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5일 금요일

주전 2000년대 고대 근동 연대표

주전 2000년대 고대 근동 연대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왕국]
[아시리아]
[바벨론]
* 이집트의 연대표는 학자에 따라 차이가 있음
제12왕조
아메네헤트 1세 (1991~1962)
센보스레트 1세 (1971~1926)
아메네헤트 2세 (1929~1892)
센보스레트 2세 (1897~1878)
센보스레트 3세 (1897~1841)
아메네헤트 3세 (1844~1797)


아메네헤트 4세 (1799~1787)
네푸르소벡 (1787~1783)






[신왕국]
제18왕조
아흐모세 (1550~1525)
아멘호텝 1세 (1525~1504)
투트모세 1세 (1504~1492)
투트모세 2세 (1492~1479)
하쳅수트 (1473~1458)
투트모세 3세 (1479~1425)
아멘호텝 2세 (1427~1401)
투트모세 4세 (1401~1391)
아멘호텝 3세 (1391~1353)
아멘호텝 4세 (1353~1335)
스멘하카레 (1335~1333)


투탄하문 (1333~1323)
아야 (1323~1319)
호렘헵 (1319~1307)

[제19왕조]
람세스 1세 (1307~1306)
세티 1세 (1306~1290)
람세스 2세 (1290~1224)



메르넵타 (1224~1214)




[제20왕조]
람세스 3세 (1194~1163)


람세스 4세 (1163~1156)
람세스 5세 (1156`1151)
람세스 6세 (1151~1143)
람세스 7세 (1143~1136)
람세스 8세 (1136~1131)
람세스 9세 (1131~1112)
람세스 10세 (1112~1100)
람세스 11세  (1100~1070)

나람신
에리슘





샴시-아다드 1세 (1808~1776)

이쉬메-다간 (1775~)
















앗수르-우발리트 1세 (1363~1328)



엔릴-니라리 1세 (1327~1318)

아릭-덴-일리 (1317~1306)




아다드-니라리 1세 (1305~1274)

살만에셀 1세 (1273~1244)

투쿨티-니누르타 1세 (1243~1207)




앗수르-나딘-아플리 (1206~1203)
앗수르-니라리 3세 (1202~1197)
엔릴-쿠두리-우쭈루 (1196~1192)
니누트라-아필-에쿠르 (1191~1179)
앗수르-단 1세 (1178~1133)


무타킬-누스쿠


앗수르-레샤 이쉬 1세 (1132~1115)
디글랏빌레셀 1세 (1114~1076)
아샤리드-아필-에쿠르 (1075~1074)
앗수르-벨-킬라 (주전 1073~1056)
에리바-아다드 2세 (1053~1054)
샴시-아다드 4세 (1053~1050)
앗수르나찌르팔 1세 (1049~1031)
살만에셀 2세 (1030~1019)
앗수르-니라리 4세 (1018~1013)
앗수르-라비 2세 (주전 1012~972)
앗수르-레샤 이쉬 2세 (971~967)
디글랏빌레셀 2세 (966~935)
앗수르-단 2세 (934~912)
아다드-니라리 2세 (911~891)




수무아붐 (1894~1881)
수무라벨 (1880~1845)
사비움 (1844~1831)
아필-신 (1830~1813)
신-무발리트 (1812~1793)
함무라비 (1792~1750)

삼수일루나 (1749~1712)
아비-에슈 (1711~1684)
아미디타나 (1683~1647)
암미사두카 (1646~1626)
삼수디타나 (1625~1595)











카다쉬만-엔릴 1세 (1374~1360)
부르나부리아쉬 3세 (1359~1333)
카라-하다쉬 (1333)
나지-부기쉬 (1333)
쿠리갈주 2세 (1332~1308)





나지-마루타쉬 (1307~1282)

카다쉬만-투르구 (1281~1264)
카다쉬만-엔릴 2세 (1263~1255)
쿠두루-엔릴 (1254~1246)
샤가라크티-슈리아쉬 (1245~1233)
카쉬틸리아슈 4세 (1232~1225)
엔릴-나단-슈미 (1224)
카다쉬만-하르베 2세 (1223)
아다드-슈마-이디나
아다스-슈마-우쭈르 (1216~1187)


멜리-시파크 (1186~1172)
마르둑 아플라 이디나 1세 (1171~1159)
자바바-슈마-이디나 (1158)
엔릴-나딘-아헤 (1157~1155)

☞ 김영진, [구약성서의 세계]. 18~19쪽 참조

2016년 3월 23일 수요일

[007] 고대 이집트 역사 - 신왕국(아멘호텝 1~3세 시기) [BC 1500~1350년]

