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놀즈 [William Davis Reynolds Jr., 1867~1951]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이눌서(李訥瑞)
【1867년】
- 11월 12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항구도시 노퍽(Norfolk)에서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와 캐리 머베인의 다섯 자녀 중 넷째로 출생했다.
- 아버지는 목화 중개사업을 하는 사업가이자 교회의 장로였고, 어머니와 다른 형제도 모두 교회와 학교에서 장로, 집사, 교사로 봉사할만큼 경건한 가정이었다.
【1884년】
- 어린 시절 레이놀즈는 지역 학교와 교회에서 만능 스포츠맨으로 유명했지만 중ㆍ고등학교 시절부터 언어에 큰 매력을 느끼고 집중공부했다. 이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1884년 남부의 장로교계 사립명문 햄든-시드니칼리지(Hampden-Sydney College) 2학년으로 입학했다.
【1887년】
- 1887년 6월, 최우등으로 졸업할 당시 학사 학위를 두 개(B.A./B.Lit.) 받았고,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 과정도 이수했다. 동시에 대학 최고의 운동선수로 선정될 만큼 운동 실력도 출중했다.
- 언어 재능이 워낙 뛰어났던 그는 존스홉킨스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해 고대언어를 공부한 후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였다.
- 그러나 이 시기에 학교 관계자의 목회 권유, YMCA 전도집회 참여, 해외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약혼녀 팻시 볼링(Patsy Bolling, 1867-1962)의 영향으로 목회와 해외선교로 진로를 변경했다.
【1890년】
- 1890년 9월, 레이놀즈는 미국 리치먼드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교단 신학교인 유니온 신학교에 진학했다.
- 버지니아 유니언신학교에 입학한 후 3년 과정을 2년만에 이수하고 졸업했다.
【1891년】
- 그가 한국을 선교지로 선택한 계기는 1891년 10월에 테네시주 내슈빌 소재 밴더빌트대학에서 열린 전국신학교선교연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의 선교집회에 참석한 일이었다. 그는 당시 안식년 중이던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밴더빌트를 졸업한 후 에모리대학에 진학한 한국인 윤치호의 연설을 들었다. 신학교로 복귀한 후 동료 윌리엄 전킨에게 함께 한국으로 가자고 설득했다. 집회 현장에서 시카고 매코믹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윌리엄 테이트도 만났다.
- 매코믹의 테이트와 유니언의 레이놀즈, 전킨이 각각 총회 해외선교상임위원회에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재정 문제로 반려되었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와 타자기 사업자였던 그의 형 존 언더우드의 재정 후원 약속에 힘입어 ‘7인의 개척자들’, 즉 레이놀즈 부부, 전킨 부부, 테이트 남매(윌리엄과 매티), 여선교사 리니 데이비스가 남장로회의 한국선교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1892년】
- 5월 5일, 약혼녀 팻시 볼링(Patsy Bolling, 1867-1962)과 결혼 후 리치몬드의 이스트 하노버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 9월 7일,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센트럴 그랜드 에비뉴 장로교회들로부터 선교파송예배
- 1진(데이비스)이 1892년 10월 18일, 2진(나머지 6인)이 11월 4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1893년】
- 1월 28일에 북장로회와 연합하여 설립한 장로교선교공의회에서 레이놀즈는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 회의에서 남장로교 선교회의 선교구역으로 호남지역이 확정되었다.
- 1893년 서울에서 첫 아들(William Davis Reynolds III)이 태어났으나 같은 해에 사망하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1894년】
- 3월, 호남지역 5개 도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 선교답사 및 전도 활동
- 1894년 8월 20일 아들 존 볼링(John Bolling)이 태어났다.
【1895년】
- 레이놀즈를 비롯한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1895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전주를 중심으로 선교부 개설을 위해 정탐과 부지확보를 위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이들이 실제 호남에 정착한 것은 1895년 말부터였다.
- 테이트 남매가 전주, 전킨 부부가 군산에 정착하고 있었던 반면, 레이놀즈의 호남 정착은 한글 성경번역 및 개정 활동 때문에 지체되었다.
