. 투트모세 1세는 유명한 테베의 “왕들의 계곡”에 자신의 암벽묘실을 건설한 첫 파라오였는데, 이후 이 암벽묘실은 신격화된 투트모세 1세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투트모세 1세가 왕위에 오른지 12년(?) 후에 투트모세 2세가 그 뒤를 이었다. 이 왕은 멤피스에 있는 군대 본영에서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와 같은 영토 확장 정책을 좇았다. 하지만 그는 부왕처럼 시리아 깊숙이 진출하지는 못했다. 투트모세 2세는 등극한 지 몇 해 되지 않아 죽었는데, 측실에서 난 아들 투트모세 3세가 왕위에 오르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투트모세 2세의 이복동생이자 부인인 유명한 여왕 하트셉수트가 섭정했다(기원전 1479~1457년). 그 역시 투트모세 1세의 딸이자 또한 특출한 통치자로서 이후 신왕국시대 왕비와 황후가 행사하기 시작한 영향력있는 역할에 대한 본보기가 되었다. 하트셉수트는 섭정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몇 년 후 스스로 파라오가 되었다. 이제 한 여인이 이집트의 이중왕관을 쓰고서 남자의 이름과 칭호를 사용했으며 남자임을 드러내는 상징적 행동을 했다. 하트셉수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에서도 또 그가 사용한 수식어에서도 자신이 여성임을 부인했다. 그는 “여성 호루스”였으며 한편으로 남성 스핑크스였다. 하트셉수트는 그의 총애를 받는 자들 가운데 특히 아문 신전의 두 고위 관리를 후원했으며 그 중에서도 그의 개인 영토도 관리하는 세넨무트를 후원했다. 하트셉수트의 평화로운 재위기간에 힉소스의 전통과 거리를 두는 데 무게를 둔 새로운 국가 의식이 나타나서 물질문화를 이전보다 세력되게 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아시아 및 후기 미노스 크레타와의 사이에 풍부한 결실을 얻은 교류 덕분일 수 있다. 물론 이 여왕은 데이르 엘 바흐리에 있는 자신의 장제전에 가장 의미 있는 기념물을 세우도록 했다. 아주 잘 보존된 이 건축물의 꽃은 이른바 “푼트 실(室)”이다. 이 방의 부조는 소말리아의 이국적 해변에 위치한 푼트로의 무역원정을 묘사하고 있다. “탄생 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하트셉수트는 자신이 적법한 왕위계승자임을 내보이려고 자신의 신적인 계보와 탄생을 부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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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셉수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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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셉수트의 장제전 |
하트셉수트가 약 15년 통치한 후 그 영향력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가 사망한 직후에 22년간 공동통치자였던 투트모세 3세는 단독통치자가 되었으며(기원전 1479~1422년), 여성 파라오에 대한 일종의 기록 말살로 하트셉수트와 거리 두기를 시작했다. 그림, 상, 기념물에 있는 하트셉수트의 이름이 훼손되거나 삭제되었다. 후대의 기념물에서도 전통적인 왕의 계보가 있는 목록과 그림에서도 하트셉수트는 생략되었다. 이 모든 것이 계모이자 장모인 자신의 전임자에 대한 투트모세 3세의 개인적 증오를 드러낸다고 오랫동안 추측되어 왔다. 하지만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이것은 개연성이 적다. 왜냐하면 하트셉수트의 기념물 훼손과 이집트 역사에서 그를 삭제한 것은 투트모세 3세의 재위 후기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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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트모세 3세 |
하트셉수트가 다스리는 동안 이집트 제국이 가까운 아시아 지역을 등한시한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왜냐하면, 미탄니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시리아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카데시, 카트나, 투닙, 누하시셰, 무키시, 알랄라흐의 군주들은 미탄니의 지배권을 인정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 사후 단독통치자가 되자 지체 없이 팔레스티나로 원정을 떠났으며 메기도에서 카데시가 이끌던 큰 연맹을 격파했다. 메기도는 7개월 동안 공격을 받았고 주위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점령되었다.
투트모세 3세는 특히 5~8번째 출정을 통해 특출한 강대국으로서의 이집트의 입지를 확장했는데, 이는 기원전 1450~1445년 자신의 재위 29~33년에 일어났다. 이 원정으로 그는 시리아 북부까지 나아갔으며, 그곳 알레포에서 미탄니와 전투를 했다. 그는 패한 적군을 유프라테스 강 너머까지 추격하여 나하린(아)[구약성서에서는 아람 나하라임의 형태로, 나중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칭호로 계속 살아있다. 이 개념은 유프라테스 대만곡 내부와 건너편 지역을 말한다]라고 불리는 미탄니 왕국의 내부까지 이르렀다. 비록 투트모세 3세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있는 카르케미시와 에마르 너머까지 나아갔으나 미탄니는 그를 피해 결정적인 전투를 모면하고 정복당하지 않았다. 투트모세 3세는 회군할 때 카세시와 거기에 속해 있던 비카의 타흐시도 함께 점령했다. 이집트는 이로써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으며 하투샤, 아시리아, 바빌론에서 오는 사절단들이 증명해주고 있듯이 국제적인 명망을 계속 유지했다. 이집트는 또한 엄청난 전리품과 조공을 받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카데시 너머의 시리아를 소유하는 것은 불확실했다. 이후 몇 년간 여기서 계속 반복되는 반란은 제압되었을 것이고, 또 후에는 심지어 미탄니 주둔군도 카데시로 이동했을 것이다.