[007] 고대 이집트 역사 - 신왕국(아멘호텝 1~3세 시기) [BC 1500~1350]
 
신왕국을 창건하고 남쪽(누비아)과 동쪽(시나이, 팔레스티나 남부) 경계를 확정한 아흐모세 뒤를 이어 기원전 1514년경 아멘호텝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미 6년 동안 아흐모세와 공동통치자로서 통치에 참여했고 20년 이상 단독으로 왕위에 있었다(기원전 1514~1493년경). 그의 통치기간에 누비아는 나일 제2폭포까지 정복되었고 국경은 셈나, 쿰나, 우로나르티 요새에 의해 확보되었다. 아멘호텝 1세가 카르나크의 아문 신전에 실행한 건축조치들과, 테베 가까이에 있는 한 암벽석실분에 자신을 매장하도록 한 결정은 제18왕조 문화의 전체적 흐름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아멘호텝 1세가 통치할 때는 특히 평화스러웠고 이로써 문화가 꽃필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1493년경 왕가 방계 출신의 투트모세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기간에 이루어진 이집트의 군사력 확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투트모세 1세는 남쪽으로 나일 강 제4폭포까지 진출했으며 동쪽과 북쪽으로는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로 원정대가 통과해 카르케미시 부근의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그는 자신의 석주비문을 세웠다. 이로써 시리아 북쪽을 지배하는 미탄니 왕국와 맞서게 되었다. 투트모세 1세는 유명한 테베의 왕들의 계곡에 자신의 암벽묘실을 건설한 첫 파라오였는데, 이후 이 암벽묘실은 신격화된 투트모세 1세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투트모세 1세가 왕위에 오른지 12(?) 후에 투트모세 2세가 그 뒤를 이었다. 이 왕은 멤피스에 있는 군대 본영에서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와 같은 영토 확장 정책을 좇았다. 하지만 그는 부왕처럼 시리아 깊숙이 진출하지는 못했다. 투트모세 2세는 등극한 지 몇 해 되지 않아 죽었는데, 측실에서 난 아들 투트모세 3세가 왕위에 오르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투트모세 2세의 이복동생이자 부인인 유명한 여왕 하트셉수트가 섭정했다(기원전 1479~1457). 그 역시 투트모세 1세의 딸이자 또한 특출한 통치자로서 이후 신왕국시대 왕비와 황후가 행사하기 시작한 영향력있는 역할에 대한 본보기가 되었다. 하트셉수트는 섭정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몇 년 후 스스로 파라오가 되었다. 이제 한 여인이 이집트의 이중왕관을 쓰고서 남자의 이름과 칭호를 사용했으며 남자임을 드러내는 상징적 행동을 했다. 하트셉수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에서도 또 그가 사용한 수식어에서도 자신이 여성임을 부인했다. 그는 여성 호루스였으며 한편으로 남성 스핑크스였다. 하트셉수트는 그의 총애를 받는 자들 가운데 특히 아문 신전의 두 고위 관리를 후원했으며 그 중에서도 그의 개인 영토도 관리하는 세넨무트를 후원했다. 하트셉수트의 평화로운 재위기간에 힉소스의 전통과 거리를 두는 데 무게를 둔 새로운 국가 의식이 나타나서 물질문화를 이전보다 세력되게 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아시아 및 후기 미노스 크레타와의 사이에 풍부한 결실을 얻은 교류 덕분일 수 있다. 물론 이 여왕은 데이르 엘 바흐리에 있는 자신의 장제전에 가장 의미 있는 기념물을 세우도록 했다. 아주 잘 보존된 이 건축물의 꽃은 이른바 푼트 실()”이다. 이 방의 부조는 소말리아의 이국적 해변에 위치한 푼트로의 무역원정을 묘사하고 있다. “탄생 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하트셉수트는 자신이 적법한 왕위계승자임을 내보이려고 자신의 신적인 계보와 탄생을 부각했다.


