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송 찬탈자 유소(劉劭, AD. 424~453년) : 유송의 비정통 황제(AD. 453년)
- 원흉 유소(元兇 劉劭)
- 통치 기간 : 453년 3월 16일 ~ 453년 5월 27일 (72일)
- 전임 : 송 문제 유의륭(宋文帝 劉義隆)
- 후임 : 송 효무제 유준(宋孝武帝 劉駿)
- 출생 : 424년
- 사망 : 453년 5월 27일 (향년 28~29세)
- 연호 : 태초(太初)
- 시호 : 없음(無)
- 묘호 : 없음(無)
- 유소는 부친 유의륭(劉義隆)을 시해하고 즉위했으나, 정통 황제로 인정받지 못해 시호와 묘호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기원후 424년】
- 자(字)는 휴원(休遠)이며, 제3대 황제인 유의륭과 유의륭의 황후인 원제규(袁齊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 팽성 수여리(彭城 綏輿里, 현재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 퉁산구) 출신이다.
- 원가(元嘉) 원년(424년), 유소(劉劭)가 태어났다. 당시 유의륭(劉義隆)은 부친(송 무제 유유)의 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상복 기간이 끝난 후, 원가 3년 윤정월 병술일(426년 2월 28일)에 이르러서야 장남의 탄생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 유소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 원 황후는 아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말한다:
“이 아이는 외모가 평범하지 않으니, 언젠가 나라와 집안을 망칠 것이다. 내가 직접 키우지 않겠다.”
그녀는 아기를 죽이려 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유의륭이 급히 침소로 달려와 유소를 구했다고 합한다. [현대 사학자 보양(柏楊)은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으며, 후에 유소가 저지른 죄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후대의 조작된 일화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기원후 429년】
- 원가 6년 3월 정사일(429년 5월 14일), 유소는 황태자로 책립되어 영복성(永福省)에 거처하였다.
【기원후 435년】
- 원가 12년(435년)에는 동궁(東宮)으로 거처를 옮겼고, 은순(殷淳)의 딸 은씨(殷氏)를 태자비로 맞이하였다.
- 유소는 역사서 읽기를 좋아했고, 특히 군사 관련 내용을 즐겨 읽었다. 궁중의 일을 직접 살피거나 신하들을 접견하는 일에 있어서도, 유소가 하고자 하면 송 문제(유의륭)는 대부분 그 뜻을 따랐다. 문제는 동궁을 보호하기 위해 동궁의 군사력을 궁궐 수비대(우림위, 羽林衞)와 동등하게 유지하도록 하였다.
【기원후 438년】
- 438년에는 사망한 신하 음순(殷淳)의 딸 음유영(殷玉英)과 혼인하여 태자비로 맞이했습니다.
【기원후 440년】
- 440년 즈음, 유소는 성인식을 치르며 성인 복식을 입었다. 당시 그는 용모가 준수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궁술(활쏘기)과 기마술에도 능한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그는 사람들과 교류를 즐겼고, 황제인 부친은 유소가 원하는 것은 모두 허락해 주었다. 이 시기에 유소는 동궁의 친위 병력을 대폭 강화하기 시작한다.
【모후(母后)와 계비 간 갈등】
- 유소의 어머니 원 황후는 초기에는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반 황후(潘氏)에게 총애를 빼앗기기 시작한다.
- 원 황후는 황제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 반 황후를 시켜 자신의 친척보다 6~10배 많은 금액을 요구하게 했고, 황제가 이를 바로 허락하자 깊은 원망을 품었다. 결국 그녀는 질투로 병을 얻고, 끝내 황제와 화해하지 못한 채 440년에 사망한다. 그 뒤로 유소는 반 황후와 그녀의 아들 유준(劉駿, 시흥왕)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됩니다.
- 이에 유준은 오히려 형 유소에게 알랑거리고 친분을 쌓아, 형제 사이가 겉보기에는 매우 가까운 사이로 알려지게 된다.
【기원후 450년】
- 원가 27년(450년), 송 문제가 북벌을 감행하였다. 이에 유소, 심경지(沈慶之), 소사화(蕭思話) 등은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북위(北魏) 군은 장강 북안의 과보(瓜步)까지 진군하였고, 건강(建康)이 크게 흔들렸다.
