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고조 무황제 유유(宋 高祖 武皇帝 劉裕, AD. 363~422년) : 유송(劉宋) 1대 황제(AD. 420~422년)
- 송 무황제 유유(宋 武皇帝 劉裕)
- 출생 : 363년 4월 16일
- 사망 : 422년 6월 26일 (59세)
- 안장 : 초녕릉(初寧陵)
- 통치 기간 : 420년 7월 10일 ~ 422년 6월 26일 (1년 351일)
- 후임 : 송 소제(宋少帝) 유의부(劉義符)
- 연호 :
- 영초(永初): 420년 6월 ~ 422년
- 시호 : 무황제(武皇帝)
- 묘호 : 고조(高祖)
【기원후 363년】
- 4월 16일(음력 3월 17일) 팽성군 팽성현 수여리(彭城 綏輿里) 오늘날의 쉬저우시 동산구(徐州市銅山区)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유교(劉翹), 어머니 조안종(趙安宗)이다.
- 유유(劉裕)의 가족은 일찍이 진(晉) 왕실을 따라 남쪽으로 건너와 경구(京口, 현재 장쑤성 전장시)에 오랫동안 거주했다.
- 《송서(宋書)》는 그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동생인 초왕(楚王) 유교(劉交)의 21세손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편 《위서(魏書)》는 그의 조상이 항(項)씨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 당시 그의 집안 형편은 매우 가난했고, 어머니는 해산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유교(劉翹)는 유유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구할 형편이 되지 않아 한때 그를 버리려고까지 했다. 다만 유회경(劉懷敬)의 어머니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유유를 길러주었기에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어느 시점에서 유교는 재혼했고, 새 아내인 소문수(蕭文壽)는 유교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유도연(劉道憐)과 유도규(劉道規)를 낳았다. 유유는 계모에게 공손하게 대하며 친어머니처럼 모셨다고 한다.
【젊은 시절】
- 유유는 성장한 후 “영웅적인 기개와 넓은 도량을 지녔으며(雄杰有大度)” 키는 7척 6촌이었고, 풍모가 기이하고 뛰어나며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 유유는 젊은 시절 신발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으나, 자주 저포(樗蒲)라는 도박을 하여 가산을 탕진했다. 이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 천대받았고, 품행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유유는 재능이 뛰어나고 큰 뜻을 품고 있었다.
- 당시 낭야왕씨(琅琊王氏) 출신인 왕밀(王謐)은 그를 매우 존경했으며, 심지어 그에게 “그대는 마땅히 한 시대의 영웅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원후 399년】
- 유유(劉裕)는 이후 군대에 몸담았는데, 처음에는 북부군(北府軍) 장령이자 관군장군(冠軍將軍) 손무종(孫無終)의 사마(司馬)로 일했다. 융안(隆安) 3년(399년), 손은(孫恩)이 진(晉) 왕조에 반기를 들고 해도를 통해 회계(會稽)를 점령하자, 삼오(三吳) 지역의 모든 군(郡)들이 그에게 호응하여 손은의 난(孫恩之亂)이 발발했다. 또 다른 북부군 장령이자 전장군(前將軍)이었던 유뢰지(劉牢之)는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고, 그때 유유에게 참부군사(參府軍事)로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유뢰지의 아들 유경선(劉敬宣)과 친구가 되었다.
- 당시 유유는 수십 명의 병사를 이끌고 적군을 정찰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수천 명의 적군과 마주쳐 전투를 벌였는데, 비록 대부분의 병사들이 전사했지만, 유유는 홀로 긴 칼을 휘두르며 저항하여 많은 적군을 살상했다. 유요지의 아들 유경선(劉敬宣)이 병사를 보내 유유를 수색했고, 그가 홀로 적군에 맞서는 것을 보고 모두 유유의 능력에 감탄했다. 이후 유경선은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여 1천여 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군대들이 손은의 각 부대를 격파했고, 회계군의 치소(治所)인 산음(山陰, 현재 저장성 사오싱시)을 점령하여 손은을 해도로 후퇴시켰다.
【기원후 400년】
- 400년 5월, 손은은 다시 회계를 습격하여 회계에 주둔하던 사염(謝琰)을 살해했고, 11월에 이르러 유요지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야 손은을 격퇴할 수 있었다. 유요지는 이후 유유에게 구장(句章, 현재 저장성 닝보시)을 지키게 했다. 당시 구장은 성도 작고 병력도 약했지만, 유유는 항상 전투 준비를 철저히 했다.