하트셉수트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하트셉수트가 약 15년 통치한 후 그 영향력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가 사망한 직후에 22년간 공동통치자였던 투트모세 3세는 단독통치자가 되었으며(기원전 1479~1422), 여성 파라오에 대한 일종의 기록 말살로 하트셉수트와 거리 두기를 시작했다. 그림, , 기념물에 있는 하트셉수트의 이름이 훼손되거나 삭제되었다. 후대의 기념물에서도 전통적인 왕의 계보가 있는 목록과 그림에서도 하트셉수트는 생략되었다. 이 모든 것이 계모이자 장모인 자신의 전임자에 대한 투트모세 3세의 개인적 증오를 드러낸다고 오랫동안 추측되어 왔다. 하지만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이것은 개연성이 적다. 왜냐하면 하트셉수트의 기념물 훼손과 이집트 역사에서 그를 삭제한 것은 투트모세 3세의 재위 후기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투트모세 3세

하트셉수트가 다스리는 동안 이집트 제국이 가까운 아시아 지역을 등한시한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왜냐하면, 미탄니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시리아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카데시, 카트나, 투닙, 누하시셰, 무키시, 알랄라흐의 군주들은 미탄니의 지배권을 인정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 사후 단독통치자가 되자 지체 없이 팔레스티나로 원정을 떠났으며 메기도에서 카데시가 이끌던 큰 연맹을 격파했다. 메기도는 7개월 동안 공격을 받았고 주위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점령되었다.
 
투트모세 3세는 특히 5~8번째 출정을 통해 특출한 강대국으로서의 이집트의 입지를 확장했는데, 이는 기원전 1450~1445년 자신의 재위 29~33년에 일어났다. 이 원정으로 그는 시리아 북부까지 나아갔으며, 그곳 알레포에서 미탄니와 전투를 했다. 그는 패한 적군을 유프라테스 강 너머까지 추격하여 나하린()[구약성서에서는 아람 나하라임의 형태로, 나중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칭호로 계속 살아있다. 이 개념은 유프라테스 대만곡 내부와 건너편 지역을 말한다]라고 불리는 미탄니 왕국의 내부까지 이르렀다. 비록 투트모세 3세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있는 카르케미시와 에마르 너머까지 나아갔으나 미탄니는 그를 피해 결정적인 전투를 모면하고 정복당하지 않았다. 투트모세 3세는 회군할 때 카세시와 거기에 속해 있던 비카의 타흐시도 함께 점령했다. 이집트는 이로써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으며 하투샤, 아시리아, 바빌론에서 오는 사절단들이 증명해주고 있듯이 국제적인 명망을 계속 유지했다. 이집트는 또한 엄청난 전리품과 조공을 받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카데시 너머의 시리아를 소유하는 것은 불확실했다. 이후 몇 년간 여기서 계속 반복되는 반란은 제압되었을 것이고, 또 후에는 심지어 미탄니 주둔군도 카데시로 이동했을 것이다.
 
이집트는 다양한 기관과 조치로 자신의 지배권을 유지했다. “북쪽 외국 감독자가 정복지역을 관리하는 임무를 받았다. 물자와 군대를 아무 위험없이 내지로 옮기기 위해 군사적 보충지점, 보급기지 및 점령지역과 항구들을 해안을 따라 설치했다. 왕가에서는 볼모를 택해 이집트로 보냈다. 그들 가운데는 장래 유력한 왕위계승자가 될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이집트화하는 것은 이집트에 상당히 유익한 것이었다. 충성서약을 통해 봉신들은 이집트에 의무를 지게 되었고, 반란자에 대한 토벌은 매번 무시무시했다.
 
카르나크에 있는 아문 신전은 이집트의 번영으로 많은 유익을 얻었다. 왜냐하면, 외국의 영토를 선사 받고, 전리품과 노예 형태로 하사품을 할당받았기 때문이다. 투트모세 3세는 남쪽으로 제4폭포가 있는 나파타 지역까지 자신의 지배권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미 몇 년 동안 공동통치자로서 직무를 수행했던 아멘호텝 3(기원전 1425~1400년경)는 부왕에 필적하는 후계자임을 입증했다. 이미 재위 첫해에 그는 시리아로 진출했으며, 그 후에도 그곳으로 출정을 떠났다. 출정의 주된 목적은 부왕 사후 반란이 일어났던 도시인 카데시, 니야, 투닙이었다. 그러나 호전적이고 자신의 조치와 보복행동에는 단호했던 이 왕은 강력한 미탄니 왕국과 추진력 있는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 1세 때문에 북시리아와 유프라테스를 자신의 세력 안에 둘 수 없음을 간파했을 것이다. 이집트의 북쪽 경계는 우가리트에서 오론테스 강 중류까지 이르는 경계로 굳어졌다. 사로잡혀온 많은 전쟁 포로, 그 중에는 마리얀누와 아피루도 있었는데, 시리아의 반란자들에 대한 공개 처형이 보여주듯이 이 지역 내에서 아멘호텝 2세는 자신의 지배권을 강력하게 관철했다.
 
