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송 전폐제 유자업(劉宋 前廢帝 劉子業, 449~466년) : 유송 5대 황제(AD. 464~466년)
- 유송 전폐제 유자업(劉宋 前廢帝 劉子業)
- 출생일 : 449년 2월 25일
- 사망일 : 466년 1월 1일 (향년 16세)
- 묘소 : 미상 (불명확)
- 통치 기간 : 464년 7월 12일 ~ 466년 1월 1일 (1년 173일)
- 전임 황제 : 송 효무제 (宋孝武帝, 유준 劉駿)
- 후임 황제 : 송 명제 (宋明帝, 유유 劉彧)
- 재위 중 사용한 연호 :
- 永光(영광) : 465년 정월 ~ 465년 8월
- 景和(경화) : 465년 8월 ~ 11월
【기원후 449년】
- 2월 25일(음력 1월 17일), 유자업(劉子業)은 449년, 그의 아버지 유준(劉駿)이 아직 그의 할아버지 문제(文帝) 밑에서 무릉왕(武陵王)이었을 때 태어났다. 아명은 법사(法師)이다.
- 그의 어머니 왕현원(王賢媛) 공주는 443년에 유준과 결혼했다.
【기원후 453년】
- 453년 유소가 문제를 암살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 후, 유준은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 일어났다. 유소는 유자업을 처형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 그해 후반, 유준이 유소를 물리치고 죽인 후 효무제(孝武帝)로 제위에 오르자, 유자업은 감금 상태에서 구출되었다.
【기원후 454년】
- 454년 3월 13일 태자로 책봉되었다.
【기원후 456년】
- 456년 2월 17일, 효무제는 그의 관리 하우(何瑀)의 딸 하령완(何令婉)을 유자업의 태자비로 맞이하게 했다.
【기원후 458년】
- 458년, 효무제는 관례대로 별궁에 태자 유자업의 가정을 꾸몄다.
【기원후 460년】
- 460년에는 효경(孝經)을 공개적으로 낭독했다.
【기원후 461년】
- 461년 10월 24일, 하령완이 사망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기원후 463년】
- 463년 10월 28일에는 성인 의복을 입었다. 태자 시절, 그는 끊임없이 실수를 저질러 효무제의 질책을 받았고, 이로 인해 효무제와 그의 동생 신안왕(新安王) 유자란(劉子鸞)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효무제는 때때로 유자업을 유자란으로 대체하는 것을 고려했다(이때 효무제는 유자란의 어머니 은씨(殷氏)를 크게 총애했다). 그러나 관리 원의(袁顗)가 그의 학구열을 칭찬하여, 효무제가 유자업을 유자란으로 대체하려는 생각을 멈추게 했다.
【기원후 464년】
- 7월 12일, 효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당일 유자업은 태자로서 즉위하였다.
- 464년 7월, 효무제가 사망하고 유자업이 전폐제(前廢帝)로 제위에 올랐다. 관리 채흥종(蔡興宗)이 그에게 제국의 인장을 바쳤을 때, 그는 오만하고 무심한 태도로 받았으며 슬픔의 표정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채흥종은 이것이 그의 통치에 나쁜 징조라고 다른 이들에게 언급했다.
- 제위에 오르자마자, 아마도 아버지 효무제(孝武帝)에 대한 원한 때문에, 새 황제는 즉시 할아버지 문제(文帝) 재위 기간에 수립된 법률에 대한 효무제의 모든 변경사항을 철회하도록 명령했다. 효무제에 대한 그의 원한은 조상 사당을 위한 새로운 황제 초상화를 의뢰한 후 그것들을 보러 갔을 때도 드러났다. 창시자(그의 증조부) 무제(武帝)의 초상화를 보고 “그는 여러 황제들을 사로잡은 위대한 영웅이었다”고 평했다. 문제의 초상화를 보고는 “그도 꽤 좋았지만, 불행히도 아들에게 목을 잃었다”고 말했다. 효무제의 초상화를 보고는 불쾌하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코가 크구나. 코가 어디 있었지?”라고 말하며 효무제의 코를 과장되게 다시 그리도록 명령했다.
【기원후 464년】
- 464년 8월 31일, 그는 그의 할머니 노태후(路太后)를 태황태후로, 그의 어머니 왕황후(王皇后)를 황태후로 추존했다.