【기원후 401년】
- 401년 2월, 손은은 병력을 이끌고 협구(浹口, 현재 저장성 전해)에서 구장으로 진격했는데, 유유는 솔선수범하여 매 전투마다 적의 예기를 꺾었다. 이로 인해 손은은 구장을 점령하지 못하고 오히려 유요지에게 패했다. 3월, 손은은 해염(海鹽, 현재 저장성 해염현)으로 전선을 옮겼고, 유유는 그의 진격 방향을 따라 해염에 성을 쌓고 저항했으며, 공격해 오는 손은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 손은은 이후 해로를 따라 단도(丹徒, 현재 장쑤성 전장시 단도구)로 이동했고, 유유는 천 명 미만의 부대를 이끌고 서둘러 이동하여 손은과 동시에 단도에 도착했다. 당시 유유의 군대는 지쳐 있었고 단도 수비군도 싸울 의지가 없었지만, 손은의 공격에 맞서 유유는 여전히 군대를 이끌고 적을 크게 물리쳐 그들이 황급히 배에 올라 해안을 철수하도록 만들었다. 손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주(郁洲, 현재 장쑤성 관윈현 동북쪽)로 진을 옮겼고, 조정은 유유를 건무장군(建武將軍)이자 하비태수(下邳太守)로 삼아 손은을 토벌하게 했다. 여러 차례 교전 끝에 유유는 손은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남쪽으로 후퇴하게 했다. 유유는 계속해서 추격하여 손은을 다시 패배시켰고, 손은은 다시 해도로 도망쳤다. 이듬해 손은은 결국 소멸되었다.
【기원후 402년】
- 원흥(元興) 원년(402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사마원현(司馬元顯)은 형주자사(荊州刺史) 환현(桓玄)을 토벌하도록 명하고, 유뢰지(劉牢之)를 선봉으로 삼았다. 환현이 군대를 이끌고 건강(建康)에 다다랐을 때, 유유(劉裕)는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유뢰지는 따르지 않고 오히려 환현에게 배신하여 항복하려 했다. 유유는 당시 하무기(何無忌)와 함께 극구 간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유뢰지는 결국 환현에게 항복했다. 환현은 또한 사마원현의 세력을 쉽게 소멸시키고 조정의 정권을 장악했다.
- 이후 환현은 유뢰지의 군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를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좌천시켰다. 유뢰지는 광릉(廣陵, 현재 장쑤성 양저우시)을 점거하고 환현에게 반기를 들려 했으나, 유유는 민심이 이미 떠나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아 유뢰지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결국 유뢰지는 부하들의 지지를 잃고 자살했다. 유경선은 후진(後秦)으로 도망쳤다가 남연(南燕)으로 갔다.
- 환수(桓脩)는 이후 유유를 중병참군(中兵參軍)으로 삼았으며, 같은 해 손은(孫恩)의 잔당을 이끌던 노순(盧循)과 서도복(徐道覆)을 토벌하는 데 참여했다. 당시 환현은 여러 북부군의 옛 장수들을 주살했지만, 유유는 여전히 병사를 이끌고 노순의 무리를 토벌했고, 팽성내사(彭城內史)를 겸임하게 되었다.
【기원후 403년】
- 환현의 사촌 환겸(桓謙)이 환현이 제위를 받아야 하느냐고 유유의 의견을 물었을 때, 유유는 환씨 가문에 충성하는 척하며 환현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했다. 결국 403년 겨울, 환현은 진나라의 안제(晉安帝)로부터 양위를 받아 스스로 황제가 되었고, 국호를 초(楚)로 바꾸었다. 유유는 처음에는 충성을 가장하며 환현의 신임을 얻었고, 환현은 그의 능력을 믿어 더 큰 권한을 주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 유황후(劉皇后)는 유유를 믿을 수 없으니 죽여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기원후 404년】
- 환현이 제위를 찬탈한 이듬해(404년)에 유유는 환수를 따라 입궐하여 건강으로 돌아왔는데, 환현은 그를 매우 아껴 그를 맞이할 때마다 매우 공손했으며, 후한 상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 환현의 황후 유씨(劉氏)는 환현에게 유유를 제거하라고 권했지만, 환현은 여전히 유유의 도움으로 중원(中原)을 공략하려 했기에 해를 가하는 것을 거부했다.
- 유뢰지가 실패했을 무렵 유유는 이미 하무기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환현이 신하의 충절을 지킨다면 그대와 함께 그를 보좌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대와 함께 그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유유가 입궐 후 경구(京口)로 돌아와서 하무기, 유의(劉毅), 맹창(孟昶), 제갈장민(諸葛長民), 왕예(王叡) 등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환현을 토벌할 것을 모의했다.
- 유의(劉毅), 유유의 동생 유도규(劉道規), 맹상(孟昶)은 청주(青州)의 자사이자 환현의 사촌인 환홍(桓弘)을 기습하여 죽이고, 당시 청주의 중심지였던 광릉(廣陵, 지금의 장쑤성 양저우)을 장악한다.
- 제갈장민(諸葛長民)은 예주(豫州, 현재 안후이 중부)의 자사 조규(刁逵)를 기습하여 죽이고, 력양(歷陽, 현재 안후이 차오후)을 점령한다.
- 왕원덕(王元德), 신호흥(辛扈興), 동후지(董厚之)는 건강(建康)에서 봉기하여 환현을 직접 공격한다.
- 유유와 하무기, 다른 공모자들은 환현의 사촌이자 당시 서주(徐州) 및 연주(兗州)의 자사였던 안성왕 환수(桓脩)를 기습하여 죽이고, 징커우를 장악한다.