이집트는 다양한 기관과 조치로 자신의 지배권을 유지했다. “북쪽 외국 감독자”가 정복지역을 관리하는 임무를 받았다. 물자와 군대를 아무 위험없이 내지로 옮기기 위해 군사적 보충지점, 보급기지 및 점령지역과 항구들을 해안을 따라 설치했다. 왕가에서는 볼모를 택해 이집트로 보냈다. 그들 가운데는 장래 유력한 왕위계승자가 될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이집트화”하는 것은 이집트에 상당히 유익한 것이었다. 충성서약을 통해 봉신들은 이집트에 의무를 지게 되었고, 반란자에 대한 토벌은 매번 무시무시했다.
카르나크에 있는 아문 신전은 이집트의 번영으로 많은 유익을 얻었다. 왜냐하면, 외국의 영토를 선사 받고, 전리품과 노예 형태로 하사품을 할당받았기 때문이다. 투트모세 3세는 남쪽으로 제4폭포가 있는 나파타 지역까지 자신의 지배권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미 몇 년 동안 공동통치자로서 직무를 수행했던 아멘호텝 3세(기원전 1425~1400년경)는 부왕에 필적하는 후계자임을 입증했다. 이미 재위 첫해에 그는 시리아로 진출했으며, 그 후에도 그곳으로 출정을 떠났다. 출정의 주된 목적은 부왕 사후 반란이 일어났던 도시인 카데시, 니야, 투닙이었다. 그러나 호전적이고 자신의 조치와 보복행동에는 단호했던 이 왕은 강력한 미탄니 왕국과 추진력 있는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 1세 때문에 북시리아와 유프라테스를 자신의 세력 안에 둘 수 없음을 간파했을 것이다. 이집트의 북쪽 경계는 우가리트에서 오론테스 강 중류까지 이르는 경계로 굳어졌다. 사로잡혀온 많은 전쟁 포로, 그 중에는 마리얀누와 아피루도 있었는데, 시리아의 반란자들에 대한 공개 처형이 보여주듯이 이 지역 내에서 아멘호텝 2세는 자신의 지배권을 강력하게 관철했다.
투트모세 4세 재위 동안(기원전 약 1400~1391년) 정치전선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와 미탄니 왕국의 관계는 점차 긴장이 해소되었다. 두 나라에 히타이트인의 위협이 점점 증가했기 때문이고 또한 미탄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도 권력이 그 한계에 도달했음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한 분위기는 투슈라타가 아멘호텝 3세에게 보낸 편지(EA 24)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탄니의 왕 아르타타마 1세가 자신의 딸을 이집트 파라오에게 아내로 준 것에서 드러난다. 이 외에 아마르나 서신에 있는 회고적인 문장들은 이집트가 투트모세 4세 치하에서 이미 바빌로니아(카라인다시, EA 10) 및 아시리아(아슈르나딘아헤)와 외교적 접촉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리아-팔레스티나, 즉 게제르와 시돈에서 파라오는 뚜렷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투트모세 4세의 지배는 아주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카르나크에 있는 신전의 확장이 이 시대의 특기할만한 일인데, 여기에 투트모세 4세는 기념비적인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후에 이 오벨리스크는 로마로 옮겨졌다.
투트모세 4세를 이어 “위대한” 아멘호텝 3세가 즉위하여 38년 이상 왕위에 있었다(기원전 1391~1353년). 그는 오리엔트의 전형적인 군주들처럼 자신을 과시하면서 통치했는데, 이것은 기념비적인 사건을 새겨 넣은, 다량의 시리즈로 만들어진 딱정벌레석과 함께 대부분이 거대한 인상적인 건축물(아멘호텝 3세의 건축물 가운데 카르나크 솔레브, 그리고 룩소르에 있는 신전이 특히나 뛰어나다)을 통해 증명된다. 그의 하렘 또한 컸다. 여기에는 많은 공주가 살았는데, 그 가운데는 두 명의 미탄니 왕인 슈타르나 2세와 투슈라타의 두 딸도 있었다. 첫째 딸은 하렘으로 300명의 종자를 데려왔다.
군사활동은 아멘호텝 3세 재위 5, 6년엠나 누비아에서 전개되었다. 이들과 함께 우선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은 금이 수많은 나라와 궁정과의 국제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주로 금으로 변제된 조공이 계속해서 이집트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친선관계 유지, 때때로 쌍방 간의 원조 및 평화 유지는 거의 제의적으로 이루어지는 예물, 서신, 사신 및 하렘 공주들의 교환을 대가로 이루어졌다.
시리아-팔레스티나에서 이집트의 권위는 흔들렸다. 왜냐하면 이집트 측에서의 모든 군사행동은 중지되었고, 파라오는 이곳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래서 히타이트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내부 상황으로 이집트의 최고통치권은 서서히 쇠퇴해 갔다. 몇몇 봉신은 독단적인 행동을 취했는데, 특히 아피루의 원조를 받아 자신의 고유한 권력정치를 펼쳤던 아무루가 그러했다.
☞ 클라아스 R. 빈호프 지음, 배희숙 옮김, [고대 오리엔트 역사], 167~174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