- 464년 말, 왕태후(王太后)가 매우 위독해져 전폐제를 불러 만나고자 했다. 그는 병든 사람들의 방에는 귀신이 있어서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분노한 태후는 시녀들에게 “칼을 가져와 나를 잘라 열어, 이 짐승이 어떻게 내게서 나왔는지 보라!”고 말했다. 그녀는 곧 사망했다.
【기원후 465년】
【황실 행정과 권력 투쟁】
- 황실 행정에서, 그의 대숙부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이 최고위 관리였으며, 다른 고위 관리로는 안사백(顔師伯)과 유원경(柳元景)이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실제 권력은 효무제의 측근이었던 대법흥(戴法興)과 소상지(巢尚之)가 쥐고 있었다. 대법흥은 종종 전폐제의 충동적인 행동을 억제하며, 무능함 때문에 폐위되고 살해된 대숙부 소제(少帝)의 운명에 대해 경고했다. 465년 가을, 전폐제는 대법흥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소상지의 관직을 해제했다. 이러한 행동은 고위 관리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유원경과 안사백은 전폐제를 폐위하고 유의공을 대체 황제로 옹립하려 계획했다. 유원경이 장군 심경지(沈慶之)와 상의했을 때, 심경지는 유의공과 이전에 친분이 없었고 안사백의 무례함에 분개하여 이 사실을 전폐제에게 알렸다. 결과적으로, 대법흥에게 자살을 강요한 지 불과 12일 만에, 전폐제는 친히 황실 근위대를 이끌고 유의공과 그의 네 아들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유원경과 안사백,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 전폐제는 유의공의 사지를 자르고, 복부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내어 조각조각 잘랐다. 또한 유의공의 눈을 파내어 꿀에 담그고 "절인 귀신 눈"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전폐제가 신뢰한 사람들은 원의(袁顗), 서애(徐爰), 심경지, 그의 형제 우장왕(豫章王) 유자상(劉子尚), 그리고 그의 누이 회계공주(會稽公主) 유초옥(劉楚玉) 등이었다. 당시 매우 부도덕하다고 여겨졌던 행동으로, 유초옥이 전폐제가 수천 명의 후궁을 가질 수 있는데 자신은 남편 한 명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말하자, 전폐제는 30명의 잘생긴 젊은 남자들을 선발하여 그녀에게 주어 애인으로 삼게 했다. 전폐제는 또한 여전히 동생 유자란(劉子鸞)에 대한 원한을 품고, 유자란을 자살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유자란의 어머니 은비(殷妃)의 다른 두 자녀인 남해왕(南海王) 유자사(劉子師)와 그들의 여동생도 죽였다.
- 이때, 전폐제는 또한 비상사태를 선포할 기회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삼촌 의양왕(義陽王) 유창(劉昶, 서주태수)이 건강(建康)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을 때, 그는 거짓으로 유창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심경지를 보내 유창을 공격하게 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유창은 처음에는 저항하려 했지만,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북위(北魏)로 도망쳤다.
- 그는 고모 신채공주(新蔡公主) 유영미(劉英媚)와 근친상간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녀를 후궁으로 삼기로 결심하여 한 시녀를 죽여 그녀의 몸을 유영미의 남편 하매(何邁, 즉 그의 처남)에게 전달하고, 아내가 죽었다고 알렸다. 하매는 진실을 알고 있었고, 이 굴욕을 참을 수 없어 전폐제를 폐위하고 그의 동생 진안왕(晉安王) 유자훈(劉子勛)을 황제로 옹립할 것을 고려했다. 이 음모는 누설되었고, 전폐제는 친히 하매를 공격하여 죽였다. 심경지(沈慶之)가 하매에게 일어난 일을 들어 전폐제에게 행동을 고치도록 권했을 때, 전폐제는 그를 독살했다. 한편, 전폐제는 465년 12월 16일 태황태후(太皇太后) 노혜남(路惠南)의 조카 노씨를 황후로 삼았다.
【숙부들에 대한 폭정】
- 전폐제(前廢帝)는 그의 숙부들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매우 의심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건강(建康)에 불러모아 궁궐에 연금시켰다. 그는 자주 그들을 구타하고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 특히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 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祐) 등 과체중인 숙부들을 돼지를 재는 것처럼 우리에 가두어 체중을 측정했다. 그는 유욱을 “돼지 왕”, 유휴인을 “살인 왕”, 유휴우를 “도둑 왕”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숙부인 동해왕(東海王) 유이(劉褘)는 고집이 세고 어리석다고 여겨져 “나귀 왕”이라고 불렸다. 그는 종종 유욱, 유휴인, 유휴우를 죽이고 싶어 했지만, 매번 유휴인이 그를 아첨하여 마음을 바꾸게 했다.