- 레이놀즈는 공인번역자위원회에 1895년 10월부터 참여해서 한국에서 은퇴한 1937년까지 위원으로 지내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표 성경인 구역과 개역성경의 구약성경 대부분을 번역했다.
【1897년】
- 레이놀즈 가족은 1897년 6월 15일에 전주로 이사했다.
- 호남의 첫 교회인 전주서문교회에서 레이놀즈의 집례로 첫 세례교인 7명이 탄생했다.
【1899년】
- 전주로 이사했어도 성서번역 일이 워낙 과중했기에 그는 1899년 가을 이후 주로 서울에 머물렀다.
- 1899년 8월 10일 딸 캐리 머베인(Carey Mebane)이 태어났다.
【1900년】
- 1900년 9월 9일 전주 서문외 완산 북림 기슭에 있는 이눌서의 집 사랑방에서 하리슨 선교사(W. B. Harrison)가 만 16세의 김창국을 대상으로 근대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1902년】
- 1902년 목포선교부로 전근된 레이놀즈는 몇 달 머물지 않고 다시 9월에 서울로 이사했다.
- 1902년 10월 밀러 선교사의 지방 순회로 공석이된 승동교회의 임시 당회장으로 부임했다.
- 1902년 12월 11일 막내 딸 엘라 틴슬리(Ella Tinsley)가 출생하였다.
【1904년】
- 중간에 안식년 1년을 다녀왔고, 1904년까지 서문교회 담임목사로 이름이 올라있었으나 여전히 1년의 4분의 1은 서울에 머물렀다.
【1906년】
- 이미 이전부터 서울에서 성경번역을 하면서 전주교회도 돌아보았지만, 1906년부터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남장로회 파견 교수요원으로 가서 신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 1906년 3월 제임스 게일 목사의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운 연동교회의 강단에서 목사로서 직무를 담당했다(1907년 8월까지)
【1907년】
- 1907년 한국인 번역조사 이창직, 김정삼과 레이놀즈 선교사가 구약성경 번역을 위한 번역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 YMCA 낙성식에서 설교를 했다.
【1908년】
- 1908년 1월까지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전킨(William M. Junkin)이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자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전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전주에 있었어도, 여전히 그의 주업은 성경번역과 개정이었다. 이 시기는 그의 사역 공간 범위가 여럿으로 중첩된 시기였다. 레이놀즈는 전주에 내려간 1908년부터 학기 중에는 내내 평양에 머물렀다.
- 햄튼 시드니 대학 명예신학박사(D.D)
【1910년】
- 4월 2일 구약성서 전체 번역을 마쳤다.
- 5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복귀하여 1911년 10월 '전주교회'로 돌아왔다.
【1911년】
- 1911년 독노회 회장을 역임했다.
【1912년】
- 1912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레이놀즈를 조직신학 전임교수로 임명했다.
【1924년】
- 전주와 평양을 오가던 생활은 안식년 후 1924년에 종결되었다.
- 햄튼 시드니 대학 법학박사(LL.D)
- 한국 복귀 후 1937년 은퇴할 때까지 평양에 상주했다.
【1929년】
- 지리산 노고단과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내에 9홀 골프장을 설계해서 만들었다
【1937년】
- 1906년부터 1937년까지 평양에서 레이놀즈가 가르친 학생은 총 743명이었다. 1901년 사숙 형태로 시작된 평양장로회신학교가 1904년부터 커리큘럼에 따라 체계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38년에 문을 닫았으므로 사실상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존재한 전 기간에 교리와 조직신학을 전담하여 가르친 이가 바로 레이놀즈였다. 따라서 사실상 레이놀즈는 한국장로교회에 교리를 가져다 준 ‘교회의 선생’이었다.
- 레이놀즈와 부인 팻시는 1937년에 한국선교현장에서 은퇴한 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를 거쳐 남장로회 은퇴선교사촌이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트에서 살았다.
【1951년】
- 레이놀즈는 1951년에 83세로 별세하여 블랙 마운틴의 마운틴 뷰(Mountain View) 공원묘지에 묻혔다.
- 팻시는 얼마간 은퇴촌에 더 머무르다 막내딸 엘라의 집에서 딸 부부와 함께 살던 중 1962년에 93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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