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李載馨, 1871-1949] 장로교 목사.
【1871년】
- 1871년 12월 16일 출생. 초명은 재남. 생부는 이필웅(李必應)이다.
【1884년】
- 14세 때 경평군 이세보(李世輔)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선조의 3남 의안군의 9대손인 경평군은 벼슬이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이르렀고 안동김씨 세도에 밀려 전라도 신지도에서 3년(1860-1863)동안 유배생활을 겪은 학자이자 시조시인이었다. 이같이 왕가(王家)를 배경으로 출생하여 궁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96년】
- 26세 때에는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의 관직은 세마직(洗馬職)과 풍기군수에 이르렀다.
【1905년】
- 을사늑약(1905년)이 체결되고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관직을 버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1907년】
- 일정한 직업없이 방황하던 중에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동기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 우선 그는 비록 방랑하는 선비 신세로 지냈지만 1년에 2차 충주(忠州)에 있는 선영을 꼭 찾아 보았는데 이때 그를 모신 마부 엄귀현(嚴貴鉉)이 그에게 전도하였다는 설이 있다. 엄귀현은 평생을 마부로 지내며 전도에 열심을 다한 봉우재교회(현 경동제일교회) 교인으로 후에 이재형이 교인이 되어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도사경회에 참석했을 때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린 인물이다.
- 둘째로는 이재형의 부인 정씨(鄭氏, 1870-1923)가 전도하였다는 설이다. 남편이 집을 나가 방랑하고 있는 사이 정씨는 승동교회 교인이 되었고 몇 년 후 돌아온 남편에게 전도하였다. 승동교회 교인들도 합세하여 전도한 결과 기독교인이 되었다.
- 마지막으로는 이재형 자신이 선교사(성명미상)을 찾아가 기독교에 대해 문답을 나누고자 할 때 선교사가 성경을 일독한 후에 오라고 하여 집에 돌아와 성경을 읽는 중에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 이러한 여러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마침내 그가 왕손으로서는 최초로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1907년 그의 나이 38세였다.
- 이 해는 평양대부흥이 일어난 해이고 서울에서는 이상재ㆍ이원긍ㆍ박승봉ㆍ김정식ㆍ유성준ㆍ윤치호 등 소위 양반계층이 일거 기독교에 입신하던 그 무렵이었다. 이들 양반들의 기독교 입신이 그의 기독교 입신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로써 승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1914년】
- 1914년에는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 이에 그치지 않고 1914년에는 조사가 되어 경기도 지방 교역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8년】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11회)하였다.
- 졸업한 그해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양평읍ㆍ고읍ㆍ상심리ㆍ묘곡 등 4처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20년】
- 1920년 남대문교회 2대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그해 12월 경충노회 노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 그러나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장로들과의 사이가 원활치 못해 고심하던 중 1921년 사임하고 말았다.
【1922년】
- 1922년 하교(下橋)교회에 부임하였다.
【1924년】
- 1924년에는 승동교회에 부임하여 김영구(金永耈) 목사와 동사목사로 시무하였다.
【1928년】
- 그러나 김영구 목사가 1928년 별세하고 후임으로 박용희(朴容羲) 목사가 동사목사로 부임하여 시무하면서부터 이재형 목사와의 사이가 껄끄러워지기 시작하였다.
【1933년】
- 박용희 목사와의 관계는 노회와 총회 정치문제로까지 비화하여 1933년 11월 경성노회는 이재형ㆍ박용희 양인을 “성경에 위반됨과 덕을 세움에 부족함”으로 1년간 목사 시무 정지를 명하였다. 이로써 이재형은 일선 목회를 떠나 인사동 집에 칩거하였다.
【1949년】
- 1949년 8월 9일 별세하기 직전 박용희 목사를 불러 화해를 청하고 자신의 장례식 주례를 부탁하였다.
- 비록 목회자로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왕손으로 기독교 목사가 되어 사회의 주목을 받았으며 평생을 무보수로 목회하였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학생들을 후원하는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덕흥(李德興) 목사가 그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하였고 김재준(金在俊) 목사도 미국 유학할 때 재정보증인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快莫快於與人 憫莫憫於乞人”(남에게 주면서 사는 것처럼 통쾌한 일이 어디 있으며 남에게 받으며 사는 것처럼 불쌍한 일이 어디 있으랴?)의 정신으로 평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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