- 원흥 3년 2월 을묘일(404년 3월 24일), 유유는 사냥을 핑계로 나가 병사를 모집하여 백여 명을 얻었다. 다음 날(3월 25일) 아침에 거병했는데, 하무기는 환수를 죽였다. 그때 환수의 사마였던 조홍(刁弘)이 병사들을 이끌고 왔고, 유유는 거짓으로 강주자사(江州刺史) 곽창지(郭昶之)가 이미 심양(尋陽, 현재 장시성 주장시)에서 진안제(晉安帝)를 다시 모셨고, 환현은 이미 처형되었으며, 자신은 비밀 조칙을 받들어 환씨 반역도를 주벌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조홍은 이를 믿었고, 유유는 곧 조홍을 죽이고 경구를 장악했다. 동시에 맹창 등도 광릉을 성공적으로 통제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경구로 와서 유유와 합류했다. 그러나 제갈장민의 계획은 누설되었고, 건강에서의 공모자들의 계획도 발각되었다. 모두 체포되었으며, 건강에서의 공모자들은 처형되었다(제갈장민은 처형 직전 구출되었다). 유유는 모두에게 맹주로 추대되었고, 서주(徐州)의 일을 총괄하는 도독(都督)이 되었다. 다음 날(3월 26일) 병사를 일으켜 건강을 공격했다.
- 환현은 먼저 오보지(吳甫之)와 황보부(皇甫敷)를 파견하여 유유에게 저항하게 했다. 유유는 먼저 강승(江乘, 현재 장쑤성 구룽 북쪽)에서 오보지를 죽였고, 강승 남쪽의 라락교(羅落橋)에서는 힘껏 싸워 황보부까지 죽이고 계속 진격했다.
- 3월 기미일(3월 28일), 유유는 복주산(覆舟山)을 공격했다. 그는 약한 병사들을 산에 오르게 하여 깃발을 들고 여러 길로 다니게 함으로써 사방에 병사들이 많아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만들었다. 또한 환현의 수비병 대부분이 북부군 출신이라 유유에 대한 투지가 없었다. 유유는 이에 여러 군대와 함께 공격하여 화공으로 환현의 수비군을 쉽게 격파했고, 환현은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쳤다.
- 유유는 3월 임술일(3월 31일)에 왕밀(王謐) 등의 추천으로 사지절(使持節), 도독양연예청기유병팔주제군사(都督揚兗豫青冀幽并八州諸軍事), 진군장군(鎮軍將軍),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 유유는 무릉왕(武陵王) 사마준(司馬遵)을 받들어 백관을 총괄하는 일을 맡게 했다.
- 유유는 건강에 입성한 뒤, 진(晉) 왕조의 복원을 선포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안제(安帝)와 그의 동생 사마덕문(司馬德文)은 여전히 환현의 손아귀에 있었으나, 유유는 상징적으로라도 진나라가 재건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행정 업무를 유목지에게 맡기고, 부패 관리들과 환현을 지지했던 인물들을 엄하게 처벌하여 빠르게 정부를 정비했다. (다만 예외로, 과거 유유가 가난하고 도박 빚에 쪼들릴 때 그를 도와준 환현의 재상 왕밀(王謐)은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중용하였다.)
- 하지만 혹시라도 안제를 되찾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유유는 안제의 고조부 사마연(晉元帝)의 손자인 오릉왕(武陵王) 사마준(司馬遵)을 ‘섭황제(임시 황제)’로 삼았다.
- 유유(劉裕)는 유의(劉毅), 하무기(何無忌), 유도규(劉道規)를 서쪽으로 보내 환현(桓玄)을 공격하게 했다. 이들은 환현의 장수 하담지(何澹之)를 신속히 격파하고 강주(江州, 지금의 장시성과 푸젠성 일대)를 점령한 뒤, 계속해서 강릉(江陵)을 향해 전진했다. 그들은 현재 후베이성 어저우(鄂州)에 해당하는 쟁영주(崢嶸洲)에서 병력 규모가 훨씬 큰 환현의 군대와 마주쳤지만,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를 대파하였다.
- 환현은 안제(安帝)를 데리고 강릉으로 도망쳤고, 그의 매형 은중문(殷仲文)은 그를 배신하고, 안제의 황후 왕신애(王神愛)와 목제(穆帝)의 황후 하태후(何太后)를 건강(建康)으로 데려갔다.
- 환현은 강릉에 도착한 후 처음에는 양주(梁州, 현재 산시 남부와 후베이 북서부)의 자사인 친척 환희(桓希)에게로 도피할 준비를 하려 했으나, 군대는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붕괴되었다. 부하 모수지(毛脩之)의 설득으로, 그의 삼촌이자 익주(益州, 현재 쓰촨과 충칭 일대)의 자사인 모거(毛璩)를 의지해 익주로 도망가기로 결정했지만, 도중에 모거의 부하 모우지(毛佑之)와 비첨(費恬)에게 가로막혀 공격을 받았고, 장수 풍천(馮遷)에게 참수당했다.