- 이때 유소는 석두성(石頭城)으로 진을 나가 방어를 맡고 수군을 총지휘하였다. 북위에서는 혼인을 요청하며 사신을 파견하였고, 유소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혼인을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벌을 강력히 주장했던 강담(江湛)은 이민족은 믿을 수 없다며 화친에 반대하였다.
- 이에 유소는 격노하며, 강담을 호통치고, 신하들이 흩어질 때 수행자들에게 강담을 밀치라 명령하였고, 거의 쓰러뜨릴 뻔하였다. 유소는 또 문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벌은 참담하게 실패했고, 수많은 주(州)를 잃었습니다. 오직 강담을 목 베는 것만이 천하에 사죄하는 길입니다.” - 그러나 송 문제는 북벌은 자신의 결정이었다며 강담을 문책하지 않았다.
- 이후 유소는 연회를 열 때마다 강담을 초대하지 않았고, 자주 문제에게 강담이 간신이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고하였다.
【기원후 450년】 북위(北魏) 침공과 의견 충돌
- 450년, 황제는 북위로부터 황하 이남의 땅을 되찾기 위해 북벌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유소와 장군 심경지(沈慶之), 소사화(蕭思話) 등은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황제는 이를 무시하고 북벌을 강행했다. 전쟁은 실패했고, 북위 황제 태무제(太武帝)는 남하하여 수도 건강(建康) 인근까지 도달한다.
- 이때 북위는 혼인 동맹을 제안한다. 유송 황제의 딸을 북위 황제의 손자에게, 북위의 딸을 유송 황자의 한 명에게 시집보내는 방식이었다. 유소는 이를 찬성했다. 이유는 당시 자신의 형제들인 유준(무릉왕), 유삭(南平王), 숙부 유의공(劉義恭, 강하왕) 등이 북위에 포위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대신 강담(江湛)이 이 제안을 강력히 반대했다. 이에 유소는 격분하여 회의 후 강담을 호위병으로 하여 밀쳐 계단 아래로 굴려 보냈고, 강담이 거의 죽을 뻔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또한 유소는 강담과 허상지(何尚之) 등이 북벌을 지지했다고 주장하며 처형할 것을 황제에게 요청했지만, 황제는 “이 모든 것은 내 뜻이었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 이 사건 이후 유소는 강담, 허상지, 서담지(徐湛之)와 깊은 정치적 원한을 쌓게 된다. 이들은 결국 혼인 동맹도 끝까지 저지시킨다.
【기원후 451년】
- 451년에는 유소가 삼촌 유의강(劉義康, 팽성왕)의 죽음에 관여한다. 유의강은 예전부터 황제를 대신하려는 모의의 중심에 있었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황제는 그를 유배시켰으나, 북위의 침공이 계속되자 혹시나 또 음모가 일어날까 걱정했다. 이에 유소는 동생 유준(무릉왕), 허상지와 함께 유의강을 사형시킬 것을 주장했고, 황제는 자결을 명했으나 유의강이 거부하자 질식사 시킴으로써 죽였다.
【기원후 452년】
- 452년 이전, 유소(劉劭)와 그의 동생 유준(劉駿, 시흥왕)은 무당 엄도육(嚴道育)과 관계를 맺게된다. 그녀의 주술 능력을 자매인 동양공주 유영아(劉英娥)가 매우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문제(文帝)는 아들들에게 매우 엄격한 아버지였고, 유소와 유준의 행동에서 잘못이 있을 때마다 자주 질책하곤 했다. 처음에는, 두 형제는 엄도육에게 자신들의 잘못이 황제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신령에게 빌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문제가 조기에 죽도록 저주를 내리게 하여, 유소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 이 시기쯤 두 형제는 아버지 황제에게 커다란 원한과 증오를 품고 있었으며, 서로 서신을 주고받을 때 문제를 “저 인간”이라 부르고, 숙부 유의공(劉義恭, 당시 재상)은 “아첨꾼”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 하지만 452년, 엄도육의 주술 행위가 외부로 유출된다. 공주 유영아의 하녀였던 왕앵무(王鸚鵡)는 유소, 유준, 엄도육 사이를 오가며 연락책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왕앵무는 예전부터 유영아의 또 다른 하인 진천여(陳天與)와 정사를 나눴으나, 이후 유준의 보좌관 심회원(沈懷遠)의 첩이 된다. 왕앵무는 심회원이 과거 관계를 알게 될까봐 두려워져, 유소에게 진천여를 죽여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같은 사건에 연루된 다른 하인 진경국(陳慶國)이 자신도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져 결국 황제에게 이 사건을 밀고한다. 문제는 왕앵무를 체포했고, 유소와 유준이 엄도육과 주고받은 서신과 주술 인형들을 확보하게 된다. 황제는 엄도육도 체포하려 했으나, 당시 그녀는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두 아들을 처벌하지 않고, 단지 강하게 꾸짖는 데에 그친다
【기원후 453년】
- 송 문제의 만년, 유소는 무당 엄도육(嚴道育)과 교류하며 주술 행위(巫蠱)를 벌인 것이 문제가 되어, 문제는 그를 태자에서 폐위하려 했다.