투트모세 4세 재위 동안(기원전 약 1400~1391) 정치전선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와 미탄니 왕국의 관계는 점차 긴장이 해소되었다. 두 나라에 히타이트인의 위협이 점점 증가했기 때문이고 또한 미탄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도 권력이 그 한계에 도달했음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한 분위기는 투슈라타가 아멘호텝 3세에게 보낸 편지(EA 24)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탄니의 왕 아르타타마 1세가 자신의 딸을 이집트 파라오에게 아내로 준 것에서 드러난다. 이 외에 아마르나 서신에 있는 회고적인 문장들은 이집트가 투트모세 4세 치하에서 이미 바빌로니아(카라인다시, EA 10) 및 아시리아(아슈르나딘아헤)와 외교적 접촉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리아-팔레스티나, 즉 게제르와 시돈에서 파라오는 뚜렷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투트모세 4세의 지배는 아주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카르나크에 있는 신전의 확장이 이 시대의 특기할만한 일인데, 여기에 투트모세 4세는 기념비적인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후에 이 오벨리스크는 로마로 옮겨졌다.
 
투트모세 4세를 이어 위대한아멘호텝 3세가 즉위하여 38년 이상 왕위에 있었다(기원전 1391~1353). 그는 오리엔트의 전형적인 군주들처럼 자신을 과시하면서 통치했는데, 이것은 기념비적인 사건을 새겨 넣은, 다량의 시리즈로 만들어진 딱정벌레석과 함께 대부분이 거대한 인상적인 건축물(아멘호텝 3세의 건축물 가운데 카르나크 솔레브, 그리고 룩소르에 있는 신전이 특히나 뛰어나다)을 통해 증명된다. 그의 하렘 또한 컸다. 여기에는 많은 공주가 살았는데, 그 가운데는 두 명의 미탄니 왕인 슈타르나 2세와 투슈라타의 두 딸도 있었다. 첫째 딸은 하렘으로 300명의 종자를 데려왔다.
 
군사활동은 아멘호텝 3세 재위 5, 6년엠나 누비아에서 전개되었다. 이들과 함께 우선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은 금이 수많은 나라와 궁정과의 국제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주로 금으로 변제된 조공이 계속해서 이집트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친선관계 유지, 때때로 쌍방 간의 원조 및 평화 유지는 거의 제의적으로 이루어지는 예물, 서신, 사신 및 하렘 공주들의 교환을 대가로 이루어졌다.
 
시리아-팔레스티나에서 이집트의 권위는 흔들렸다. 왜냐하면 이집트 측에서의 모든 군사행동은 중지되었고, 파라오는 이곳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래서 히타이트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내부 상황으로 이집트의 최고통치권은 서서히 쇠퇴해 갔다. 몇몇 봉신은 독단적인 행동을 취했는데, 특히 아피루의 원조를 받아 자신의 고유한 권력정치를 펼쳤던 아무루가 그러했다.
 
클라아스 R. 빈호프 지음, 배희숙 옮김, [고대 오리엔트 역사], 167~174쪽 참조

2016년 3월 22일 화요일

[006] 고대 이집트 역사 - 신왕국(제18왕조) [약 1540~1070년]

[006] 고대 이집트 역사 - 신왕국(18왕조) [1540~1070]
  
15세기 중반 이집트 신왕국

  
신왕국은 제18왕조의 첫 번째 왕인 아흐모세로 시작되는데, 이로써 이집트 역사에서 찬란한 시대가 열린다. 기원전 15세기 특히 투트모세 3세 치세에 대제국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아마도 제4폭포(와왓 및 쿠시)까지 이르는 상하 누비아가 제국에 속했을 것이며, 아시아로는 중부 시리아까지 제국이 확장되어 우가리트, 아무루 및 카데시와 국경을 같이 했다.
 
조형미술과 수공업은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이에 대한 예로서 조각, 벽화,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나온 아주 다양한 종류의 예술적인 물건들을 들 수 있다.
 