- 이후 관리 왕등지(王騰之)와 왕강산(王康產)은 강릉에서 안제의 복위를 선포하였다. 하지만 유의의 군대가 아직 강릉에 도착하기 전, 환겸(桓謙)과 환현의 조카 환진(桓振)이 기습 공격을 감행해 강릉을 탈환하고 안제와 사마덕문(司馬德文)을 다시 사로잡았다. 그러나 환진과 환겸은 초(楚)의 부흥을 다시 선언하지는 않았고, 안제를 인질로 삼아 자신들의 진(晉) 체제 내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그들은 초반에 하무기의 군을 격파했으나, 405년에 이르러 환씨 가문의 다른 인물들(양주의 자사 환위(桓蔚)와 환희 포함)이 모두 패배하면서, 강릉은 유의의 군에게 함락되었다.
【기원후 405년】
- 환겸과 환진은 도주했고, 하무기는 안제를 호위하여 건강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유유는 실질적인 섭정 역할을 하게 되었으나, 당시 진나라 조정은 아직까지는 여러 유력 인물들의 연합 정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 405년 봄, 모거(毛璩)의 병사들은, 모거가 그들을 환현과 환진(桓振)을 상대로 장거리 원정에 보내자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군사 교좌(譙縱)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모거를 죽였으며, 성도(成都, 현재 쓰촨성 청두)를 점령하였다. 교좌는 그곳에 독립된 ‘후촉(後蜀)’ 정권을 세웠다.
- 같은 해인 405년, 노순(盧循)은 404년에 환현과 관련된 전쟁 도중 남쪽으로 진군하여 번우(番禺, 현재 광둥성 광저우)를 점령한 인물인데, 이후 조정에 조공을 바치며 평화를 제의했다. 유유는 당시 노순을 물리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광주(廣州, 현재의 광둥성과 광시)의 자사로 임명하고, 그의 부하이자 처남인 서도복(徐道覆)을 시흥군왕(始興郡王, 대략 현재 광둥성 사오관시)으로 임명했다.
【기원후 406년】
- 의희 2년(406년), 유유는 공적을 인정받아 예장군공(豫章郡公)에 봉해졌다. 의희 4년 정월(408년)에 작년 말 양주자사(揚州刺史)이자 녹상서사(錄尚書事)였던 왕밀이 사망하자, 유유는 유목지(劉穆之)의 권유를 듣고 조정에 들어가 후임자 선정에 대해 논의했다. 결국 시중(侍中), 거기장군(車騎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양주자사, 녹상서사, 서주(徐州)와 연주(兗州)의 자사(刺史)로 임명되어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기원후 407년】
- 407년, 유유는 친구 유경선(劉敬宣)에게 교좌가 세운 후촉 정권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며, 대규모 작전을 개시하였다.
【기원후 408년】
- 408년, 유경선의 군은 후촉의 장수 교도복(譙道福)에게 막혀 진격이 정체되었고, 식량이 바닥나자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후 409년】
- 409년, 남연(南燕)의 황제 모용초(慕容超)는 진(晉)나라 북부 변경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원정을 시작하였다. 그의 목적은 남녀를 사로잡아 궁중 음악가로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유유(劉裕)는 남연을 멸망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을 개시하였고, 대부분의 조정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맹창(孟昶)은 유유를 지지하였다.
- 유유는 409년 말 임구(臨朐) 전투에서 남연의 주력군을 신속히 격파하고, 곧바로 남연의 수도 광고(廣固, 현재 산둥성 칭저우)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광고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유유가 광고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서도복(徐道覆)은 주저하던 노순(盧循)을 설득하여 북진하게 만들었다. 노순은 유유와의 충돌을 두려워했지만, 서도복은 유유가 언젠가는 먼저 공격할 것이라며, 지금 유유가 광고를 포위 중인 틈을 타 함께 나머지 영토를 점령하자고 설득했다.
【기원후 410년】
- 유유(劉裕)는 남연(南燕)을 평정한 당시에 이미 후진(後秦)을 공략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노순(盧循)의 난이 터져 그로 하여금 건강(建康)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뿐이다.
- 410년 봄, 유유는 마침내 광고를 함락시키고 남연을 멸망시켰다. 그는 후진(後秦)을 공격할 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곧 노순과 서도복이 북상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급히 건강(建康)으로 귀환하였다. 한편, 하무기(何無忌)는 함대와 함께 서도복을 공격하기 위해 예장(豫章, 현재 장시성 난창)으로 진군했으나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유의(劉毅)가 지휘한 제2차 군대 역시 서도복과 노순에게 패했다.
- 하지만 유의의 병사 중 포로가 된 자들이 유유가 건강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정보를 노순에게 전달하였고, 노순은 위협을 느껴 퇴각을 고려했지만, 서도복의 강한 주장에 따라 그대로 건강으로 진격하였다. 일부 조정 신하들은 황제 안제(安帝)를 장강(長江) 이남으로 피신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유유는 이를 거부하고 건강에서 직접 수비하기로 결정하였다.