- 453년 봄, 엄도육은 유준의 보호 하에 경구(京口, 현재의 장쑤성 전장市)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준의 하인 장오(張旿)의 집에 살고 있었고, 곧 유준이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부임하게 되자 엄도육을 건강(建康)으로 데려간다. 이 시점에서 문제는 엄도육이 장오의 집에 있었던 사실을 듣고 가택 수색을 명령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이미 떠난 상태였지만, 그녀가 유준과 함께 건강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는 분노한다. 그는 두 아들이 아직도 주술과 관련되어 있다고 확신하고, 유소를 폐위하고 유준에게 자결을 명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 이 문제를 황제는 서담지(徐湛之), 강담(江湛), 왕승작(王僧綽) 등과 비밀리에 논의했으나, 새 태자를 누구로 정할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강담은 남평왕 유삭(劉鑠)을 추천하고, 서담지는 자신의 사위인 수왕 유탄(劉誕)을 추천했다. 왕승작은 신속한 결단을 촉구했지만, 문제는 유삭과 건평왕 유홍(劉宏) 사이에서 망설였다.
- 하지만 이 비밀스러운 논의가 뜻밖에도 반 황후(潘淑妃)에게 전달되었고, 반 황후는 곧바로 유준에게 알리고, 유준은 다시 유소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결국 유소는 쿠데타를 결심하게 된다.
【부친 살해와 왕위 찬탈(弒父篡位)】
- 원가(元嘉) 30년(453년) 2월, 유준(劉濬)은 형주(荊州)의 자사로 전임되어, 징커우(京口)에서 조정으로 들어가는 길에 엄도육(嚴道育)을 동궁(東宮)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는 그녀를 함께 데리고 형주로 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무렵 누군가 엄도육이 수녀(尼姑)의 모습으로 변장해 자주 유준의 관저를 드나든다는 사실을 고발하였다. 문제(文帝)는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조사를 의뢰한 뒤 두 시녀의 진술을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 문제는 두 아들이 여전히 엄도육과 왕래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충격을 받았고, 이에 유소(劉劭)의 태자 직위를 폐하고, 유준을 사사(赐死)할 결정을 내리려 했다. 그는 왕승탁(王僧綽), 강담(江湛), 서담지(徐湛之)와 상의했으나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또한 문제는 이 결정을 유준의 생모인 반숙비(潘淑妃)에게 누설하였고, 반숙비는 이를 유준에게 알렸다. 유준은 이를 유소에게 보고하자, 유소는 선제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 유소는 밤마다 연회를 열어 장수들을 접대하고, 측근인 장초지(張超之), 진숙아(陳叔兒), 잠숙아(詹叔兒), 임건지(任建之) 등과 함께 계획을 꾸몄다.
- 2월 20일 밤(3월 15일), 두 시녀가 도착할 예정이었고, 유소는 사령을 위조하여 “노수(魯秀)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새벽에 경궁(京闕)을 수비하고 군대를 거느려 들어오라”고 거짓 명령을 내렸다. 그는 장초지를 시켜 2,000여 명의 병사를 모아 준비하게 했으며, 여러 당대 주둔 부대를 소집해 그들에게도 토벌 명분이 있다고 알렸다.
- 그날 밤, 유소는 전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소빈(蕭斌), 태자의 좌위율(左衛率) 원숙(袁淑), 태자의 중사(中舍人) 은중소(殷仲素), 좌급노장군(左級弩將軍) 왕정견(王正見) 등을 불러들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주상(主上)이 간언을 믿어 나를 폐하려 하고 있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내일 반드시 큰 일을 행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힘을 합쳐 도와주십시오.” - 소빈과 원숙은 즉시 반대하며 유소에게 재고하라 권했으나, 유소는 화를 내며 듣지 않았다. 소빈은 놀라 당황하던 중 유소의 뜻에 동조하게 되었고, 원숙은 끝까지 반대하였다. 유소는 원숙 등에게 복장을 나누어 주고, 싸울 태세로 차려입도록 했다.