신왕국의 건축은 에크나톤의 새 수도인 아케르아톤, 델타 지역의 람세스 왕조의 저택인 피 라메세(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람세스의 집인 피 라메세는 오늘날 칸티르라는 지역의 유적이다), 누비아에 건축된 요새들,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요새 부헨, 그리고 다수의 신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카르나크에 있는 아문 신의 제국 신전에서 가장 큰 건축 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이곳에서는 새 기둥으로 둘러싸인 내실과 탑문(塔門)이 항상 반복해서 건축되었고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이외의 중요한 신전이 룩소르, 솔레브, 아부심벨에 건축되었다. 왕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장제전(葬祭殿0을 세웠는데, 이들 중 데이르 엘 바흐리에 있는 하트셋수트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테베에 있는 아멘호텝 3세의 신전은 정확히 말해 멤논 거상만 남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 영역에서의 변화인데, 이 변화는 아멘호텝 4(에크나톤)가 장려한 아톤 제의에 의해 일어났다. <사자의 서>라는 문학형식이 가장 고전적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파피루스나 가죽에 쓰인 기록이나 또는 그 기록에 대해 묘사한 그림이 죽은 자와 함께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후 많은 제의가 저마다 특유한 형태를 갖게 되었다. <숨겨진 방의 문서>(Amduat)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 문서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대중적인 된 저승 인도자의 특징이 점점 그 표준적인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들 문헌 외에 <문의 책>이 널리 퍼졌는데, 이 책은 태양이 밤에 지하세계를 여행하고 다시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다루고 있다. 태양 또는 레 하라흐테, 레 아툼 혹은 아문 레로 불리는 태양신은 높이 숭배되었고, 제의에서 이 신이 지닌 아주 두드러진 역할을 반영하고 있는 태양찬가 속에 그리고 죽음과 저승에서의 삶과 이승에 대해 가졌던 표상 속에 이러한 숭배가 표현되었다. 아멘호텝 4세가 다스리는 동안 태양신 숭배는 태양을 신의 유일한 현현으로 간주함으로써 마침내 절정에 달했다. 고전적인 중기 이집트어로 쓰인 문헌과 나란히 특히 람세스 왕조 시대에는 세속문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가운데 이집트 일상어로 쓰인 사랑의 노래와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신왕국시대의 이집트처럼 거대한 왕국은 효율적인 정부조직에 의존했다. 이 정부의 중심지는 테베였는데, 이곳에는 파라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재상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는 또한 아문 레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사제와 이집트에서 가장 부유한 신전의 가장 높은 지위의 통치자와 재정, 곡물, 건축 활동 및 기타 업무에 대한 감독을 맡은 수많은 하위 관리가 살았다. 누비아에서는 쿠시의 왕자라는 칭호를 지닌 총독이 통치했다. 테베와 사카라에 있는 관리들의 묘는 왕과 아주 가까이 있는 이들 왕국 관리들이 얼마나 부유하고 중요하며 충성스러웠는지에 대한 인상을 전해준다.
 
신왕국 시대에는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계층의 힘뿐만 아니라 군대의 힘도 점점 증가했다. 군대는 누비아를 마주해 있는 남쪽 지역과 군대 본영이 자리하고 있는 멤피스가 속한 북쪽 지역에 집중해 있었다. 이곳에서 왕자들은 무기 다루는 법을 배웠고 문헌전승으로는 “(전쟁의 신인) 몬투의 일을 익혔다. 메다무드와 토드에 에 있는 이 신의 성역들은 특히 투트모세 3세 이래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기원전 14세기 말경에 하렘헤브라는 한 장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그의 부관이었던 한 인물이 람세스 1세라는 이름으로 그를 이어 즉위했다.
 
이집트가 이방의 영향에 대하여 점점 더 개방적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국의 영토는 광대했고 국제 관계는 증가했기 때문이다. 외국 물품, 군대, 사신, 영주들이 이집트로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전쟁포로들 가운데 하나인 아피루도 팔레스티나에서 잡혀왔으며 이집트 신전에 양도되었다. 하지만 아시아인은 높은 관직에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 외국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는데 이는 멀리 떨어져 있는 푼트(소말리아)로의 무역원정을 묘사한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벽화에 그림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집트의 종교에 미친 와국의 영향도 명백하다. 그래서 수많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신들이 이집트에서 숭배되었다. 예를 들면, 힉소스 시대에 이미 세트와 동일시 되었던 바알, 무엇보다 전쟁의 여신으로 간주된 아스타르테/아나트, 아멘호텝 2세 시대에 특히 전쟁의 신으로 그리고 후에는 카드슈와 함께 의술의 신으로 숭배된 레셰프, 그 이름 때문에 하르마키스 호론 제의에서 스핑크스와 연관을 갖게 된 호론, 멤피스의 프타와 동일시된 예술의 신인 코샤르, 카드슈로 불리고 다산의 여신으로 숭배된 (니네베)의 아셰라와 이슈타르가 있다.
 
클라아스 R. 빈호프 지음, 배희숙 옮김, [고대 오리엔트 역사], 164~167쪽 참조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4왕조, ‘성스러운 왕’

스네프루 [Snefru, 기원전 2613~2589] 이집트 제 4 왕조 , ‘ 성스러운 왕 ’   스네프루는 고대 이집트의 제 4 왕조를 시작한 왕이다 . 그는 24 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남북 지역의 교류를 확대했으며 영토도 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