- 건강에 도착한 노순은 서도복이 제안한 위험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있는 전략들을 거부하고, 대신 유유의 군이 스스로 무너질 것을 기대하며 심리전에 의존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식량이 바닥나자 노순은 순양(尋陽, 현재 장시성 구강 시)으로 후퇴했다. 유유는 그를 추격하는 한편, 장수 손처(孫處)와 심전자(沈田子)에게 해군을 이끌고 번우(番禺, 현재 광둥성 광저우)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유유는 자신이 노순을 반드시 무찌를 수 있으며, 그가 근거지로 퇴각하는 길마저 끊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한편, 서도복은 형주(荊州, 현재 후베이와 후난)로 공격을 감행했으나, 유도규(劉道規)에게 패배하고 다시 노순과 합류하였다. 그들은 유유와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기원후 411년】
- 411년 초, 대뢰(大雷, 현재 안후이성 안칭)에서 유유와 교전하였고, 유유는 불을 이용해 그들의 함대를 전멸시켰다. 노순과 서도복은 번우로 도주했지만, 그곳은 이미 손처가 점령한 상태였다.
- 노순은 번우를 포위했으나, 그 시점에서 다른 군현을 정복하던 심전자가 번우로 돌아와 손처와 함께 노순을 격파하였다. 노순은 교주(交州, 현재 베트남 북부)로 도주하였으나, 그곳의 자사 두혜도(杜慧度)에게 패배하였다. 결국 노순은 아내와 첩을 죽이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 유유(劉裕)는 의희(義熙) 7년(411년)에 개선하여 건강(建康)으로 돌아왔고, 태위(太尉)와 중서감(中書監) 직위를 받았다.
- 노순(盧循)을 무찌른 후 나라가 안정되자, 유유(劉裕)는 다시 외부로 눈을 돌렸다. 그는 군사적 승리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더욱 높이고, 마침내 황제로 즉위할 명분을 쌓고자 했다. 동시에, 자신이 권력을 잡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 연합 세력 내부의 인물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기원후 412년】
- 412년, 그는 당시 형주(荊州)의 자사였던 유의(劉毅)가 그의 사촌 유번(劉藩, 연주자사)과 함께 자신에게 반기를 들려 한다고 의심하였다. 이에 유유는 유번과 그의 친구 사혼(謝混)을 체포하고, 유의에게 기습 공격을 가해 손쉽게 그를 격파하였다. 유의는 도주 중 사망했다.
【기원후 413년】
- 유유는 자신이 유의를 공격하는 사이에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제갈장민(諸葛長民)을 기습적으로 살해하였다.
- 한편, 412년 말 유유는 장수 주령석(朱齡石)에게 교종(譙縱)이 세운 후촉(西蜀)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유는 비밀리에 단거리 노선인 부강(涪江)이 아니라 장거리 노선인 민강(岷江)을 따라 성도(成都)로 진격하라고 지시했다. 주령석은 교종의 주력 장수 교도복(譙道福)과 교종 자신을 기습하는 데 성공했고, 413년 성도를 점령하여 후촉을 진나라에 재통합시켰다.
【기원후 414년】
- 414년, 유유는 유의의 후임으로 형주의 자사가 된 사마휴지(司馬休之)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마휴지는 황실 출신으로, 그의 아들 사마문사(司馬文思)는 교왕(譙王)으로 봉해졌으며 많은 모험가들을 주변에 모으고 있었다. 414년 봄, 유유는 사마문사의 동조자들을 체포해 처형하고, 사마문사를 사마휴지에게 인도하며 직접 처형하라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사마휴지는 단지 작위를 박탈해 달라는 요청만 하였다.
【기원후 415년】
- 415년 봄, 유유는 사마휴지의 또 다른 아들 사마문보(司馬文寶)와 조카 사마문조(司馬文祖)를 체포하여 자결하게 한 후, 사마휴지에게 공격을 개시했다. 사마휴지는 옹주(雍州)의 자사 노종지(魯宗之)와 함께 반격에 나서, 초기에는 유유의 사위 서규지(徐逵之)를 격파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유유가 직접 군을 이끌고 도착한 후 전세가 역전되었고, 유유는 강릉(江陵)을 점령하였다. 사마휴지와 노종지는 결국 후진(後秦)으로 도망쳤고, 이로써 유유에게 실질적인 국내 반대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기원후 416년】
- 416년 정월에는 평북장군(平北將軍), 연주자사, 도독남진주제군사(都督南秦州諸軍事)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그는 이미 서주, 남서, 예, 남예, 연, 남연, 청, 기, 유, 변, 사, 영, 형, 강, 상, 옹, 양, 익, 영, 교, 광, 남진 등 총 22개 주의 도독을 맡게 되었다.