- 날이 밝자, 유소는 소빈과 함께 수레에 타고 출발 대기했으며, 봉화문(奉化門) 부근에서 원숙을 기다렸다. 그러나 원숙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고, 마침내 차에 오르려 하지 않자, 유소는 좌우에게 원숙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이어 유소는 부하들을 이끌고 평소대로 조정 출조하듯 궁으로 들어갔다.
- 만춘문(萬春門)을 지날 때, 동궁 병력이 궁성 안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다. 유소는 문 수비대에게 자신은 천명이 하교(敕命)를 받아 군사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통과했다. 이후 장초지 등 수십 명은 운룡문(雲龍門), 동중화문(東中華門), 재합전(齋閤) 등을 통해 궁으로 돌진했고, 참도하여 상합전(上合殿)까지 진입했다.
- 그날 밤, 문제는 서담지(徐湛之)와 밤새 비밀 회담 중이었고, 수위 병사들은 여전히 잠복 중이었다. 장초지는 침입하여 문제와 서담지를 모두 참살하였다. 유소는 문제가 피살된 사실을 알고 동당(東堂)에 나가 앉았고, 소빈이 칼을 들고 호위했다. 또한 유소는 강담을 죽이라 명령했고, 좌세장 주 복천(卜天)과 그 부하들이 유소에게 반격하였으나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저항과 토벌 대응】
- 같은 날 유소(劉劭)는 곧바로 즉위하여 황제로 칭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서담지(徐湛之), 강담(江湛)은 역적이며 무도하다. 내가 군사를 이끌고 전각에 들어갔으나 이미 늦었고, 심장은 찢기고 간은 부서졌도다. 이제 죄인들은 진멸될 것이다. 대사면하고, 원가(元嘉) 30년을 태초(太初) 원년으로 고친다. 문하(文)에 등급을 하사하고, 제도는 일체 정묘년(丁卯)에 따르라.” - 유소는 자신이 황제 부친 문제(文帝)를 시해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서담지(徐湛之)와 강담(江湛)에게 누명을 씌웠지만, 곧 황제를 살해한 자가 유소 본인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조정의 관리들은 겉으로는 두려워 굴복했지만, 실제로는 충성하지 않았다.
- 유소는 자신이 싫어하던 여러 사촌 형제들을 처형했다.
【유소의 비밀 조서와 유준의 반란】
- 유소는 강주자사(江州刺史)였던 무릉왕 유준(劉駿)에게 비밀 조서를 내려 그를 죽이도록 신경지(沈慶之)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신경지는 오히려 그 조서를 유준에게 보여주고, 반란을 일으켜 유소를 몰아내야 한다고 권유했다. 유준은 이에 동의했고, 곧 다음의 세력들이 반란에 합류했다 :
- 숙부 남초왕 유의선(劉義宣) — 형주자사(荊州刺史)
- 장질(臧質) — 옹주자사(雍州刺史, 현 후베이·허난 일대)
- 동생 수왕 유탄(劉誕) — 회계군태수(會稽郡太守)
- 특히 유탄은 유준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소의 대응과 위기】
- 반란 소식을 들은 유소는 건강(建康)을 계엄령 상태로 만들고, 도성 내에 있는 형제들과 사촌들을 가택연금시켰다. 또한 아내 은씨(殷氏)를 황후로, 아들 유위지(劉偉之)를 태자로 삼았다.
- 그러나 유소는 문제 시절의 신하들이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을 것이라 의심하여, 장군 노수(魯秀)와 왕나한(王羅漢)을 가까이하며 군사권을 맡겼고, 오랜 측근 소빈(蕭斌)을 참모, 황후의 숙부 은충(殷沖)을 선전 담당으로 삼았다.
- 소빈은 유소에게 직접 수군을 이끌고 유준의 함대를 공격하라, 혹은 양산(梁山, 지금의 안후이 성 초호 일대) 협곡을 방어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비밀리에 유준을 지지하던 유의공(劉義恭)은 유소가 건강에 머무르며 진수(秦淮) 강을 방어선으로 삼으라고 유도했고, 이는 유준의 장점인 지상군 운용에 유리한 전략이었다. 덕분에 유준은 빠르게 건강에 진군할 수 있었다.