- 한 번은 유욱을 돼지처럼 묶어서 부엌으로 보냈는데, “오늘은 돼지를 잡는 날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휴인이 “오늘은 돼지를 잡는 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격분하여 유휴인에게 왜 그런지 물었고, 유휴인은 “전하의 아드님이 태어나시면 그때 돼지를 잡아서 내장을 꺼내십시오!”라고 말했다. 전폐제는 유휴인의 농담을 좋아하여 유욱을 죽이지 않았다.
【궁중 방어와 유자훈 살해 시도】
- 자신이 암살될까 두려웠던 전폐제는 종월(宗越), 담금(譚金), 동태일(童太一), 심유지(沈攸之) 등 강력한 무장들에게 궁궐 방어를 맡겼다.
- 전폐제는 또한 자신의 동생 유자훈(劉子勛)을 위협으로 여겼다. 특히 문제(文帝), 효무제(孝武帝) 그리고 유자훈이 모두 아버지의 셋째 아들이라는 점을 의식했다. 그리하여 하매(何邁)의 음모를 구실 삼아, 시종 주경운(朱景雲)을 보내 유자훈에게 독약을 전달하여 자살을 강요하게 했다. 그러나 주경운이 유자훈의 방어 진지인 심양(尋陽, 현재 장시성 주장시)에 접근했을 때, 그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소식을 흘렸다. 유자훈의 보좌관 등완(鄧琬)은 이에 반란을 선포할 기회를 잡았다(이 시점에서 등완은 아직 유자훈을 황제라고 선포하지는 않았다).
【패륜적인 행동과 죽음】
- 동시에 전폐제는 부도덕한 행동을 계속했다. 그는 공주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드러눕게 하고 시종들이 그들과 성관계를 맺도록 명령했다. 그의 숙부 유삭(劉鑠)의 아내 남평왕비(南平王妃) 강씨(江氏)가 거부하자, 그는 그녀를 채찍질하게 했다. 그는 그녀의 세 아들 남평왕(南平王) 유경유(劉敬猷), 여릉왕(廬陵王) 유경선(劉敬先), 안남현후(安南縣侯) 유경원(劉敬淵)을 죽였다. 그는 또한 시녀들에게 옷을 벗고 서로를 맨몸으로 쫓아가도록 명령했다. 한 시녀가 거부하자 그는 그녀의 목을 베었다. 그날 밤 그는 꿈에 어떤 여인이 자신을 저주하는 꿈을 꾸었다. “너는 너무 포악하고 부도덕하여 내년 밀 수확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후 꿈속의 여인과 비슷한 시녀를 찾아 그녀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꿈을 꾸었는데, 살해된 시녀가 자신을 저주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그는 다음 날 밤 귀신을 쫓는 의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기원후 466년】
- 의식에서, 전폐제의 시종 중 한 명인 수적지(壽寂之)는 평소 전폐제에게 자주 질책을 받았으며, 전폐제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에 여러 사람들과 가담했다. 수적지는 그의 공모자들을 풀어서 전폐제를 에워쌌다. 전폐제는 도망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고, 수적지에게 살해되었다. 이때 그는 17세였다.
- 그는 사망한 태자비 하씨와 함께 묻혔다. 유욱(劉彧)이 황제에 올라 명제(明帝)가 되었다.
【가족 관계】
- 부친 : 송 효무제 (宋孝武帝, 유준 劉駿)
- 모친 : 왕현원(王賢媛)
- 숙부 : 송 명제(宋明帝) 유욱(劉彧)
- 后妃 (후비, 황후 및 후궁)
- 하령완(何令婉) : 원배(첫 부인), 후에 헌황후(獻皇后)로 추시됨
- 노황후(路皇后) : 태황태후 노혜남(路惠男)의 동생 노도경(路道慶)의 딸
- 유영미(劉英媚) : 귀빈(貴嬪) 지위, 유자업(劉子業)의 고모, 사칭하여 사씨(謝氏)로 알려짐
- 양량제(羊良娣)
- 원보림(袁保林)
- 자녀
- 아들(이름 미상) : 아마도 유몽(劉矇)의 아들일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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