- 416년,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이 사망하자 유유는 이를 기회로 보고 대대적인 후진 원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수도 건강을 참모 유목지(劉穆之)에게 맡기고, 자신의 장남 유의부(劉義符)를 명목상의 총책임자로 남겼다. 416년 겨울, 유유의 장수 담도지(檀道濟)가 중요한 도시 낙양(洛陽)을 점령하였다. 이에 유유는 안제에게 자신을 송공(宋公)으로 책봉하고, 구석(九錫)을 내리게 하여 사실상 황제로의 즉위를 준비하였지만, 형식상으로는 이를 사양하였다.
【기원후 417년】
- 417년 1월, 유유는 팽성에서 수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황하(黃河)로 진입했다. 유유는 계속해서 동관(潼關)까지 진군했고, 왕진악(王鎮惡)에게 병사를 이끌고 위수(渭水)를 경유하여 후진의 수도 장안(長安, 현재 산시성 시안시)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왕진악은 위교(渭橋)에서 요비(姚丕)를 크게 격파했다. 요홍(姚泓)이 이끄는 군대 또한 요비의 패잔병들에게 밟히면서 혼란에 빠졌고, 결국 요홍은 8월에 항복하여 후진은 멸망했다. 유유는 다음 달 장안에 도착하여 장병들에게 큰 상을 내리고, 항복한 후진 종실 요박(姚璞)과 요찬(姚贊) 및 100여 명의 종족을 주살했다.
- 같은 해 11월, 건강을 지키던 유목지(劉穆之)가 사망했다. 당시 유유는 아직 장안을 기지로 삼아 서북의 북량(北涼) 등 국가를 공격할 생각이었지만, 장수들 대부분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유유가 평소 의지했던 유목지의 죽음은 건강이라는 근본적인 근거지가 공허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고 느끼게 했고, 결국 그는 동쪽으로 회군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유유는 당시 겨우 11살이던 차남 유의진(劉義真)에게 장안을 진수하도록 맡기고, 왕진악, 왕수(王脩), 심전자(沈田子), 모덕조(毛德祖) 등의 장수들을 남겨 그를 돕게 했다. 현지 백성들은 유유가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마음이 바뀌기를 바랐지만, 유유는 이미 떠날 결심이 확고하여 그해 12월에 출발했다.
【기원후 418년】
- 유유가 떠난 다음 해, 장수들 간의 내분이 일어났다. 심전자(沈田子)가 왕진악(王鎮惡)을 죽였고, 왕수(王脩)가 심전자를 죽였다. 그리고 유의진(劉義真)은 장수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사람을 시켜 왕수를 살해했고, 이로 인해 관중(關中)은 대혼란에 빠졌다. 하국(夏國)은 이 틈을 타 관중을 공격했고, 유유는 어쩔 수 없이 유의진을 불러들이고 주령석(朱齡石) 등을 파견하여 장안을 대신 진수하도록 했다. 심지어 관중을 지킬 수 없다면 포기해도 좋다고 지시했다. 결국 진(晉)군은 장안에서 철수했고, 관중 지역은 하국에게 점령당했다.
- 의희(義熙) 14년(418년), 유유(劉裕)는 상국(相國), 총백계(總百揆), 양주목(揚州牧)의 관직을 수락하고, 10개 군(郡)으로 “송국(宋國)”을 세워 송공(宋公)으로 봉해졌다. 아홉 가지 특전(九錫)의 특별한 대우도 받았다. 같은 해, 유유는 중서시랑(中書侍郎) 왕소지(王韶之)에게 진안제(晉安帝)의 좌우 시종들과 비밀리에 독주(毒酒)로 안제를 독살할 것을 명령했다. 왕소지는 이에 사마덕문(司馬德文)이 병으로 궁궐을 비운 틈을 타 안제를 목 졸라 죽였다. 당시 유유는 예언서에 “창명(昌明, 진효무제 晉孝武帝) 이후에 두 황제가 더 있다”는 구절을 믿었기 때문에, 유조(遺詔)에 따른다며 사마덕문을 황제로 옹립했고, 그가 바로 진공제(晉恭帝)이다.
【기원후 419년】
- 원희(元熙) 원년(419년), 유유는 송왕(宋王)으로 진봉(進封)되었고, 다시 10개 군을 추가하여 송국에 편입시키면서 송국의 영토는 20개 군에 달하게 되었다. 연말에는 황제에 버금가는 12류면(十二旒冕), 천자정기(天子旌旗) 등 일련의 특별한 예우를 더 받았다.
【기원후 420년】
- 원희 2년(420년), 유유는 입조하여 정치를 도왔다. 부량(傅亮)은 유유가 진공제로부터 제위(帝位)를 선양받기를 원하지만 직접 말하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대신 공제에게 암시를 주었다. 공제는 6월에 유유에게 제위를 선양했고, 동진은 멸망했다. 유유는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송(宋)”으로, 연호를 영초(永初)로 바꾸었다.
- 유송(劉宋)의 무제는 전 진(晉)나라의 황제였던 사마덕문(공제)을 영릉왕(零陵王)에 봉했다. 또한, 자신의 계모인 소태비(蕭太妃)를 황태후로 존숭하였다. 형 유도련(劉道憐), 아들들, 조카들을 모두 왕(王)으로 봉작하며 제후 체제를 강화했다.