【전투의 패배】
- 유소의 장군 점숙아(詹叔兒)는 유준의 장군 유원경(柳元景)을 기습 공격하자고 제안했지만, 유소는 진이 다 구축된 뒤에야 공격을 감행했다. 초기에는 소빈, 유준의 장인 저담지(褚湛之), 노수, 왕나한 등이 이끄는 유소의 군이 우세했지만, 노수가 갑자기 후퇴 명령을 내리며 전투를 망치고, 유원경이 반격하여 유소군은 대패했다. 노수와 저담지는 곧 투항했고, 유의공도 유준 진영으로 도망쳤다. 이에 격분한 유소는 유의공의 열두 아들을 모두 죽였다. 이후 유소는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하고, 대신 두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대우를 약속하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못했다.
【궁궐 함락과 유소의 최후】
- 5일 후, 유준은 직접 건강 근처에 도착했고, 곧 스스로 황제에 즉위, 효무제(孝武帝)가 되었다. 전투는 계속되었고, 노수가 진수강을 건너 유소군을 공격하자 유소의 방어선은 붕괴되었다. 유소의 궁은 포위되었고, 동생 시흥왕 유준(劉駿)이 함께 동해로 도주하자고 제안했으나, 유소는 거절했습니다. 궁이 함락되자, 유소는 무기고의 우물 속에 숨었으나 발각되어 붙잡혔다. 유소는 고금에 의해 태극전 앞으로 끌려갔다. 장질이 그에게 왜 반역을 했느냐고 추궁하자, 유소는 “선제께서 저를 억울하게 폐위하려 했습니다. 감옥의 죄인이 될 수 없었기에 소빈에게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하라고 권했습니다.”라며 책임을 소빈(蕭斌)에게 전가했다.
- 또 유소는 장질에게 유준에게 부탁해 자신을 먼 곳으로 유배 보내달라고 청해달라고 했다. 장질은 유소를 말에 묶어 유준 군문으로 호송했다. 그러나 유의공(劉義恭)이 군영 앞에서 이를 지켜보다가 유소에게 자신의 열두 아들을 왜 죽였느냐고 추궁했다. 유소는 이에 대해 “이는 그대에게 부끄러운 짓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 강담(江湛)의 부인 유씨(庾氏)와 방수지(龐秀之)도 유소를 향해 욕을 퍼부었으나, 유소는 오히려 큰 소리로 “너희들이 뭔데 떠드느냐!”고 소리쳤다.
- 유소의 네 아들 모두 살해되었고, 유소는 유삭(劉鑠)에게 “이게 뭐 대수냐?”라고 말한 후, 결국 군영 깃발 아래에서 처형당했다. 죽기 전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종실(宗室)이 이렇게 몰락할 줄은 몰랐도다.”
【죽음 이후】
- 이미 황제에 즉위한 유준(劉駿)에 의해 유소의 난은 진압되었다. 유소의 부인 은씨(殷氏)와 유소 및 유준(劉濬)의 아들들 역시 모두 자결 또는 사형되었다. 유소를 도운 주요 관료인 은충(殷沖), 윤홍(尹弘), 왕라한(王羅漢), 장초지(張超之) 등도 처형되거나 자결을 명령받았다.
- 엄도육(嚴道育)과 왕앵무(王鸚鵡)는 길거리에서 채찍질당해 죽은 뒤, 시신은 불태워져 잿더미가 강물에 뿌려졌다. 유소와 유준의 시신도 장강(長江)에 버려졌으며, 유소의 동궁(東宮) 거처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 결국 453년 음력 5월 27일에 반란군이 쳐들어와 동생인 유준(劉濬), 자신의 4명의 아들 등과 같이 피살당했다. 이후 황제가 된 유준(劉駿)에 의해 원흉(元兇)으로 폄칭되었다.
- 《송서(宋書)》는 유소를 “원흉(元兇)”이라 부르며, 부친을 시해하고 제위를 찬탈한 죄로 인해 묘호와 시호를 올리지 않았고, 정통 황제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가족 관계】
- 후비 (后妃)
- 은씨 황후(殷氏 皇后) : 정식 황후
- 왕앵무(王鸚鵡) : 후궁, 동양공주의 시녀 출신
- 자녀 (子女)
- 유위지(劉偉之) : 황태자 (皇太子)
- 유적지(劉迪之) : 아들
- 유빈지(劉彬之) : 아들
- 無名 : 기록되지 않음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