- 420년 가을, 무제는 이미 408년에 사망한 아내 장애친(臧愛親)을 황후로 추존하고, 장남 유의부(劉義符)를 태자(太子)* 삼았다. 또한 자신이 직접 나쁜 평판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칠 수 있는지를 경험한 바 있었기에, 그는 과거 평판이 나빴던 자들일지라도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여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하지만 무제는 여전히 사마덕문(공제)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사마덕문의 시종이었던 장위(張偉)에게 독이 든 술 한 병을 보내어 사마덕문을 독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장위는 명령을 수행하기를 거부하고, 그 술을 자신이 마시고 자결하였다.
- 한편, 무제는 사마덕문에게 남자 자손이 생길 가능성조차 없애기 위해, 그의 아내 저씨(褚氏)의 오빠들인 저수지(褚秀之)와 저담지(褚淡之)**에게, 추씨나 사마덕문의 후궁들이 아들을 낳을 경우 모두 독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마덕문은 목숨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내 저씨와 함께 집 안에 머물며 직접 식사를 준비했고, 식자재도 저씨가 직접 비용을 지불했다. 무제가 보낸 자객들은 기회가 없어 한동안 그를 죽이지 못했다.
【기원후 421년】
- 하지만 421년 가을, 무제는 저담지와 그의 형 저숙도(褚叔度)를 여동생인 저씨를 방문하라는 명목으로 보냈고, 저씨가 다른 집으로 나가 형제를 맞이하는 사이, 유유가 보낸 병사들이 사마덕문의 집에 침입했다. 그들은 사마덕문에게 독약을 마시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불교에서는 자살을 금지하며, 자살한 자는 다음 생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자객들은 이불로 그의 머리를 덮고 질식시켜 죽였다.
- 이러한 유유의 행동은 그의 일생에서 오점(汙點)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행위는 전 왕조에서 물러난 군주가 좋게 끝나지 못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신(新) 왕조 왕망(王莽)이 서한(西漢) 유자영(孺子嬰)에게, 조위(曹魏) 문제(文帝) 조비(曹丕)가 동한(東漢) 헌제(獻帝) 유협(劉協)에게, 서진(西晉)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조위 원제(元帝) 조환(曹奐)에게 해를 가하지 않은 것과 대조된다. 이로써 남조(南朝)의 마지막 군주들은 진후주(陳後主) 진숙보(陳叔寶)가 찬탈이 아닌 망국을 겪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 왕조의 군주에게 살해당했다.
【기원후 422년】
- 422년, 신하 사혜(謝晦)가 황태자 유의부가 지혜 없는 자들과 어울려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경고하자, 무제는 둘째 아들 유의진(劉義真)을 대신 황태자로 삼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사혜가 유의진을 직접 만나본 후, 그는 유의진에 대해 더 부정적인 인상을 받고 무제에게 이를 보고했다. 이에 유유는 유의진을 황태자로 삼으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 영초(永初) 3년(422년), 유유는 병을 얻었다. 5월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사공(司空) 서선지(徐羨之), 상서복야(尚書僕射) 부량(傅亮), 영군장군(領軍將軍) 사회(謝晦), 호군장군(護軍將軍) 단도제(檀道濟) 네 사람을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삼아 태자 유의부(劉義符)를 보필하게 했다. 유유는 5월 계해일(6월 26일)에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의부가 즉위하여 소제(少帝)가 되었다.
- 유유는 황제에 즉위한 후, 사망한 아내 장애친(臧愛親)의 신주(神牌)를 태묘(太廟)에 모셔 천자 칠묘(天子七廟) 중 하나로 삼았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태묘 주인이 되었다. 유유의 이러한 행위는 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대 사람들에게 조롱받았다. 왕명성(王鳴盛)은 이것이 유유가 죽은 후 태조(太祖) 묘호를 얻으려는 의도였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유유는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의 최종 묘호는 고조(高祖)였다. 태조 묘호는 그의 셋째 아들 유의륭(劉義隆).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였으며, 초녕릉(初寧陵, 현재 장쑤성 난징시 자금산)에 안장되었다.
【가족 관계】
- 선조(先祖) : 유교(劉交), 한조(漢朝) 태상황 유태공의 4자, 한고조 유방(劉邦)의 동생, 초왕(楚王)에 봉해짐, 시호는 초원왕(楚元王), 한문제(漢文帝) 원년에 죽음
- 부모(父母)
- 부(父) : 송효제(宋孝帝) 유교(劉翹), 동진(東晉) 팽성군(彭城郡) 공조(功曹)
- 모(母) : 효목황후(孝穆皇后) 조안종(趙安宗)
- 효의황후(孝懿皇后) 소문수(萧文寿) (계모)
- 형제(兄弟)
- 유도린(劉道鄰) : 유유(劉裕)의 둘째 동생,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짐, 관직은 태위(太尉)에 이름
- 유도규(劉道規) : 유유의 셋째 동생, 진(晉) 남군공(南郡公), 관직은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유가 진(晉)을 찬탈하기 전에 죽음, 추봉으로 임천왕(臨川王)이 됨
- 처첩(妻妾)
- 처자(妻子) : 무경황후(武敬皇后) 장애친(臧愛親), 유흥제(劉興弟)를 낳음, 결발지처(結髮之妻), 후에 예장공부인(豫章公夫人), 무경황후로 추증됨
- 첩실(妾室)
- 부인 장씨(张氏) : 유의부(劉義符)와 유혜원(劉惠媛)을 낳음, 후에 황태후, 영양왕태비(營陽王太妃)가 됨
- 손수화(孫修華) : 유의진(劉義真)을 낳음
- 장황태후(章皇太后) 호도안(胡道安) : 유의륭(劉義隆)을 낳음, 후에 첩어(婕妤), 황태후로 추증됨
- 왕수용(王修容) : 유의강(劉義康)을 낳음
- 원미인(袁美人) : 유의공(劉義恭)을 낳음
- 여미인(呂美人) : 유의계(劉義季)을 낳음
- 손미인(孫美人) : 유의선(劉義宣)을 낳음
- 부수의(符修仪) : 광덕공주(广德公主)를 낳음
- 요씨(姚氏) : 요흥(姚兴)의 조카딸
- 자녀(子女)
- 자(子)
- 유의부(劉義符) : 송소제(宋少帝), 진(晉) 시대에 유유의 세자(世子)였고, 유유가 제위를 찬탈한 후 황태자가 됨, 유유 사망 후 즉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정(輔政)하던 서선지(徐羨之) 등에 의해 폐위되어 영양왕(營陽王)이 되고, 이후 살해됨
- 유의진(劉義真) : 진(晉)에서 계양공(桂阳公)에 봉해짐, 송(宋) 시대에 노릉왕(庐陵王)에 봉해짐, 관직은 사도(司徒)에 이름, 소제 시대에 서선지 등에 의해 서인(庶人)으로 폐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됨, 후에 복위됨
- 유의륭(劉義隆) : 송문제(宋文帝), 진(晉) 시대에 팽성공(彭城公)에 봉해짐, 송(宋) 시대에 의도왕(宜都王)에 봉해짐, 관직은 진서장군(鎮西將軍), 형주자사(荊州刺史)에 이름, 서선지의 추천으로 황제가 됨
- 유의강(劉義康) : 팽성왕(彭城王)에 봉해짐, 관직은 사도(司徒), 녹상서사(錄尚書事), 영양주자사(領揚州刺史)에 이르러 조정의 정사를 맡음, 그러나 후에 강주(江州)로 좌천되고, 범엽(范曄)의 모반 사건으로 서인(庶人)으로 폐위됨, 후에 호탄세(胡誕世) 등이 유의강을 받들어 모반하려 한 사건으로 송문제에게 살해됨
- 유의공(劉義恭) : 강하왕(江夏王)에 봉해짐, 관직은 태재(太宰)에 이름, 송전폐제(宋前廢帝) 시대에 유원경(柳元景)과 밀모하여 폐제를 계획하다가 전폐제에게 사지가 절단되어 살해됨
- 유의선(劉義宣) : 남군왕(南郡王)에 봉해짐, 유소(劉劭)의 부친 살해 및 자립 사건을 토평하는 데 참여함, 관직은 중서감(中書監)에 이름, 후에 형상이주자사(荊湘二州刺史)로 임명되었으나 병사를 일으켜 모반하다 사건이 발각되어 체포되고 옥중에서 자살함
- 유의계(劉義季) : 형양왕(衡陽王)에 봉해짐, 관직은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에 이름, 유의강이 폐위된 후 매일 술에 취해 지냄, 서주자사(徐州刺史) 시절에는 북위(北魏)가 남침해도 술만 마심
- 여(女):
- 유흥제(劉興弟) : 유유의 장녀, 회계장공주(會稽長公主), 수양공주(壽陽公主)에 봉해짐, 서규지(徐逵之)에게 시집감
- 유영남(劉榮男) : 오흥장공주(吳興長公主), 왕언(王偃)에게 시집감
- 광덕공주(广德公主)
- 선성공주(宣城公主) : 주교(周嶠)에게 시집감
- 신안공주(新安公主) : 왕경심(王景深)에게 시집감
- 오군공주(吳郡公主) : 시안공주(始安公主) 사망 후 저담지(褚湛之)의 계실로 시집감
- 부양공주(富陽公主) : 서교지(徐喬之)에게 시집감
- 시안공주(始安公主) : 저담지(褚湛之)에게 시집감
- 유혜원(劉惠媛) : 의흥장공주(義興長公主)
- 유흔남(劉欣男) : 유유의 어린 딸, 예장장공주(豫章長公主), 먼저 서교(徐喬)에게 시집갔다가 후에 하우(何瑀)에게 시집감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